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관계[한중 5000년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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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5000년①』<고조선과 중국의 대립> http://blog.naver.com/ohyh45/220829482637
『한중 5000년③』<고려의 중국과 북방유목민족과의 관계> http://blog.naver.com/ohyh45/221133938322
『한중 5000년④』<조선의 중국과 북방유목민족과의 관계> http://blog.naver.com/ohyh45/221207335771
『한중 5000년⑤』<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
이성계 일가는 원나라 지방군벌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1392년 조선 건국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면서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중국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은 원나라를 중국 왕조의 하나로 보나, 몽골은 원을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칭기즈칸 제국의 일부로 본다. 몽골족이 세운 여러 나라 중 원나라만 하더라도 중국 본토뿐 아니라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북베트남, 고려 등을 직·간접 지배했다.
원나라가 중국 왕조라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청말(淸末) 황흥, 장병린, 추용 등 많은 한족 출신 혁명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국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라 몽골 왕조의 하나로 봐야 한다. 중국은 아전인수(我田引水)에서 벗어나 원과 요(遼)의 역사를 몽골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베이징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도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해 역사적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요나 금(金), 원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부를 영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전 화북을 정복한 흉노, 선비, 저·강 등과 달리 몽골인은 중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중앙아시아 문명국 호레즘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대도시를 보고 온 후 중국에 진입한 까닭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몽골족은 오히려 ‘땅에 엎드려 밭이나 가는’ 한족을 경멸했다. 4세기 모용선비 전연(前燕) 황제 모용준이 생포한 한족 염위(冉魏) 황제 염민을 노복하재(奴僕下材)라고 경멸했듯이 몽골족도 한족을 멸시했다.
쿠빌라이(1215~1294)는 몽골인을 1등급, 서역인을 2등급, 한인(거란, 여진, 금나라 치하 한족)을 3등급, 남인(남송 치하 한족)을 4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민족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장관에는 몽골인이 임명되고, 차관에는 서역인이 임명됐으며, 한인이나 남인에게는 말단직만 주어졌다.
유교(儒敎)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격하됐다. 한화파(漢化派)가 권력을 잡았을 때만 겨우 몇 번 과거가 치러졌다. 이처럼 민족차별 정책은 소수 몽골인이 다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몽골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이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 간 차별도 심했는데, 이는 남인의 수가 한인의 7~8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옌징(베이징)에 막부(幕府)를 차린 무칼리는 잘라이르부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략을 맡겼다. 무칼리는 칭기즈칸과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함께 마신 사구(四狗), 사준(四駿) 중 하나로 칭기즈칸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사구, 사준은 충견 넷과 준마 넷을 뜻하는 말로, 칭기즈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이룬 8명의 장수를 가리킨다.
몽골어로 말한 ‘고려 王’
고려는 결국 몽골에 항복해 쿠빌라이가 세운 원(元)에 편입됐다. 쿠빌라이는 만주 일대를 영지(領地)로 받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가문 세력을 견제하고자 남쪽의 고려를 이용했다. 충렬왕 이후 고려왕들은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았으며, 원칙적으로 정비에게서 난 아들을 왕세자로 봉했다.
고려 왕들은 세자 시절 대도(베이징)에서 인질로 체류하다가 즉위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식 변발에다 몽골어를 주로 사용했다. 충렬왕의 아들 이지리부카(충선왕)는 원나라 내부 권력투쟁에도 가담했다.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은 제후왕으로 격이 낮아졌다.
제후왕으로 전락해 조(祖),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처럼 왕호에 ‘충(忠)’을 덧붙였다.
원은 고려 영토 내에 쌍성총관부(함경도 일대), 동녕부(평안도 일대), 탐라총관부(제주도)를 뒀다. 원나라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瀋陽王)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다.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한 데는 남만주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고려인 통제에 편리했을 뿐 아니라 만주의 지배자인 테무게 가문과 고려왕을 동시에 견제하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왕과 심양왕은 수시로 대립했다. 이는 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제대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등뼈 꺾인 壯士
홍건군의 우두머리를 그린 중국 그림.
원나라 지배기 고려는 등뼈를 꺾인 장사(壯士)처럼 독자성을 잃어갔다. 원나라 말 고려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수용하면서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의 한족 중심적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심화됐다.
원나라 시기 중동-중앙아시아로부터 선진 과학기술이 도입됐다. 역학(曆學)과 수학에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뤄졌다. 강남에서 생산된 쌀과 소금, 직물이 운하와 바다를 통해 대도로 운송됐으며, 이에 따라 조선과 항해술이 크게 발달했다.
