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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속 인물에 말을 걸다 Ⅲ

문수봉(李楨汕) 2018. 1. 9. 14:19

고연희의 옛 그림속 인물에 말을 걸다 Ⅲ


위기도,죽리탄금도, 백자도, 파교삼매도, 압구정도



12. 공민왕 전칭작 ‘위기도’- 그림 속 바둑의 지혜와 여유가 좋아!

바둑두기, 선비들의 手談인가 한량들의 雜技인가



▲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위기도’(비단에 채색 137.2×65.0㎝). 일본 시센시(泗川子) 소장



▲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하대국도’(비단에 수묵, 31.1×24.8㎝).고려대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의 그림이라는 거작 한 폭이 일본에 있다.낡은 비단 위 청록안료에 금가루가 가미된 화려한 고화다. 잘 지어진 건물과 높이 자란 소나무 아래 문사들이 바둑에 몰두하고 있다. 그림제목은 ‘위기도(圍碁圖·바둑 두다)’.  바둑 두는 인물은 누구이며, 옛 선비들은 이들을 보며 무엇을 감상했을까.


‘상산사호’의 시간, ‘십팔학사’의 공간

바둑은 중국의 요순시절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며,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로부터 바둑 기록이 나타난다. ‘碁(棋·기)’ 또는 ‘奕(혁)’으로 불린 바둑놀이는 장구한 역사 속에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고전적 바둑 스타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와 ‘십팔학사(十八學士)’가 대표적이다.

‘상산사호’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부름도 무시하고 세속을 떠나 상산에 은거한 백발의 현인 네 사람이다. 그러나 유방이 척부인 아들로 황제계승자를 바꾸려 하자, 상산사호는 원래의 태자인 여후의 아들을 찾아간다. 유방이 놀라고 두려워 황제계승자를 바꾸지 않았다.

팔순 넘은 노인이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나 황실의 질서를 세운 위엄과 덕망은 높이 기릴 만하다. 그들은 상산에 다시 들어 영지버섯으로 요기하고 바둑으로 소요했다. 상산사호의 바둑 두기는 은자의 시간이며 세속을 잊는 시간이었다. 옛 그림의 바둑주제로 가장 흔한 것이 상산사호의 바둑 두기, 곧 ‘사호위기(四皓圍碁)’다.  

‘십팔학사’는 당나라 현종이 선발한 우수학자 열여덟 명이다. 이들은 황실의 연회에 초청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문고를 뜯고 바둑을 두고 시를 짓고 그림 그리기를 보란 듯이 즐겼다. ‘금(琴), 기(棋), 서(書), 화(畵)’의 예능활동이다.

이들의 ‘금기서화’는 그림으로 그려졌고 당나라 귀족의 필수덕목으로 간주됐다. 송나라의 이공린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 문인화가들이 금기서화 네 장면을 세트로 그릴 정도로 유행했다. ‘십팔학사도’란 그림에도 대개 금기서화의 멋이 그려졌고 이가 고려로 전달됐다. 목은선생 이색은 금기서화를 ‘사예(四藝)’라 칭하며 좋아했다. 조선전반까지 그 인기가 대단했다. 

영지를 먹으며 상산에서 누린 초탈의 바둑은 불노불사 신선의 시간을 연상하게 했다면, 십팔학사의 바둑은 황실 파티에 초청된 엘리트가 누린 아취(雅趣)와 화려한 공간의 이미지였다.

‘위기도’ 인물의 정체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의 문헌을 살피면 ‘상산사호도’와 ‘금기서화도’가 모두 그려졌다. 두 장면 모두 너덧 명의 문사가 바둑판에 둘러앉은 이미지이다. 그러면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위기도’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나의 판단으로 말하자면, 이 그림은 십팔학사의 공간과 상산사호의 시간이 오묘하게 조합된 이미지다. 

화려한 건축물에 수려한 소나무, 매미날개 깃이 늘어진 관을 쓴 학사의 모습은 십팔학사 금기서화의 화면을 흡사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나 청록 짙은 산이 바로 뒤에 높이 솟고 흰 구름이 건물의 지붕까지 휘감았다. 계단 앞엔 동자마저 하염없이 쭈그렸으니, 한가로운 산중의 고요한 시간이 화면에 흐른다.

‘위기도’를 그린 이는 조선초기의 화원화가가 분명하다. 자를 대어 그린 건물의 선과 정교한 채색법이 전문가의 손길이다. 고려에서 감상되던 십팔학사의 화려한 이미지가, 조선왕실에서 조선시대에 더욱 애호된 상산사호도의 주제에 적용된 것이다.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국내에도 여러 점 있을 만큼 그림솜씨가 인정됐고, 그의 왕비는 그림수장으로 유명한 노국공주였으니 공민왕의 화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이 바둑을 좋아해 그의 조정에서 신료들이 바둑을 즐겼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토록 정교한 대작이 공민왕의 필적이겠는가. 이러한 사연이 얽혀 훗날에 공민왕의 그림으로 포장됐으리라. 

