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의 갈림길』 Ⅱ - ①1880년대 개혁의 기회②日‘굴욕 개항’ 콤플렉스③'정한론' 둘러싼 권력투쟁④앞서조선에 관여한 이노우에 가오루⑤고종이 보낸 암살단에 격노한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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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의 갈림길』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46576901
① 19세기… 韓日 운명을 가른 순간, ② 대원군의 길, 메이지유신의 길, ③ 류큐 멸망 보고 조선내정 간섭 시작한 淸,
④ ‘반일’ 이전에 ‘항청’… 속국을 거부한 조선의 싸움, ⑤“나라가 부강하면 어찌 오랑캐가 협박을…” 박규수의 울분
『한일 역사의 갈림길』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72208791
⑥ 조선, 1880년대 개혁 기회를 날리다, ⑦ ‘굴욕 개항’ 콤플렉스가 부추긴 日 해외침략”, ⑧‘정한론’ 둘러싼 권력투쟁,
⑨ “이토 히로부미보다 앞서 조선에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 ⑩ 고종이 보낸 암살단에 격노한 김옥균의 상소문
6.“조선, 1880년대에 찾아온 개혁의 기회를 날리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동아일보DB
《1880년경부터 1894년 청일전쟁 발발까지 약 15년간은 조선에 기회의 시기였다.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아직 침략적이지 않았다. 아니, 조선을 침략할 만한 국력이 없었다. 일본은 독립을 유지하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게 능력의 한계치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의사와 능력을 갖춘 것은 1890년대 들어서다. 청나라는 일본을 견제하고자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권장했으며 1882년 미국 등 서양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도 적극 주선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던 러시아도 조선에 구애하여 고종이 조-러 밀약을 추진하는 등 세력균형책을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조선의 메이지유신’ 꿈꾼 개화파
이렇게 열린 공간 속에서 조선의 정치세력들도 활발히 움직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다. 이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 초엘리트 청년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불과 10여 년 전 벌어진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이 뻔질나게 일본을 찾은 것도 이래서였다. 당시 서른을 갓 넘긴 고종도 구닥다리 노(老)대신들보다는 같은 세대인 이들에게 솔깃했다. 1882년 임오군란 수습사절단으로 일본에 간 이들은 일본 당국뿐 아니라 도쿄 주재 서양 외교관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옥균과 뜻을 같이했던 민씨 세력의 총아 민영익은 영국 공사 파크스를 만나
“청과 조선의 조공관계는 일정한 의례에 한정된 것으로 청은 조선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최근 청조의 행위는 전례에 반하는 것이다”라며 “조선인은 청조의 간섭을 참을 수 없다”고 분개했다.
러시아 공사를 만난 박영효는 “청조의 야심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고 자주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분투할 것이라고 결기를 보였다. 김옥균은 더 광폭 행보를 했다. 일본뿐 아니라 서양 국가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김옥균 일파는 고종의 호의와 일본의 지원에 고무됐다. 때마침 청불전쟁으로 서울 주둔 청군 일부가 빠져나가자 급하게 정변을 일으켰다(1884년 갑신정변). 졸속 쿠데타의 피비린내 나는 결말은 다 아는 대로다. 약관의 위안스카이는 청군을 이끌고 궁궐을 포위하여 정변세력과 일본 병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확보했다.
일본 공사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이 정변 소식에 일본열도는 분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공사관은 불탔고 다수의 일본인이 죽임을 당했으며 외교관인 공사가 생사의 경계를 헤매다가 도망쳐 왔던 것이다.
맹목적 對日 적개심의 폐해자세히 보기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는 항상 일본을 악마화한다. 결국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의 행위를 소급 적용하는 사고습관이다. 한국 병합을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분노하지 않으랴. 그러나 모든 시기와 사건에서 일본은 항상 침략적이었다고 무작정 전제하는 것은 역사를 규탄의 재료로만 삼는 자세다.
