고려사의 재발견 5.[명품열전-象嵌靑磁,高麗紙,大藏經,墓誌銘,石棺]
1. 상감청자(象嵌靑磁) - 宋 아닌 거란 공예기술 힘입어 탄생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참외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그 위에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이 있다.” (『고려도경』(1123년) 권32 도존(陶尊)편)
12세기 전반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묘사한 고려청자의 모습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술병 형상의 고려청자 모습이 쉽게 연상될 만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인의 눈에도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 제품으로 비칠 만큼 고려의 청자 제조술이 발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서긍이 주목한 고려 독자의 제품은 비색 청자였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당당한 어깨와 유연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사진 간송미술관]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의 백자, 절강(浙江)의 차 등과 함께 고려비색(高麗翡色*비색청자)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수중금(袖中錦)』)
비색청자는 서긍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고려의 높은 기술 수준이 반영된 제품이었다. 청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제작된다. 이 정도의 온도를 낼 수 있는 가마 시설에다 흙과 유약이 고온에서 융합돼 비취색이 감도는 특유의 색깔을 창출하는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비색청자는 지금의 신소재 첨단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서양에선 17세기에야 제작이 가능했다. 중국은 이미 9세기 무렵 청자를 생산했는데, 고려는 10세기 초 중국에서 기술을 수입해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1세기 후반~12세기 초에 독자의 제작기술을 개발해 탄생한 게 비색 청자다.
서긍은 “(고려의) 그릇은 대부분 금으로 도금한 것을 썼고 혹은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청도기(靑陶器)를 귀하게 여겼다”고 했다.(『고려도경』 권26 연례(燕禮)조)
12세기 초만 해도 고려 궁중의 연회에서 청자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보다 또 한 단계 도약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상감(象嵌)청자다. 12세기 중반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각종 형식의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서긍이 상감청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12세기 전반까지 상감청자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자 지붕까지 뒤덮은 청자
상감청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청자다. 상감은 원하는 형태로 물건을 만든 뒤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과 붉은 색 흙을 발라 굽는 기법이다. 단조로운 푸른색 대신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이 두드러진 고려청자의 백미다.
중국 기술을 모방하고 그 영향을 받아 생산된 ‘고려초기 청자’와 달리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생산된 청자를 ‘고려중기(11세기 후반~13세기 중반) 청자’라 한다(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2006).
송 황실의 제기(제사 용기)로 사용된 청자 파편. 2 중국 닝보(寧波)에서 발굴된 청자 파편. 박종기
“(고려 18대 국왕 의종은) 민가 50여 구(區)를 헐어서 대평정(大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해 현판을 짓게 했다. 주위에 이름난 꽃과 특이한 과실수를 심은 뒤 진기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좌우에 진열했다.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다. 그 북쪽엔 양이정(養怡亭)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엔 양화정(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 (『고려사』 권18 의종 11년(1157) 4월)
12세기 중엽 고려왕실이 지은 정자의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다. 정자인 ‘양이정’의 지붕을 인 청자기와는 현재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무렵 본격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항아리·주전자· 대접·접시·잔·병 등의 식생활 용구, 촛대·향로 등의 제의(祭儀) 용구, 베개·상자·의자·벽돌·기와 등의 주거 용구, 연적·벼루·붓꽂이 등의 문방 용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청자가 대량 생산돼 소비된 건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상감청자가 제작된 12세기 중반 이후다. 하지만 고려청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인 서긍이 비색 청자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최고의 기술수준을 보여준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더 크다.
그런데 지난 6월 26~30일 중국 항저우 저장대학에서 개최된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한국고등교육재단 지원)는 그런 아쉬움을 풀어준 기회였다. 한국·중국·일본의 고려청자 전공 학자들이 함께 모인 첫 학술회의인데, 제출된 논문만 무려 40여 편이나 됐다.
고려청자가 학술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회의였다. 세계적으로 고려사 일반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는 10명이 채 안 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학술회의의 규모와 수준은 필자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이번 자리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상감청자였다. 그 제작 기술과 유통이 주된 의제였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일본 학자 대부분은 상감청자 제작 기술이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봤다. 초기 청자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수용된 게 맞다. 하지만 상감청자 제작 기술까지 그렇게 본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독자적인 기술은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수용(모방)되고 변용(응용)과 창조의 단계를 거쳐야만 독자의 기술로 발전한다. 기술이 지닌 국제적 속성이다. 고려왕조 시절 국제 질서는 고려와 송나라·거란·금나라(여진)·일본 등이 다양하게 교류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송나라 외에 여러 국가의 교류했던 것이다.