명나라 초기 정화의 인도양 항해(航海)도 이때 발전한 조선과 항해술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쿠빌라이를 계승한 황태손 성종 이후 제위(帝位) 다툼을 둘러싼 권신(權臣)들의 발호로 인해 원나라 궁정은 음모의 소굴(巢窟)이 됐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지도부는 제대로 된 통치철학을 갖지 못했다. 몽골족은 싸우고 빼앗는 데는 천재적이었으나, 1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다스리는 데는 금방 무능을 드러냈다. 쿠빌라이 재위 기간 이미 허난과 안후이(安徽)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원나라는 재정 담당에 압둘 라흐만, 상가, 아흐마드 등 상인 기질의 중앙아시아인을 주로 기용해 입도선매(立稻先賣) 방식으로 세금을 거뒀다. 거의 착취 수준이었다. 그들은 원(元)이라는 대제국을 공공(public)이 아니라 사업(business)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았다. 한마디로 통치철학 부재였다.
수·당(隋·唐) 이래 화이허(淮河) 이남이 경제중심지가 됐으며, 인구도 강남이 화북에 비해 월등히 많아졌다. 남·북조(南北朝), 수·당, 5대 10국, 송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중심이 황하 상류 시안과 뤄양에서 카이펑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류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창장 하류로 옮겨온 것이다. 특히 항저우(杭州)를 수도로 한 남송은 강남을 집중 개발했으며, 이후 왕조들인 원· 명·청 등은 국가 재정을 주로 강남에 의존했다.
1351년 황허 둑 쌓기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농민들이 백련교(白蓮敎) 주도로 허난에서 봉기했다. 원나라군은 송(宋) 휘종의 후손을 자처한 백련교 교주 한산동(韓山童)이 주도한 농민 반란군을 공격해 초기에 격멸했으며 한산동을 붙잡아 처형했다.
백련교는 조로아스터교를 개혁한 마니교(摩尼敎)의 중국 버전으로 명교(明敎)로 불렸으며, 허난과 안후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백련교도 봉기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하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렸다.
홍건軍, 고려를 침공하다
홍건군의 봉기를 필두로 반란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소금거래업자인 저장(浙江)의 방국진(方國珍)에 이어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과 장사성(張士誠), 후베이의 서수휘(徐壽輝)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빈농 출신 걸승(乞僧) 주원장(1328~1398)은 1351년 곽자흥 군단에 가담했다.
주원장은 고향 안후이성 후저우(濠州)에서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죽마고우들을 포함한 지휘관급 병사 700여 명을 모집했다. 영민한 자질에다가 우수한 장교까지 거느린 주원장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원나라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백련교도 유복통은 1355년 안후이의 박주(亳州)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해 송(宋)을 세웠다. 홍건군 본류에 속한 곽자흥과 주원장 등은 형식적으로나마 송(宋)을 받드는 모양새를 취했다.
원나라 조정은 유복통, 한림아의 반란을 원의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사로 판단했다. 원 조정은 톡토와 차칸테무르를 사령관에 임명해 반란에 대처하게 했다. 원나라군과 한족 지주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홍건군을 공격했다. 유복통은 원나라군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는 4로(路)로 분산해 대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잘못 판단했다.
유복통은 자신이 중로(中路)를 맡아 허난을 점령하는 한편, 제1로의 관선생(關先生)은 허베이, 제2로의 모귀(毛貴)는 산둥, 제3로의 대도오(大刀敖)와 백불신(白不信)은 관중으로 진격하게 했다. 관선생이나 대도오, 백불신을 비롯한 홍건군 지도자 다수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가명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복통은 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유로 원 조정의 목표가 돼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나라 정규군의 공격을 받았다. 1359년 카이펑이 차칸테무르군(軍)에 점령되자 유복통은 한림아와 함께 벽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허베이로 진출한 관선생은 타이항 산맥을 넘어 산시성 다퉁(大同)을 약탈한 후 동북진(東北進)해 원나라 하계 수도인 개평부(금련천)를 점령했다. 관선생은 원나라군이 추격해 오자 동쪽으로 달아나 랴오양(遼陽)을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다.
홍건군은 베이징 부근을 우회해 근거지인 허베이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으로 탈출로가 막히는 바람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하한 것이다. 홍건군의 제2차 침공 시 고려는 개경을 빼앗기고, 왕(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해야 했다. 고려는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이 모집한 의용병의 분전에힘입어 겨우 개경을 탈환했다.
개경 탈환戰 참가한 元지방군벌, 이성계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1335~1408)도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홍건군은 4로로 분산된 끝에 봉기 10여 년 만에 소멸됐다. 홍건군은 통일된 이념과 군율을 갖지 못했다.