이런 역사교육은 맹목적인 적개심만을 갖게 해 우리의 현명한 대일 태도를 방해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규탄만이 아니라 지혜다. 게다가 일방적인 일본의 악마화는 다른 세력들, 예를 들어 청이나 러시아 세력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야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자신, 특히 당시의 위정자들을 민족주의 혹은 반일이라는 이름으로 감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을 당시의 위정자들을 치켜세우는 최근의 일부 논의들은 그 적나라한 폐해다.
그거야 어쨌든, 때마침 흥기하고 있던 일본 신문 산업은 갑신정변으로 대목을 만났다. 저마다 자극적인 삽화와 기사로 도배질을 했다. 이런 보도는 일본 구석구석까지 침투했다.
청군과 이에 동조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고 저마다 ‘응징’을 외쳤다. 이 때문에 일본 내셔널리즘이 하층민에게까지 침투한 계기를 갑신정변으로 보는 학설이 있을 정도다.
1882년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다수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자 일본에서는 청군과 이에 동조한 조선인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사진은 갑신정변 주요 인물들이 1884년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중앙이 박영효,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유길준이다. 동아일보DB
그러나 임오군란에 이어 연달아 자국민이 살해당한 이 사태 앞에서도 일본 정부 리더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1873년 정한론 분쟁 때와 같았다. ‘아직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 그 대신 내정을 개혁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 생애 세 번째 유럽여행을 떠나 최고의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 강의를 들었다. 돌아와서는 내각 제도를 창설하여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헌법을 제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헌법은 한마디로 이토의 작품이다.
그는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다시 들끓기 시작한 정한론을 억누르고 경제건설에 매진했다. 1880년대 후반 메이지정부의 강력한 리더십하에서 경제성장이 일어났다. 이를 ‘공업발흥의 시대’라고 한다. 정부는 인프라를 깔고 자본 조달을 위해 금융제도 정비에 진력했으며, 철도업과 면직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국력 키우고 한반도 침탈 노린 日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 관원들의 탈출도.
‘부국’의 달성은 ‘강병’으로 이어졌다. 1870년대에 정부 예산의 14∼19%에 그쳤던 군사비는 1880년대에 25%를 돌파했다(현재 일본은 6∼7%). 이런 군비 확장에 제동을 거는 세력도 물론 있었다. ‘부국’이 ‘부민(富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국민복지와 평화이슈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지 못했다. 1890년 제국의회 개원 때 당시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한다.
“지금 열강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 주권선 수호에 그치지 않고 이익선을 지켜 국가의 독립을 완전하게 하려면 헛된 말로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국력이 허락하는 대로 실력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육해군에 거대한 예산을 할당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성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익선은 한반도였다. 결국 ‘부민평화’ 노선이 아니라 ‘부국강병’ 노선이 이겼다. 이제 일본의 군사력은 자국뿐 아니라 한반도를 커버할 수 있어야 했다. 1877년 서남전쟁 때 4만 명에 불과했던 일본의 상비병은 1893년경 15만 명에 달해 있었다.
만약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같은 사태가 조선에서 또다시 발생한다면 일본은 얼마든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다.
[출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일 역사의 갈림길> - 6.“조선, 1880년대에 찾아온 개혁의 기회를 날리다” / 동아일보,2021. 7. 23.
7.“현실화된 몽상…‘굴욕 개항’ 콤플렉스가 부추긴 日 해외침략”
1853년 7월 일본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흑선(Black Ship)’.
매슈 페리가 이끈 미국 함대는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고, 이듬해 다시 방문해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한다. 페리 함대에 굴복한 일본이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은 쇄국의 문을 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미국 예일대 소장
《일본에서는 18세기 말, 19세기 초부터 해외 팽창론이 등장한다. 당시 각국이 각축을 벌이던 유럽이라면 모를까, 임진왜란 이후 수백 년간 전쟁을 겪지 않았고, 또 그럴 위기도 없었던 일본이니 희한한 일이다.