더욱이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1년부터 50년간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한다. 민간교류는 계속됐지만 국교 단절은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교류에 제한을 주기 마련이다. 송과의 국교 단절 이후 고려의 공예기술은 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 (『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 조)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도자기 등 그릇 제조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상감 기술은 금속 제품과 나전칠기를 만들 때 금이나 은을 잘게 실 모양으로 꼬아 문양 주변에 테두리로 두르고, 그 속에 조개껍질 등을 박아 넣는 기술인 ‘입사(入絲)’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사는 거란의 전통적인 공예기법이다. 이처럼 상감기술은 고려가 처한 국제질서 속에서 거란의 기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송나라로부터 상감 기술이 일방적으로 수용됐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파편)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2. 고려지(高麗紙) - 희고 매끄럽고 질긴 종이 … 종주국 중국에 역수출
경기도 가평 장지방(張紙房)에서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모습. 장지방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지장(紙匠)의 공방이다. [사진 김형진 국민대 교수]
고려시대에 생산된 종이를 당시 중국의 문인·학자들은 ‘고려지(高麗紙ㆍ고려 종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요·영화·드라마를 선호하는 해외 트렌드를 ‘한류(韓流)’라 하듯이 고려지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이자 또 하나의 고려 명품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송(宋)나라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소비했고, 그 유물들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杭州)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고려사』 등의 역사 문헌에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고려지가 중국에 널리 유통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1074년(문종28),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대지(大紙) 20부(副*2000폭)를 각각 바쳤다.
원나라(몽골)도 고려와 1218년 공식 관계를 맺은 지 3년 만인 1221년(고종8) 고려로부터 종이 10만 장을 공물로 받아갔다. 또 1263년(원종3) 9월과 이듬해 4월에도 원나라는 다량의 고려 종이를 공물로 수취했다. 이렇게 고려지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한치윤(韓致奫;1765∼1814년)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엔 당시 중국인들의 고려지에 대한 평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은 외국의 오랑캐로부터 많이 가져다가 쓴다. 당나라 사람들의 시 속에 ‘만전’(蠻牋*오랑캐 종이)이란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엔 다 까닭이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종이(*만전)를 조공했다. (중국에서) 책을 만들 때 이것(*고려지)을 많이 사용했다.” (『해동역사』권27 문방류(文房流) 종이편)
고려지가 중국 대륙에서 널리 유통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흰빛에 결이 있는 매끄러움’ ‘두터움과 흰빛’ ‘흰빛과 질김’ 등의 표현으로 고려지의 우수성을 묘사했다. 종이는 인쇄술·나침반·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인데, 한나라 채륜(蔡倫)이 2세기 무렵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고려지를 수입해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지는 당시 중국 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뿐 아니라 양자강 유역의 만족(蠻族)에게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닥나무 재료와 두드리는 도침법이 핵심
최근 몽골에서 고려지를 생산했던 공방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몽골은 품질이 좋은 고려지를 공납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려지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여 수요를 충당했던 것이다. 고려지의 품질과 기술을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지의 기술 수준, 즉 제지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藤)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紙不全用楮 間以藤造 搥搗皆滑膩 高下數等).” (권23 토산조)
서긍은 고려지의 강점을 사용 재료와 제작 방법에서 찾았다. 『고려도경』에서 등나무가 일부 사용되었다 하나, 고려지의 주재료는 닥나무(*저;楮)다. 마지(麻紙)가 종이의 주재료인 중국과 다르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종이의 80% 이상은 마지였고, 민간에 전래된 서예나 회화에 쓰인 종이도 대부분 마지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년 제작 추정, 불국사 석가탑 출토)의 지질을 분석한 결과 재료가 닥나무임이 밝혀졌다. 당나라 시인의 시(詩) 속에서 만전(*고려지)이란 용어가 나타난 것처럼 고려지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때부터 닥나무를 재료로 종이를 제작해 왔던 것이다.
종이 표면을 두드려 가공함으로써 먹의 번짐을 막는 도침법(搗砧法)은 고려지 제작기술의 핵심이었다. 다라니경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의 종이도 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술은 종이 면을 고르게 하여 섬유 사이의 구멍을 메우고 광택 있는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 가공 기술이다.
또한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지나치게 물을 빨아들이거나 보푸라기가 이는 문제점이 해결된다. 적당한 수분을 고르게 먹인 다음, 큰 망치로 두들기는데 그때 두드리는 양을 가늠하는 데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다.
또한 종이 지질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며 잔털이 일어나지 않아 글씨가 깨끗하게 잘 써진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백추지’(白硾紙*표면이 희고 단단한 종이)나 ‘경면지’(鏡面紙*표면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한 종이) 또는 ‘견지’(繭紙*표면이 솜처럼 부드러운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제작기술 덕택이다.