홍건군이 급히 소멸된 것은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군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홍건군을 4로로 나눈 유복통의 전략적 실수와 함께 △뚜렷한 이념을 갖지 못한 홍건군 지도자들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괴작용(自壞作用) 때문이었다.
특히 산둥 지난(齊南)에 일시적으로 뿌리내린 모귀 군단의 자괴작용은 목불인견이었다. 모귀는 부하인 조균용에게 살해당했으며, 조균용은 속계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아놓은 미인과 재산을 차지하고자 싸운 것으로 보인다.
톡토가 이끄는 원나라군은 장사성과 서수휘를 비롯한 반란군에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톡토는 권력투쟁에 패배해 실각하고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세를 불려나갔다.
1356년 안후이, 허난, 양저우 등에 큰 흉년이 들었다. 장사성 군단은 원나라군의 공격에다가 기근도 겹쳐 강남으로 탈주했다. 운 좋게도 그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 등 강남의 경제중심지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장사성과 방국진은 유사시에 대비해 고려에 조공했다. 쑤저우와 항저우는 곡창지대이자 상공업도 발달한 ‘천하 2개의 과실’이었다. 곽자흥이 죽은 후 그의 군단을 이어받은 주원장도 남쪽으로 탈주해 장쑤성의 중심지 집경(난징)으로 들어갔다.
유기(劉基)와 이선장(李善長) 등 명망 있는 지식인을 거느리게 된 주원장의 위세는 집경 입성 후 한층 더 높아졌다.
1360년 서파(西派) 홍건군의 수장이던 서수휘의 부하 진우량(陳友諒)이 후베이, 후난을 포함한 창장 중류 지역에서 한(漢)나라를 건국하고, 창장의 흐름을 따라 동진하기 시작했다. 중국 통일의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천하는 ①창장 중상류의 진우량 ②중류의 주원장 ③하류의 장사성 등 3자 대결로 판가름 나게 됐다.
건곤일척, 포양후大戰
강화도 마니산.
원나라가 경제중심지 강남을 잃고 겨우 버텨가는 가운데 우창(武昌)의 진우량과 쑤저우의 장사성에게 에워싸인 난징의 주원장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쑤저우와 항저우를 점령한 장사성은 당초의 기개를 잃어버리고, 향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사성은 정치를 동생 장사신에게 맡겼으며, 장사신마저 부하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향락을 추구했다.
장사성에 비해 진우량은 상관 예문준(倪文俊)과 서수휘를 차례로 살해하고 서파(西派) 홍건군을 손아귀에 넣을 만큼 과감하고 의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서수휘가 살해되자 부하 명옥진(明玉珍)은 쓰촨을 배경으로 독립해나갔다.
이 무렵 원나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홍건군에 항복했다가 다시 원나라에 투항한 자들에게 속아 산둥 익도(益都)에서 암살됐다. 이로써 화북의 원나라 영토는 강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웅할거 각축장으로 변했다.
강남·북 공히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동근상전(同根相煎)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주원장은 서쪽의 진우량과 동쪽의 장사성에게만 신경 쓰면 됐다. 주원장에게 거듭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주원장은 창장 중상류로 서진하고 진우량은 창장 중하류로 동진해 같은 홍건군 출신인 2개 세력권이 겹쳤다. 중원의 사슴(패권)을 목표로 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1363년 진우량은 동진해 주원장의 세력권이던 포양후(鄱陽湖) 남안(南岸)에 위치한 홍도(난창)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주문정과 등유 같은 주원장의 장군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홍도 구원에 나섰다.
주원장이 직접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진우량은 60만 대군을 동원해 포양후 입구에 위치한 후커우(湖口)로 진격했다. 주원장의 20만 대군과 진우량의 60만 대군이 포양후에서 총 36일간에 걸친 수전(水戰)을 벌였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건곤일척의 대결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향락에 빠진 장사성은 움직일 줄 몰랐다. 주원장은 유기, 유통해 등 부하들의 활약과 화공 전술에 힘입어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보급 문제에 시달리던 진우량군을 대파했다. 전투 중 함선을 바꾸어 타던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는 바람에 전투는 끝났다.
‘明’ ‘마니산’ 유래
포양후 대전 후 주원장의 패권은 확고해졌다. 포양후 전투 2년 뒤인 1365년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창장 남북에 걸친 장사성의 영토를 빼앗아 나갔다. 주원장 군단은 항저우와 후저우(湖州), 우시(無錫)를 점령해 장사성의 도읍으로 동양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물과 비단의 도시 쑤저우를 고립시켰다.