러시아가 홋카이도 부근에 출몰하는 것을 목격한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캄차카에 일본의 수도를 옮기고 사할린에 성곽을 세운 다음 연해주, 만주와 교역하여”라며, 거기서 얻은 이윤으로 일본을 영국과 비견되는 대강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서역물어·西域物語’, 1798년).
캄차카를 고른 이유는 런던과 위도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그 ‘포부’만은 엿볼 수 있다.》
침략론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에게서 더욱 황당해진다. 사토는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룻밤에 만주에 도달할 수 있다며
“만주, 몽골을 취하고 이 오랑캐들을 잘 다스려 이들로 하여금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면 중국이 강성하다 해도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버러지 같은 만주 오랑캐들도 중국을 취한 바 있다. 하물며 일본의 병량과 대포, 화약의 위세를 갖고서 그 뒤를 잇지 못하겠는가. 십수 년 사이에 중국 전체를 통일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혼동비책·混同秘策’, 1823년)라고까지 방언(放言)한다.
반복되는 황당한 해외팽창론
당시 동아시아에는 어떤 군사적 위기 상황도 없었다. 이 무슨 난데없는 소리인가. 백주대낮의 몽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시 이런 소리가 호응을 얻을 리 없었고 하물며 막부 당국자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1850년대 일본이 개항을 하고 국방위기 의식이 강해지자 해외팽창론이 대규모로 부활한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에조지(홋카이도)를 개간하여 다이묘(大名·지방 정부의 봉건영주)를 봉하고 캄차카, 오호츠크를 탈취하며, 류큐도 타일러 복속시켜야 한다. 또 조선을 조공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남으로는 타이완, 루손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야 한다”며, 나아가 오스트레일리아도 아직 영국이 일부만 점령하고 있으니 서둘러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유수록·幽囚錄’).
사토 노부히로나 요시다 쇼인은 모두 재야의 인물로 정책 결정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인물이니, 그저 잠꼬대로 치부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850년대 일본이 개항하게 되자, 정책 결정자들도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의 일급 브레인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는 “지금 세계는 맹주가 등장해야 전쟁이 멈추게 될 것이고, 그 맹주는 영국과 러시아 중에 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해주, 만주, 조선을 병합하고, 또 아메리카 대륙이나 인도에 영토를 갖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인도는 서양이, 연해주는 러시아가 손을 뻗치고 있어 당장 이를 실현하기는 어려우므로 영국, 러시아 중 하나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가 동맹 상대로 좋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불만 달래려는 레토릭
이처럼 세계가 끊임없이 전쟁을 할 것이며 결국 한 나라에 의해 평정될 것이라는 견해는 곧잘 일본의 세계 제패라는 망상으로 연결됐다.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 노중(老中·수상)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는 “개국을 훗날 세계를 통일할 기초로 삼고 널리 만국과 항해·무역을 하며,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국력을 기르고 무비를 튼튼히 하면, 전 세계가 일본의 위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마침내 일본은 세계만방의 대맹주로 떠받들어지고 각국은 일본의 정교(政敎)와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호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에서는 가끔 간도나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토나 요시다의 허풍이야 그냥 그러려니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결정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런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850, 60년대의 일본이 세계통일은 고사하고 한반도에 진출할 힘조차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당시 일본이 서양 열강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개항을 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레토릭이었다고 해석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말만 그렇게 했지 해외 침략을 준비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막부의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세력들도 서양 침략을 막기 위해 대선(大船)을 건조하자는 주장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모두 몽상 수준이었던 것이다. 몽상을 꾸는 이유는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서양과 중국에 대한 소국 콤플렉스, 300년간 쇄국으로 열도 안에 갇혀 있던 데서 오는 자폐적 자기인식, 그리고 개항 과정의 굴욕감에서 오는 콤플렉스 등등.
몽상도 자주 하면 여론이 되고 진짜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몽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어 줘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야 할 정치적 이유와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일본에서 비등하기 시작한 정한론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로 당장 조선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았다. 진짜 목표는 내부의 권력 투쟁, 정치 상황의 수습에 있었다.