이 기법은 종이 위에 먹을 떨어뜨리면 먹이 스며드는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먹이 옆으로 번지지도 않는다. 이 기술은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계승된 기술이다. 반면 중국의 제지술은 종이 표면에 백색 광물질 가루를 바르고, 작은 돌로 비벼 광을 내는 방식이다.
고려지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 도침법은 닥나무와 같이 비교적 단단한 종이 재료 때문에 창안된 기술이다.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마(麻)와 비단 따위의 종이재료는 닥나무(楮)에 비해 부드럽기 때문에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지는 닥나무를 재료로 했을까? 닥나무는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자연풍토에서 가장 잘 자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여 생산된 것이 고려지인 셈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확립된 도침법 기술 덕에 고려지는 종이의 종주국인 중국인도 호평을 할 만큼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 된 것이다.
‘所’ 시스템으로 수공업 생산 국가적 지원
고려지가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순히 종이 제작 기술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박과 자동차·핸드폰· TV와 같은 제품이 세계 일류제품이 된 것은 끊임없는 기술 축적과 함께 그를 뒷받침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은 국가적·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바로 ‘소(所)’ 생산체제로 압축된다.
“고려 때 또한 소(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금(金)소, 은(銀)소, 동(銅)소, 철(鐵)소, 사(絲)소, 주(紬)소, 지(紙)소, 와(瓦)소, 탄(炭)소, 염(鹽)소, 먹(墨)소, 곽(藿)소, 자기(瓷器)소, 어량(魚粱)소, 강(薑)소로 구분되었으며, 해당 생산물을 공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조)
고려 때 제도화된 ‘소’는 금·은·동·철 등의 광산물, 소금(*鹽)·미역(*藿)·생선(*漁)·생강(*薑)·직물(*絲ㆍ紬) ·땔감(*炭)·생선(*魚梁) 등의 농수산물, 자기·칠기(*나전칠기)·종이(*紙)·기와(*瓦)·먹(*墨) 등의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이다.
고려는 ‘소’라는 특수 행정단위를 두고 해당 제품의 전문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각종 제품의 생산을 위한 잡역에 동원된 소민(所民)을 두어 수준 높은 수공업제품을 생산했다. 이를 소 생산체제라 한다. 종이와 청자 외에 나전칠기와 먹·칼 등 당시 중국에서 크게 호평을 받은 고려의 수공업제품도 이런 생산체제에서 생산되었다.
소와 함께 향(鄕)과 부곡(部曲) 및 장(莊)·처(處) 등의 특수 행정단위를 묶어 부곡제(部曲制)라 한다. 부곡제는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구조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요한 축이었다.
왕조건국 반대세력을 所에 편제시켜
부곡제의 일부인 소 생산체제는 고려왕조 성립기의 역사적 특성 속에서 생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개간의 확대로 형성된 새로운 촌락을 군현체제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군 또는 현이 되지 못한 영세한 지역을 향이나 부곡·소 등으로 편성했다.
고려는 왕조 건국에 반대한 세력들을 이곳에 편제시켰다. 당시 지역 간에 사회·경제적 발전 격차가 커서 중앙정부가 전국을 일률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제도를 만든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그 가운데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광산물과 농수산물 및 수공업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편성했다. 일종의 사회적·지역적 분업체제였던 소에서 고려의 명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고려청자와 고려지가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는 사치와 화려함을 추구한 고려 문벌귀족층의 기호와도 맞물려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소는 명품을 향유한 문벌귀족층과 명품을 만드는 장인층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향유자와 생산자의 분리는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질 높은 문화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고려지 역시 이러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의 결과물인 셈이다.
[출처] 박종기 국민대학교 교수/ 고려사의 재발견/ 중앙 SUNDAY
3. 대장경 - 불교 지식과 첨단 인쇄술 결합된 5000만 자의 하이테크
해인사에 소장돼 있는 재조대장경. 국보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고려 왕조가 11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대장경이다. [중앙포토]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장(經藏), 그것을 해설하고 내용을 보완한 논장(論藏), 수행자의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등 불교와 관련된 경전을 전부 모은 게 대장경이다. 대장경에는 편찬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경전이 포함되어 있다. 한 왕조에서 두 번이나 대장경을 만든 세계 유일의 왕조가 고려다.