쑤저우를 포위한 1366년 12월 주원장은 부하 장수 요영충을 시켜 송나라 황제 한림아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주원장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모두 치워졌다. 주원장은 1367년 쑤저우마저 점령하고 장사성을 포로로 잡았다. 쑤저우 함락 직후 일사천리로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의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도를 향해 진격했다.
주원장은 북벌군이 대도를 향해 진격하던 1368년 1월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했다. 이는 주원장 자신이 명교(마니교) 출신인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라크 북서부에서 시작된 마니교(摩尼敎)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분파로 중국에서는 끽채사마(喫菜事魔)로 불리기도 했으며, ‘광명의 신’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이라크의 앗시리아인들이 믿는 예지디교와 유사한 점이 있다. 대한민국에도 마니교 전래의 흔적으로 보이는 강화도의 마니산(摩尼山)이 있다.
명나라군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원나라는 우유부단한 황제 토곤테무르(순제)와 그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순제는 황자 시절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으며, 고려 출신 기씨(奇氏)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고려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원나라 조정은 몽골 지상주의자(국수파) 바얀과 한화파 톡토 간 대립에다가 황제파 볼로드테무르와 황태자파 코케테무르(차칸테무르의 아들) 간 대립도 격화돼 온갖 난맥상을 다 연출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이래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 등으로 해외 원정이 계속돼 국가재정도 붕괴된 지 오래였다.
강남으로부터 쌀과 소금이 오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달과 상우춘이 지휘하는 25만 명나라 대군이 북진해 오는데도 군벌 간 대립이 계속됐다.
이제 명나라군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달은 1368년 8월 대도를 점령했다. 일체의 저항 없이 대도성을 내준 순제 토곤테무르는 북쪽으로 도망하다가 내몽골에서 병사했으나,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라다라는 외몽골로 도피하는 데 성공해 원나라를 이어갔다. 원나라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크게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된 것이다
테무게 왕가 가신, 이자춘
명 태조 주원장. [위키미디어]
명나라 건국 후 고려 공민왕은 난징으로 축하 사신을 보내기는 했으되 중국 정세 변화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1370년 이성계와 이인임, 지용수 등이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함경도 지역)에서 출발해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도하해 혼란에 처한 랴오둥에 진입했다. 고려군은 랴오둥의 중심도시 랴오양을 점령했으나 보급 문제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테무게 왕가 영역 내에서 실력을 길렀다. 원나라 시대 만주 일대를 지배한 테무게 왕가는 나얀 시기 원나라 대칸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실패한 후에도 제후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실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고려 ‘무신란’ 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위화도 회군 현장에 있던 장수 셋의 초상. 화면 중 3인은 훗날 역성혁명 주역이다. 가운데가 이성계(1335~1408)라고 한다. 좌 이지란(1331~1402), 우 심덕부(1328~1401)가 호위하고 있다. [뉴시스]
원말(元末)-명초(明初) 만주의 몽골 세력을 대표하던 나하추(무칼리의 후손)는 1375년 랴오둥반도 남부 일대를 공격하다가 대패했다. 나하추는 1387년 풍승(馮勝)과 남옥(藍玉)이 이끄는 20만 명나라 대군이 다링허-랴오허 유역 근거지 금산(金山)을 압박하자 명나라에 항복했다. 나하추 일가는 명나라에 항복함으로써 명나라가 주도하는 질서하에서 제한된 권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1388년 3월 남옥에게 10만 대군을 줘 북원(北元)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만주라는 옆구리를 상실한 북원군을 내몽골 부이르호(捕魚兒海) 전투에서 대파하고, 북원을 외몽골로 축출했다. 이로써 북원(北元)과 고려 간 연계는 끊어졌으며 왕실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렸다.
이에 앞선 3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평안도 북부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이성계 일파는 그해 5월 우왕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치러 출격했다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회군해 대명(對明) 강경파를 숙청하고,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했다.
불패 명장, 조선을 열다
2017년 10월 21일 조선 건국 설화를 바탕으로 이성계의 군대 행렬이 승전을 알리는 취타대를 시작으로 장군을 호위하는 무사단, 신인, 선녀와 금척무 공연 등이 재구성돼 전북 진안군 홍삼축제장에서 재현됐다. [진안군제공]
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승계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는 몽골식 평지전과 산악전에 모두 능숙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군단은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최무선 등과 함께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南北朝) 내전에 패배한 규슈의 사무라이 위주로 구성된 왜구의 침략을 진포와 운봉(남원) 등지에서 격퇴하고, 신흥 사대부의 대표 격인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승리와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출처] 백범흠 주독일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현직외교관이 쓴 한 중 5000년>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