국내 정치 불만 해외로 돌리기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은 당시엔 내부 정치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국내 정치 상황을 통제하려던 ‘고약한 방편’은 훗날 일본의 해외 침략으로 이어진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메이지 유신 3걸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1869년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를 세계에 떨치고, 국내의 민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이 발언의 후반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타도하면 자기들 세상이 오고 서양 오랑캐들을 쫓아낼 수 있을 거라고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 계층을 해체시키고 서양과는 우호관계를 선언해 버렸으니 이들의 불만이 어디로 향할지는 명약관화했다. 자칫 메이지 정권으로 향할 이들의 에너지를 대외전쟁으로 돌리는 걸 기도는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국내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정한론을 바꿀 수 있을 것이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일왕의 허락까지 받아내자, 기도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협력해 이를 분쇄했고, 이듬해인 1874년에는 대만 파병에도 반대했다. 그에게 정한론은 국내 정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방편치고는 고약한 방편이다
[출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일 역사의 갈림길> - 7.“현실화된 몽상…‘굴욕 개항’ 콤플렉스가 부추긴 日 해외침략” / 동아일보,2021. 8. 20.
8.‘정한론’ 둘러싼 권력투쟁… 감정 대신 이성적 접근한 日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초상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의 10년 권력이 끝나가던 1873년 겨울, 일본에서도 메이지정부의 운명을 가를 거대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발발 후 일본은 조선에 신정부 수립을 알리고 국교를 새로 맺을 것을 요구해왔다.
조선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요구가 1609년 체결한 기유약조 체제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일축했다.
그런 갈등이 이미 5년을 넘고 있었다. 부산에서의 교섭과정에서 들리는 양측의 갈등 소식은 안 그래도 전쟁을 바라던 사무라이들을 자극했다. 사이고는 이에 올라탄 것이다.》
그해 7월 사이고는 정부 실력자이자 도사번(土佐藩)의 총수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게 이렇게 말한다. “군대를 파견하면 조선 측에서 반드시 철수를 요청할 것이고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사절을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조선이 (사절에 대해) 폭거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므로 전쟁의 명분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절을 파견하면 잡아 죽일 것이 예상되므로 부디 저를 보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 죽는 것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학자 중에는 사이고는 자기가 서울에 직접 가서 조선과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 도발로 전쟁 추구하던 사이고
그러나 8월에 역시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전쟁을 곧바로 시작해서는 안 되고, 전쟁은 2단계가 되어야 합니다. … 사절을 잡아 죽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때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죄를 토벌해야 한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깊은 전략입니다. … 저를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전쟁으로 연결시키겠습니다.”(‘자유당사’ 상)
이를 보면 사이고의 진의는 평화적 해결이 아니라, 사절 파견으로 조선을 도발해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란이 폭발하기 전에 그 에너지를 조선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이원우, 사이고 다카모리와 ‘정한론’) 메이지유신 직후 기도 다카요시가 보였던 인식 그대로다.(8월 20일자 본 칼럼 참조)
이런 인식은 수뇌부뿐 아니라 하급 관료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었다. 당시 외무성 관리로 부산 왜관을 오가며 조선과 교섭하던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지금 일본은 병사가 많아서 걱정이지 적어서 걱정이 아닙니다. 각지의 병사들이 무진전쟁(戊辰戰爭·막부 토벌 전쟁)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투를 좋아하며 내란을 생각합니다.
조선을 공격하는 것이 병사들의 울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조선과 싸움으로써 우리 병사들을 훈련하고 황위(皇威)를 해외에 빛낼 수 있느니 어찌 신속하게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30개 대대를 동원하면 50일 내에 정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현명철, ‘메이지유신 초기의 조선침략론’)
혁명지도자 절반 서구 시찰 나서
이와쿠라 사절단 주요 지도부가 187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위키피디아]
그러나 당시 일본은 반쪽짜리 정부가 다스리고 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자마자 정부 실력자의 반이 조약개정과 서구문물 시찰을 위해 구미로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명한 이와쿠라 사절단인데, 사이고의 죽마고우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그 주역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사절단에 끼어 있었다.