“국왕(*고종)은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에 행차하여 백관과 함께 분향을 했다. 현종 때 만들어진 판본이 임진년(*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왕이 군신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都監)을 세워 16년 만에 마쳤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1251) 9월)
두 번째 대장경(1236년 시작)이 16년 만에 완성된 사실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완성된 경판 숫자가 8만여 개라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고려 때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라서 ‘재조(再彫두 번째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후자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재조대장경은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은 983년 완성된 송나라 대장경이지만 1127년 금나라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고려는 991년(성종 10년) 송나라에서 이 대장경을 입수했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받자, 고려는 송나라 대장경을 토대로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옛날 현종 2년(1011) 거란주(契丹主: 거란 국왕)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략하자, 국왕은 남쪽으로 피난했다. 거란군은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한 뒤 물러가지 않았다.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하여, 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기로 했다. 그러자 거란군사는 스스로 물러갔다.”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054년(문종 8년) 거란이 자신들의 대장경을 완성하자(1034년 시작), 10년 뒤인 1063년(문종 13년) 고려는 이를 입수한다. 그리고 현종 때 착수한 대장경을 보완하여 1087년(선종 4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초조(初彫고려에서 처음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다.
고려, 대장경 두 차례 만든 유일한 왕조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는 유교와 불교였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인 민주주의 이념과 같다. 민주주의 이념의 어젠다를 우리가 선점하고 주도한 적이 있었던가? 대장경 판각은 고려가 당시의 불교 지식과 사상체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하여 동아시아 사상과 지식체계를 주도했다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대장경을 단순히 불교유산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제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장경 판각에 관한 이규보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때(현종 때)나 지금이나 대장경은 한 가지고, 그것을 새긴 일도 한 가지고, 군신(君臣)이 함께 하늘에 서원한 것도 한 가지이다. 그런데 어찌 그때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韃靼*몽고)은 그렇지 않겠는가? (중략) 진실로 지성으로 (서원)하는 것이 그때(*현종)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려 신통한 힘을 빌려 완악한 오랑캐가 발길을 거두고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232년(고종 9년) 몽고 침략으로 불타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들 당시 모든 군신의 비장한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초조대장경은 70여 년 만에 완성되었는데(1011~1087년), 재조대장경은 16년 만에 완성되었다(1236~1251년). 그러나 재조대장경에 표시된 작성연대를 검토하면, 실제로 1237년(고종 24년)에 제조가 개시됐고 1248년(고종 35년)에 완성되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짧게 11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재조대장경 판각 도중 몽고와 두 차례 전쟁(3차: 1235~1239년, 4차: 1247~1248년)이 있었다. 전쟁 중인 3년간(1237~1239년, 1247~1248년) 전체의 16%만 판각되었다. 대부분(84%)은 전쟁이 없던 7년(1240~1247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판각되었다.
특히 1243년 지방에 분사(分司)대장도감이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판각이 이루어지면서 대장경 판각은 급속하게 진행됐다. 전쟁이 없던 1243년(전체 20%), 1244년(24.7%), 1245년(10.3%), 1246년(6.6%)의 4년 동안 전체의 약 62%가 완성됐다(최연주, 『고려대장경 연구』, 2006).
김정희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
고려가 짧은 기간에 대장경을 완성한 것은, 이규보의 증언과 같이 불심(佛心)으로 몽고 침략을 물리치려는 고려인의 혼과 정성의 결과였다. 추사 김정희가 재조대장경을 보고 “이것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다(非肉身之筆 乃仙人之筆)”라고 극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규모도 대단하다. 재조대장경에 새겨진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다. 500년 역사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5600만 자인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숙련공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길 경우 5200만 자를 새기는 데 연인원이 약 130만 명 동원됐을 것이다.
16년의 작업을 전제로 하면 하루 평균 300명에서 1000명 이상이 동원된 셈이다. 평균 길이 68~78㎝, 폭은 약 24㎝, 두께 2.7~3.3㎝인 경판을 가로로 눕혀 쌓으면 백두산 높이에 가깝다. 그것을 이으면 150리가 된다.
1개 경판을 만들기 위해 지름 40㎝인 원목은 2만7000그루, 지름 50~60㎝인 원목은 1만~1만5000그루가 필요하다(박상진,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2007년).
재조대장경 작업이 단기간에 끝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초조대장경을 제작한 경험이다. 재조대장경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저본(바탕이 된 경전)의 60%는 초조대장경이다. 재조대장경이 단기간에 완성된 가장 큰 이유다.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것을 종이에 찍은 인본(印本)은 현재 1900점 정도 남아 있는데, 일본(약 1700점)과 한국(약 200점)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둘째, 재조대장경이 저본으로 삼은 나머지 40%는 초조대장경 이후 송과 거란에서 새로 수집한 경전이다. 즉 초조대장경 제작 이후(1087년) 재조대장경 제작(1236년)까지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 동아시아에 유통된 수많은 불교 경전을 꾸준히 수집·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축적된 연구가 있었기에 고려의 불교 연구와 이해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것이다. 재조대장경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고려 최고의 학승(學僧)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의 역할이 컸다.