혁명 초창기 아직 정권이 불안할 때인데도 혁명지도자의 반이 일본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으니, 이들이 국제관계와 해외정보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놀라게 된다. 일본을 떠날 때 오쿠보는 사이고에게 중요한 정책들은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시행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고 사이고도 승낙했다. 이른바 ‘잔류정부’다.
그러나 잔류정부는 징병령, 양력 채용, 지조개정(地租改正), 학제(學制) 반포 등 획기적인 정책들을 연속적으로 시행했다. 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절단 멤버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정책들이었기에 묵인했다.
그런데 마침내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소식이 유럽의 사절단에 날아들었다. ‘정한론’, 즉 조선침략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오쿠보가 보기에 이는 매우 위험한 전쟁이었다.
즉각 귀국한 오쿠보는 사이고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나섰다. 유신의 영웅, 사무라이들의 두령 사이고와의 싸움이니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아들에게 유서를 써놓고 한판 승부에 나섰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귀국 즉시 정부에 복귀했지만 오쿠보는 이를 거부한 채 정부 밖에서 궁중공작을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때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했던 이와쿠라-오쿠보 라인의 재가동이다. 사이고의 서울파견은 각의를 거쳐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메이지 천황에게까지 보고한 상태였으니 거의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뒤엎기 위해 산조를 맹렬히 압박했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산조가 병으로 쓰러지자 이와쿠라가 냉큼 태정대신(대리) 자리에 올랐다. 당시 21세에 불과했던 메이지 천황은 오쿠보와 이와쿠라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란 빌미 된 정한론 논란
서울파견이 무산되자 내일이라도 ‘조선정벌’에 나설 듯이 신났던 사무라이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방치하면 내란을 피하고자 했던 정한론이 도리어 내란의 빌미가 될 판이었다. 사이고는 급거 사쓰마의 가고시마로 낙향했다.
그 휘하의 병력이 대거 그를 따라가 천황의 근위대가 텅텅 빌 지경이 되었다. 이 정한론 정변으로 오쿠보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커다란 숙제가 생겨버렸다. 바로 ‘재야인사’ 사이고 다카모리다. 그 결판은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에서야 났다.
일본은 사이고의 감정보다는 오쿠보의 이성을 택했다. 10개가 넘는 구미열강들의 부강을 목격한 오쿠보에게 일본은 아직 어린애였다.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인구 1500만의 조선을 굴복시킬 힘이 일본에는 아직 없었다.
청이나 구미열강이 개입하면 또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실제로 22년 후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요동반도를 조차하려 하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개입해 이를 무산시켜 버린 걸 보면(삼국간섭), 오쿠보의 우려도 기우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만일 정한론이 실행되었다면 메이지 정부는 그 와중에 붕괴했을 거라고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선은 참화를 겪었겠지만.
[출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일 역사의 갈림길> - 8.‘정한론’ 둘러싼 권력투쟁… 감정 대신 이성적 접근한 日 / 동아일보,2021. 9. 17.
9.“이토 히로부미보다 앞서 조선에 깊이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영국 런던에서 유학한 일본 조슈번의 청년 5명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접한 뒤 개국파로 변신했다.
뒷줄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 앞줄 왼쪽이 이노우에 가오루.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는 흔히 한일 근대사에 관련된 일본 정치인 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오랫동안 한국 문제에 간여한 사람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라는 인물이다.
막부 타도에 앞장섰던 조슈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원훈 중 한 명이다.
이토 히로부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의 고향 친구이자 정치적 맹우(盟友)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정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 맞서 대내적으로는 개명노선, 대외적으로는 온건외교를 펼칠 때 이노우에는 항상 그의 편이었다.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내무대신, 재무대신을 역임했으니 총리 빼놓고는 다 해본 실력자다.》
이노우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함께 부전권대사로 파견되어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조약 체결 후 미국과 유럽에서 2년간 공부했다. 그 전에도 이미 20대 시절인 1863년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었으니, 메이지 정부 최고의 서양통이라 할 만하다.
청나라와 전쟁 경계한 日
그가 조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간여하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때부터다. 당시 그는 외무대신이었다. 구식군대의 불만으로 터진 내란에서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살해당했다. 일본 여론은 민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투쟁에 애꿎은 일본인들이 희생됐다며 분노했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유길준과 윤치호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에게
“청국이 이 기회에 대원군을 문죄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하고 조선인이 그 지휘를 받으면 조선은 독립을 다시는 도모할 수 없으며 조선의 모든 권리가 청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라며 일본 병력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김흥수, ‘임오군란 시기 유길준·윤치호 연명상서’).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청보다 먼저 서울에 입성하기 위해 직접 병력을 파견했다. 자칫하면 동시 파병한 청과 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노우에는 이를 우려했다. 그가 주도한 정부회의는 “아직 개전한 게 아니므로 폭도를 만나더라도 전투를 피하고 방어에만 힘쓴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이노우에는 군부에 내훈(內訓)을 보내
“육해군은 공사(公使)의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으로, 평화를 위한 출동이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평온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조선에 체류할 때에도 현지인에게 난폭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쳐두었다.
이참에 일본의 힘을 빌려 대원군, 나아가 민씨 세력을 소탕하려 했던 김옥균은 이런 뜨뜻미지근한 조치에 이노우에와 하나부사 공사를 ‘2인조 악당’이라며 분개해했다(김흥수·위의 논문).
日에 ‘저자세’ 보인 조선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공격당하자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비롯한 공관원들이 인천으로 탈출해 귀국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의 보도판화. 당시 외무대신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때부터 조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간여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임오군란이 수습된 지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김옥균의 개화당 쿠데타에 일본군 병력이 가세했으니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였다. 일본정부는 현직 외무대신인 이노우에를 파견했다. 외무대신을 직접 보낼 정도로 사태를 엄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이노우에에게 서울의 상황이 보고되었다. 일본 측 인원 2명이 불탄 일본 병영을 조사하고 있는데, 돈의문(서대문)을 지키던 청국 병사가 이를 제지하면서 총 한 발을 쏘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자신의 신변보장을 요구하며 제물포를 출발해 입경했다. 1885년 1월 4일, 그의 숙소에 통리아문독판(외무장관 격) 조병호가 예방했다.
조병호는 “원래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양국 관계는 어떤 지장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민간인 수십 명이 죽고 공사관이 불탔으니 일본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갑신정변은 쿠데타에 일본이 개입한 것인데도 첫 만남에서 이미 ‘좋게, 좋게’ 매듭지으려는 저자세가 느껴진다.
이노우에는 이를 놓치지 않고 “설령 오랜 우호국이라 하더라도 한 번 일이 틀어져 양국이 전쟁에 이르는 것은 자고로 예가 적지 않은 일”이라며 위협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이노우에에게 호통친 김병시
마침내 1월 6일 이노우에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고종을 알현한다. 이 알현 장면도 긴장감이 가득하다(‘근대한국외교문서’ 9권). 이노우에 발언을 일본 측 통역관이 고종 옆에서 직접 아뢰자 사대당의 김병시(金炳始)가 무엄한 일이라며 제지했다.
공식적인 접견의례가 끝나고 이노우에가 상주할 게 있으니 좌우를 물리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김병시가 대신들은 물러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종이 대신은 잔류케 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노우에가 누가 대신이냐고 물었다.
고종이 영의정 심순택 등을 가리키자, 이번에는 대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다. 고종이 미처 답하기 전에 김병시가 “대신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물러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어찌 무례하게 이처럼 직접 여쭙는가!” 하고 크게 꾸짖었다.