“(선종) 2년(1085) 4월에 왕후(王煦*義天)가 몰래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의천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배우기를 (송 황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관리를 데리고 오(吳) 땅의 사찰들을 방문했다. (중략) 의천은 귀국하면서 불교와 유교 경전 천 권을 (선종에게) 바쳤다. 또 국왕(선종)께 아뢰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거란과 송에서 사온 불교 경전 4000권을 간행했다.” (『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왕후(王煦) 열전)
의천이 1085년(선종 2년) 송나라에 가 여러 사찰에서 불교를 연구했으며, 거란과 송나라에서 수천 권의 불교경전을 구입하여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의천은 이렇게 초조대장경을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의천에 이어 승통(僧統) 수기(守其)는 재조대장경을 조판하기 위해 여러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교정했다.
고려 금속활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
대장경은 한편으로 인쇄술 발달이라는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다. 인쇄술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로서 인류 문화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인문적 가치 혹은 인문정신과 결합된 것이다. 기술과 정신이 결합된 정화(精華)가 바로 인쇄술이다.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은 751년 통일신라 때 제작된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이다. 목판인쇄술이 통일신라 때부터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기술 전통에 힘입어 고려가 두 차례나 대장경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조대장경 간행 직전인 1234년(고종 21년)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재조대장경 제작 당시 고려 인쇄술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흔히 재조대장경을 ‘5000만 자의 하이테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과학기술이 대장경 제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불교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기술이 결합됐기에 대장경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이규보의 말 속에는 첨단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당시 고려 문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만으로 대장경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스마트폰은 흔히 인문정신과 첨단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대장경 또한 그것에 비유할 만하다. 대장경은 고려 명품의 지위를 넘어 기술과 지식의 결합이라는 한국형 전통문화의 정수이자, 미래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4. 묘지명(墓誌銘) - 망자의 아름다운 행적 기리는 기록문화 정수
고려 중기의 문신 최루백의 부인 염경애(1100~1146)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이 부인의 생애를 시와 산문으로 압축해 기록했다. [중앙포토]
“『예기(禮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묘지명은 조상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조상에게 아름다운 행적이 없으면서 칭찬하면 거짓(*誣)이다.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 알리지 않는다면 밝지 못한 것(*不明)이다. 그것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不仁)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부인은 행실이 아름답고, 여러 아들이 밝고 어질다. 이 세 가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부인의 공과 행실을 모두 적어 무덤에 넣는다.” <김변(金賆) 처 허씨(許氏) 묘지명>
묘지명(墓誌銘)은 한 인물이 숨진 뒤 망자의 이름과 나이, 가계와 행적, 가족 및 장지(葬地)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고려 때에만 성행한 기록문화 유산의 하나다.
묘지명(墓誌銘)의 ‘지(誌)’는 기록한다는 뜻이고 ‘명(銘)’은 이름(名)이라는 뜻이다. 즉, 덕(德)과 공(功)이 있어 세상에 이름을 남길 만한 사람이 숨지면 후손들이 그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묘지명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대장경이 고려 장인(匠人)들의 혼이 담긴 명품이라면, 묘지명은 인간의 아름다운 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고려 기록문화의 정수다. 명품 반열에 올려도 부족하지 않다.
중국서 받아들인 풍습 … 고려 때만 성행
묘지명은 망자(亡者)의 시신과 함께 지하에 매장됐다는 점에서 무덤 앞 지상에 세운 묘비명(墓碑銘)과 다르다. 또 묘비명이 조선 왕조 이후에 성행했다면, 묘지명은 고려 때에만 성행했던 기록문화인 점도 다르다.
그러나 망자의 일대기를 산문 형식으로 정리한 지문(誌文)과 그것을 주로 사언(四言) 형식의 운문(韻文:시)으로 압축한 명문(銘文)으로 구성된 점은 같다. 원류를 따지자면 묘지명은 묘비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묘비명은 중국 한나라 때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205년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후장(厚葬*호화장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상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 그 대신 소형 비석을 만들어 관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성행하면서 묘지명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엔 묘비명 제작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고려에선 지상의 묘비명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세울 수 있었다.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67점의 묘비명은 모두 왕명으로 제작됐다.
왕사와 국사를 역임했거나 그에 준하는 고승(高僧)들의 것이다. 일반인의 묘비명은 고려 말 권문세족인 염제신(廉悌臣:1304~1382년)과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自春:1315~1361년)의 것만 남아 있다. 그 정도로 일반인의 묘비명 제작은 엄격한 규제를 받았던 것이다.
조선도 초기엔 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인사에게만 묘비명 제작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조상 숭배 의식이 발달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화려하고 거대한 묘비명 제작이 보편화된다. 묘비명 금지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고려 초 세워진 홍법국사 실상탑비. [사진 문화재청]
고려 왕조 내내 묘지명 문화가 이어진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을까? 중국에서 묘지명 규격이 정형화되고, 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북위[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왕조:386∼534] 때였다.