이노우에가 아랑곳하지 않고 담판은 왕이 직접 하실 것인가 아니면 전권을 임명할 것인가 하고 묻자, 고종은 전권이 할 것이라고 했다. 이노우에는 재차 전권은 누구로 삼을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김병시가 “이리도 강압적으로 여쭙다니 어찌 이리 무례한가!” 하고 막아섰다.
나중에 고종은 김병시에게 그때 기분이 아주 좋았다며 청에서도 ‘조선에는 김병시가 있다’고 했다더라는 말까지 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이노우에의 오만과 김병시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일화지만, 다음 날부터 전권대신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서 진행된 회담은 외교가 기개만 갖고 되는 게 아님을 아프게 보여줬다. 이노우에는 시종 전쟁 발발 가능성을 내보이며 김홍집을 압박했다.
그 결과 맺어진 것이 우리가 시험 보려고 외우던 한성조약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전쟁할 형편이 못 되었고, 위에서 본 대로 이노우에 자신도 전쟁이 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회담장에서 처음 마주 앉은 바로 그날(1월 7일), 청의 이홍장은 도쿄 주재 청국 공사에게 일본 정부에 충돌을 원치 않음을 알리라고 통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노우에의 공세를 좀 더 잘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교는 기개보다는 정보와 판단력이다.
여담이지만, 10년 후 갑오개혁 때 이노우에는 다시 조선에 와서 김홍집을 내각총리대신의 자리에 밀어 올렸다. 갑오내각의 붕괴와 함께 김홍집은 서울 시내에서 군중에게 맞아죽었다. 이 두 사람도 기연이라면 기연이겠다.
[출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일 역사의 갈림길> - 9.“이토 히로부미보다 앞서 조선에 깊이 간여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 동아일보,2021. 10. 15.
10.김옥균, 고종이 보낸 암살단에 격노… 日 망명 중에 상소문
일본 망명 당시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김옥균(왼쪽사진 왼쪽). 오른쪽 그림은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가 1887년 2월 일본 잡지에 게재한 풍자만화 ‘낚시 놀이’.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모습을 담았다. 김옥균이 꿰뚫어본 당시 세계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아일보DB·위키미디어
《1884년 겨울,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의 망명은 전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신문들은 그를 ‘조선판 메이지유신’을 시도하다 실패한 비운의 혁명가로 묘사했다. 이후 일본은 정치적 곤경에 빠진 조선(한국) 정객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유길준, 이준용(이하응의 손자), 박영효(갑오개혁 시 재차 망명)에게 그랬고, 광복 후에도 김종필, 김대중 등 정계의 거물들이 일본으로 피신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게 된 것만으로도 퍽 다행이다.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가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기까지 10년간 일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일본 망명중의 김옥균과 왼쪽은 한국비림박물관에 입비된 김옥균의 필적
日의 과격한 노선과 거리 두기
김옥균이 망명해 오자 흥분한 것은 일본의 재야 세력이었다. 정부의 조선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불평하던 이들은 김옥균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개혁을 시도하려 했고, 심지어는 군사행동을 구상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琴秉洞, ‘金玉均と日本’).
먼저 훗날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써서 한일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곧바로 김옥균을 만나 고베의 유명한 아리마 온천에서 교분을 나눴다.
다음으로는 아시아주의와 대륙 낭인들의 거두로 유명한 현양사(玄洋社)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다.
후일 그는 김옥균에 대해 “인격, 식견, 그 풍채와 언변 등으로 볼 때 희대의 호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중국의 손문, 황흥(黃興) 같은 사람도 걸물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각각 후계자도 있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쉽도다, 김옥균에게는 그것이 없구나!”라고 회고했다.
세 번째 그룹은 자유민권운동의 자유당 좌파세력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 반대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다 실패하자, 조선 문제를 구실로 세력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김옥균은 거리 두기를 계속했다. 이들의 과격한 노선이 도움이 될까 우려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적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에는 김옥균이 일본인들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 정부의 이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사건이 1885년 12월에 일어났다. 일명 ‘오사카 사건’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유당 좌파 그룹이 조선 침공을 실행에 옮기려다 발각된 것이다.