이후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한 귀족 문화의 영향과 관련이 있다. 고려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정치·과거·군사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격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묘지명 문화의 발달은 고려 왕조의 이런 개방정책과 맞물려 있다. 고려 묘지명은 중국 북위의 묘지명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형식도 북위의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귀화인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묘지명이다.
“(채인범은)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뵈었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또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 (채인범 묘지명)
송나라 사람으로 경전과 역사에 달통했던 채인범이 광종의 발탁으로 관리가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오래된 묘지명은 1045년(정종11)에 제작된 유지성(劉志誠:972~1039)의 것이다. 유지성 역시 송나라 양주(楊州) 출신으로, 성종 대에 고려에 귀화해 재상을 역임했다. 고려엔 이들보다 앞서 쌍기 등 많은 중국인들이 귀화해 관료로 활동했다. 이들이 고려에서 활동하다 숨지면서 묘지명을 만드는 장례풍습이 고려에 도입된 것이다. 대체로 11세기 무렵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왕족·관료 부인 등 여성 묘지명 유독 많아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서 발달한 또 하나의 원인은 당시 지배층의 장례 풍습인 화장(火葬)과 관련이 있다. 화장 뒤 망자의 뼈를 수습해 작은 크기의 석관에 담아 지하에 매장했는데, 묘지명은 이런 작은 공간에 석관과 함께 매장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조상 숭배와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망자의 생애를 화려하고 장황하게 서술한 묘비명과 달리 망자의 생애를 간략하게 서술한 묘지명이 화장식 장례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무덤에 지석(誌石:묘지명)이 있는 것은 오래되었다. 세대가 멀어지면 간혹 (무덤이) 허물어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살펴보면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알게 되어 차마 덮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사대부 군자가 그 어버이를 장례 지낼 때 지석을 만드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은 것이다.” (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의 묘지명)
뒷날 무덤이 훼손되더라도 매장된 지석으로 인해 주인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묘지명의 효용성이 있다. 다만 묘지명은 지하에 묻히는 만큼 지상의 묘비명처럼 쉽게 수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묘지명은 많지 않다.
현재 확보된 고려시대 묘지명은 대부분 개발 혹은 자연재해로 인해 무덤이 훼손된 결과 드러난 것이다. 묘지명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중국 북위도 현재 400점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경우엔 현재 약 320점 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수치는 중국에 비해 적지 않은 것으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매우 성행했다는 증거다. 이 중 실물로 전해지는 묘지명은 200점이고, 나머지 120점은 묘지명을 작성한 사람의 문집 등에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가운데 승려의 것이 20점, 왕족의 것이 3점, 부인의 것이 34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일반 관료층의 묘지명이다. 반면에 일반 주민이나 지방 세력의 묘지명은 전무하다. 이 점에서 묘지명은 고려시대 관료층이나 중앙 지배층의 문화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특히 왕족과 관료의 부인 등 여성 묘지명이 많은 점도 또 다른 특징이다.
“을축년(1125년) 봄 나는 우정언 지제고(*임금의 잘못을 깨우치는 간관)가 되었다. (중략) 아내는 내게, ‘당신이 궁전에서 천자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라고 말했다.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다.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쉬움은 말로 할 수 없다. (중략) 명(銘)하기를, ‘믿음으로 맹세하건대 당신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함께 묻히지 못함이 매우 애통하도다. 기러기 떼와 같은 아들딸들이 있어 부귀가 대대로 창성하리라’라고 했다.” (염경애(廉瓊愛) 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崔婁伯)이 사별한 아내 염경애(1100~1146년)의 내조와 희생을 기리며 직접 작성한 묘지명이다. 마지막 명문(銘文)에서 아내의 생애를 시로 압축하고 있다. 사별의 슬픔을 시의 형식을 빌려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명문은 죽음과 이별을 ‘여유와 관조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고려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인물사·가족사·사회사 연구에 귀한 자료
묘지명에 여성의 실명(實名)이 기록된 경우는 이 묘지명이 유일하다. 고려의 여성 묘지명에는 이 밖에도 출가한 딸이 홀어머니를 모시거나, 재혼한 여인이 전 남편의 자식을 교육시킨 모습 등이 기록돼 있다.
남자와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고, 호주도 될 수 있었던 고려 여성의 당당한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조선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묘지명은 인간의 출생과 사망, 가계와 출신, 관원의 이력, 가족 관계, 장례 관련자료 등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 시대 인물사와 가족사·사회사 연구 자료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묘지명 작성엔 일정한 양식이 있다. 북위의 묘지명에서 정착된 이 양식은 당나라와 송나라로 이어져, 명나라 때 이름 자, 성씨, 출신지(*鄕邑), 세계(世系: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이란 뜻으로 ‘族出’의 의미), 관력(官歷:관리로서의 경력이란 뜻으로 ‘行治’의 의미), 이력(履歷:학업·직업·경험 등의 내력), 사망일(*卒日), 나이(*壽年), 처(妻), 자식(子), 장일(葬日), 장지(葬地) 등 13항목으로 확정된다. (王行의 『묘명거례(墓銘擧例)』)
고려 문신들은 다가올 죽음 앞에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自撰 묘지명)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세속의 욕망을 절제하고 삶에서 ‘여유와 관조’를 맛보려 했다. 현대인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자찬 묘지명’을 작성해 보는 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5] 석관(石棺) - 망자의 극락환생 빌며 화장한 유골 갈무리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관의 모습. 전면에 보이는 청룡을 비롯해 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국민대 박물관]
청자나 대장경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문화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석관(石棺)이다. 석관은 1916년 개성 개풍군에 위치한 고려 문신 송자청(宋子淸: ?~1198년)의 분묘에서 처음 출토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90㎝, 너비 46㎝, 높이 45㎝, 두께 3㎝ 정도 크기다. 망자의 시신을 담기 위해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든 오늘날의 석관과는 다른 크기와 용도임을 알 수 있다.
송자청의 석관에선 묘지명과 부장품도 발굴됐다(『조선고적도보』 7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약 60점의 고려 석관도 모두 이 정도 크기다. 전부 개성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의 문화재다. 석관들이 만들어진 형식도 한결같다. 천판(天板: 덮개)과 지판(地板: 밑부분)으로 구성된 두장의 판석(板石)에다 지판 위에 설치돼 천판을 전후좌우에서 지탱하는 4장의 판석 등 모두 6장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석관은 조립식 석관으로 불린다.
석관은 고려 장례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다. 석관을 통해 당시 장례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석관과 함께 출토된 송자청의 묘지명엔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1174년(명종4) 서경의 반역자 조위총(趙位寵)이 공격하자, 공(송자청)은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먼저 나가 화살을 맞으면서 싸워 격파했다. (중략) 공은 1195년(명종25) 3품의 벼슬로 은퇴했고 1198년(신종1) 12월 20일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갔다(숨졌다). 영×산(靈×山) 서쪽에 장례를 지냈다가,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점쳐 유골을 안장했다.” (송자청의 묘지명)
망자가 숨진 뒤 사흘간을 전후해 빈소에서 조문을 받은 뒤 화장 혹은 매장을 하는 요즘의 장례 형식을 단장(單葬)이라 한다. 반면 위의 기록에서는 송자청의 장례를 치른 뒤 얼마 후 다시 무덤자리를 정해 유골을 안장했다고 한다. 요즘의 장례와는 다른 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다음의 기록이다.
“공은 향년 83세다. 올해(*1144년) 봄 2월 을미일(*14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 땅 동쪽 기슭에 화장했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 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묘지명을 짓는다.” (허재 許載: 1062~1144년: 묘지명)
유골을 담는 뼈항아리(골호). 통일신라기에 제작된 것으로 국보 125호로 지정됐다
오랜 기간 제례 올려야 망자에 대한 예의
고려 중기의 문신 허재는 숨진 뒤 26일 만에 화장됐고, 그 뒤 5개월 만에 화장으로 수습된 유골이 다시 매장된다. 사망→화장→유골 수습과 안치→매장까지 약 6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런 고려의 장례 형식을 ‘복장’(複葬)이라 한다. 여러 차례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다.
복장은 1·2·3차 장(葬)이라는 3단계의 의식을 치른다. 사망 후 빈소를 차려 손님을 맞는 빈례(殯禮)에 이어 화장(火葬)이나 매장(埋葬)을 통해 탈육(脫肉)하는 과정을 거쳐 유골을 수습하는 단계가 1차 장이다.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사망 후 대체로 5일에서 29일 사이에 화장을 한다.
화장 외에 시신을 땅에 매장해 탈육하는 경우 약 8~20개월이 걸린다. 12세기 중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화된다. 이어 유골을 수습한 뒤 사찰 등에 임시로 안치해 제사를 지내는 단계를 2차 장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은 4개월에서 6년4개월까지 차이가 많다.