수모자인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는 김옥균과 접촉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하자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낭인 수십 명을 보내 조선 정부 요인을 살해하면 각지에서 독립당이 동조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황당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관공서나 부자들을 터는 강도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간신 제거하라고 고종에 직격탄
‘오사카 사건’에 조선 정부는 전율했다. 일본 정부에 김옥균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망명객에 대한 국제적 관례를 내세워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장은규에 이어 지운영을 암살범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김옥균 측근들은 지운영의 정체를 간파하고 고종의 암살지령문까지 탈취해 김옥균에게 건네줬다. 한때나마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옥균은 격노해 상소문을 올렸고, 이는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김옥균의 배신감과 함께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니,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한국학문헌연구소 편 ‘김옥균전집’).
김옥균은 먼저 지운영이 갖고 있던 암살지령문이 정말 고종이 준 거냐고 따져 물으며, ‘경거(輕擧)’라고 힐난한다. 이어서 고종이 중용하는 민씨들 중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삶에 기여한 자가 과연 몇이나 있느냐며, 이런 간신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폐하는 망국의 군주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소문을 본 고종은 김옥균을 죽일 결심을 더 단단히 했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에 맞서 거문도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의 화살은 청국으로 향한다.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이라고 하면서도
“거문도를 회복하여 조선의 강역을 보전하지 못하니 앞으로 또 외국이 다른 항구를 빼앗는 일이 생기면 폐하는 어쩔 것이며 청국은 무슨 방법으로 이를 막을 것입니까”고 묻고는,
곧바로 “원세개 같은 어린 아이가 오로지 자기의 공을 탐하여 외람되게 폐하를 속이려고 하니 폐하는 부디 그 술책에 넘어가지 마소서… (청국이) 원세개와 같이 구상유취(口尙乳臭)하여 시세를 판단하지 못하는 자를 파견한 것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원세개를 규탄했다. 그의 항청(抗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일본 역시 갑신정변 이후로 조선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돌아서 있으니 이 역시 믿을 만하지 않다고도 했다.
해외에서 묻힌 정치개혁 구상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과 비석.
김옥균은 갑신정변 발발 10년 후인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권총 3발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체는 조선으로 옮겨졌고, 한강변 양화진에 효수됐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옥균의 해답은 명확하다.
“오직 밖으로는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써 친교하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하며…상업을 일으켜 재정을 정리하고 병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영국은 거문도를 돌려줄 것이요, 다른 외국도 침략의 생각을 단념할 것”이라는 얘기다.
김옥균이 보기에 조선은 그럴 만한 잠재력이 있는 나라였다. 인구는 2000만 명을 넘고 공산품은 아직 없지만 광물 같은 것은 나라의 재원이 되기에 족하다고 봤다. 사회적으로는 양반 철폐를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중고(中古) 이전 국운이 융성할 때에는 모든 물산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섰는데 지금 모두 폐절되어 그 흔적도 없어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양반의 발호와 전횡 때문”
이라며 지금 세계가 상업을 위주로 서로 경쟁하는 때에 양반을 제거하지 않으면 국가는 폐망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모두가 장차 세계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은 식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사카 사건 등 재야 세력들이 과격해지고, 조선 자객까지 일본에 드나들게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3국으로 보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의 오지로 쫓아낼 궁리를 했다. 일본 경찰은 우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 머물던 김옥균을 미쓰이 별장에 강제 억류했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과 시민들 사이에 동정여론이 커져가자 1886년 8월 일본 경찰은 김옥균의 격렬한 저항을 억누르고 납치하다시피 선박에 그를 태웠다. 외국에서 당한 유배였다. 유배지는 도쿄에서 무려 1000km나 떨어진 태평양의 고도(孤島) 오가사와라(小笠原)섬이었다.
[출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한일 역사의 갈림길> - 10.김옥균, 고종이 보낸 암살단에 격노… 日 망명 중에 상소문 / 동아일보,2021.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