“옛날 조상을 장례 지낼 때 날을 멀리 받는 것(遠日: 오랜 기간의 장례)이 예의다. 사대부가 3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예법이 아니다.” (『고려사』 권85 형법 금령 충숙왕 복위8년(1339)조)
고려 장례 풍습은 이렇게 오랜 기간 제례를 올리는 것을 망자에 대한 예의로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 망자의 안식처이자 후손의 발복지(發福地)인 길지를 택하고, 분묘를 조성하며 석관과 묘지명 및 부장품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골을 사찰에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즈음 세상의 도가 쇠퇴해 풍속이 경박하다. (중략) 부모의 유골을 사찰에 임시로 모셔두고 수년 동안 매장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관리들은 이를 조사해 죄를 줄 것이며, 만일 가난해 매장하지 못한 자는 관에서 비용을 지급하라.” (『고려사』 권16 인종 11년(1133) 6월)
복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이 든 탓에 유골을 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국가가 경비를 지원해 장례를 마무리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안치된 유골은 석관에 담겨 매장됨으로써 장례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3차 장이라 한다. 석관은 이같이 복장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송자청의 석관 크기(90×46×45㎝)가 당시 표준이었던 것으로 보아, 석관은 수습된 망자의 유골을 담는 용기와 부장품을 담는 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관은 화장식 장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661~680년 재위)은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부터 화장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다. 원래 화장은 불교와 관계없이 신석기 시대에 발생해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일대에서 성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행해진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삼국·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불교가 발달된 고려 때 성행했다. 고려 때 화장은 승려뿐 아니라 왕족·귀족과 민간 일부 계층까지 확산됐다.
석관은 이런 과정에서 부각된 문화재다. 고려 때 왜 석관 문화가 성행했느냐는 물음은 당시 왜 화장을 했느냐는 물음과 통한다. 화장에 대한 고려인의 생각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장(葬)’이란 감춘다(藏)는 뜻이다. (망자의) 해골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래 불교의 다비법(茶毗法*화장)이 성행해 사람이 죽으면 모발과 피부를 태워 해골만을 남긴다. 심한 경우는 뼈를 태우고 재를 날려 물고기와 새에게 베푼다. 이렇게 해야 망자가 하늘에 가서 다시 태어나 서방세계(*서방정토의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 권85 형법 금령조 공양왕 원년(1389)조)
관료·지배층 문화 … 서민들은 매장·풍장
모발과 피부는 물론 뼈까지 태우는 화장을 해야만 망자가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석관은 망자를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한 뒤 일정기간 안치해 제례를 올린 후 다시 석관을 만들어 유골을 정성스럽게 담아 매장했다. 그렇지만 화장이 고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장례 도구를 갖추지 못하면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개미, 까마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어도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다.” (『고려도경』 권22 잡속(雜俗)조)
이 글에서 드러나듯 고려의 일반 주민은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조차 어려워 들판에 시신을 놓아두는 풍장(風葬) 같은 ‘단장’(單葬)을 했다. 묘지명의 주인공이 왕실·관료층과 그 가족이듯이, 석관도 관료·지배층 장례문화의 일부였다.
석관은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석관의 네 벽은 관의 좌우에 해당하는 길이가 긴 장벽(長壁)과, 석관의 앞뒤에 해당하는 길이가 짧은 단벽(短壁)으로 구성된다. 석관의 네 벽 외면에는 주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네 벽 가운데 2장의 장벽 좌우에 각각 청룡(靑龍*좌청룡)과 백호(白虎*우백호)를, 나머지 2장의 단벽 전후에 각각 주작(朱雀*남주작)과 현무(玄武*북현무)를 선으로 깊이 새겼다. 또는 돋을새김을 했다.
사신(四神)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석관을 매장할 때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도 했다. 동서남북을 상징한 청백주현(靑白朱玄)의 네 색깔은 중국 황제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할 때 사방의 방향에 따라 각각 해당 색깔의 흙(*色土)를 내려준 데서 연유했다.
사신도는 석관 내부를 망자의 소우주로 간주하고, 망자의 안식을 위해 석관의 외면에 사신을 배치한 그림이다. 그 밖에 연꽃무늬(*蓮花文), 당초문(唐草文), 비천상(飛天像), 봉황문(鳳凰文), 구름무늬(雲文), 12지신상, 모란무늬 등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석관의 뚜껑과 밑판의 판석에도 테두리를 선으로 새긴 뒤 위와 같은 그림을 새겨 넣었다.
석관의 장식은 남북조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거란의 석관에 새겨진 그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석관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왕릉의 12지신상을 계승한 것이다. 또 석관에 새겨진 장식기법은 고려의 도자기와 금속용품, 부도 등의 장식문양을 계승했다. 고려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또 석관의 양식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장유골을 담은 삼국시대의 ‘골호’(骨壺*뼈항아리)를 계승하고 있다. 골호는 돌덩이 속을 파내어 화장유골을 담고, 그 바깥(*石函이라 함)을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석관은 내부에 골호와 같은 기능인 망자의 화장유골을 담은 그릇(*주로 나무상자)이 있다. 이와 함께 청자, 동전, 숟가락 등 부장품이 들어있고, 그 외부에는 사신도를 새겨 골호보다 양식적으로 더 발달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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