‘위기도’의 붉은 돌과 검은 돌 

이 그림 속 바둑알은 그 색이 검은색(黑色)과 붉은색(朱色)이다. 바둑알의 색이라면 검은색과 흰색이 기본이라, 바둑을 ‘흑백(黑白)’이라 혹은 ‘오로(烏鷺·까마귀와 백로)’라 별칭하고, 바둑 두기를 ‘오로삼매’라 했다. 

붉고 검은 바둑알은 당나라 유종원의 ‘서기(序碁)’에 나온다. 내용이 이러하다. 유종원의 동생들이 학문에 집착하자 방직온이란 이가 바둑판돌을 만들어 휴식을 제공했다. 그의 룰에 따르면, 검은 돌은 천하고 붉은 돌은 귀하다. 이를 보고 유종원이 탄식한다. 돌에 색이 칠해져서 귀천이 나뉘었으니, 방직온의 뜻이 아니요 돌의 본질도 아니다.

사람도 귀천이 나뉘면 공경과 천시가 나뉜다. 귀한 자의 뜻은 광대해지고 천한 자의 마음은 비루해진다. 그렇다면, 공경과 경시의 차이와 광대하고 비루한 마음의 차이란 무엇인가. 유종원은 스스로를 검은 돌과 닮았다 했다. 이 세상 누군들 검은 돌이 존재하는 모순과 시름을 모르겠는가. 

이 그림 속 바둑의 색은 학문하다 쉬어가는 시간으로 바둑놀이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리라.

바둑의 현실적 문제, 잡기(雜技)!  

그런데 그림처럼 하염없이 바둑판에 앉은 것은 현실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옛 선비들이 바둑그림을 보며 정작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해하려면 바둑의 현실적 문제를 짚고 가야 할 것이다. 바둑이란 승부를 가르고자 장시간이 소요되는 게임이다. 치세와 학문에 성실한 이라면 이 시간을 허락하기 어렵다. 현실에서 어느 누가 상산사호이며 십팔학사겠는가.  

공자의 말씀이다. “하루 종일 잘 먹고도 마음 쓰는 곳이 없다면 곤란하다. 장기나 바둑이라도 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장기와 바둑은 무위도식보다 조금 나은 것이다. 맹자 또한 바둑이나 장기를 일삼느라 부모공양을 안하는 경우를 몹시 걱정했다.

고려의 김경직이 대궐에 들어 관료들이 장기와 바둑을 즐기는 것을 보고 ‘이 국가가 장차 망하리라’ 탄식했다. 조선전기 정극인은 ‘외우지 못하면 60대, 바둑 장기 잡기를 하면 70대, 여색을 탐하면 100대’를 회초리로 치라 했다. 갈암선생 이현일은 한 인물의 생애를 기리며 그는 ‘천박하고 허풍스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의 잡기를 손에 대지 않았다’고 칭송했다.

다산선생 정약용은 관료의 덕목으로 ‘임(任)’을 내세워 정의했다. “너에게 벗이 있고 이웃이 있으니, 벗으로서 덕을 돕고 이웃으로 도우라.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지 말고, 질병이 있을 때 보살피라. 참소하여 얽어 넣지 말고, 재물을 얻고자 이간질하지 말고, 그들을 속이거나 배반하지 말라.”

장기와 바둑을 콕 집어 거론한 우려는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는 편지에도 여실하다. “눕기 좋아하기, 농담 좋아하기, 성 내기, 장기와 바둑 두기, 남 속이기 등은 버리기 힘든 나쁜 습관이니 절대 물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점잖은 학자 이덕무도 살려라 죽여라 훈수로 시끄러운 바둑놀이의 경박함이 질색이었다. 자식에게 장기와 바둑을 가르치는 놈은 때려서라도 쫓겠노라 했다.  

바둑의 환상적 미덕, 아(雅)와 피세(避世) 

그럼에도 바둑에 멋이 있다면, 당나라 십팔학사들이 파티에서 바둑을 즐기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다. 갖춘 자의 아취이다. 고려시대 왕과 승려와 문사들은 이 아취를 즐기고자 ‘밤새워’ 바둑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꽤나 멋으로 여겼다. 그러느라 아내로 내기를 걸어 빼앗겼다 찾아오고, 골동품과 거문고로 내기를 걸어 몽땅 잃었다가 찾아온 이야기가 ‘고려사’에 실렸다.

대개 바둑을 잘 두는 이들이 교활한 내기를 요구하고, 바둑에 진 자들은 도덕심과 기지로 빼앗긴 것을 찾아온다. 바둑의 승자가 가진 불편한 진실일까. 성리학이 우세한 조선에서 바둑을 경계하는 이론이 득세했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취미생활이 추구되면서 바둑의 멋이 다시 인정받는다. 그러나 고려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혹은 바둑놀이에 세속을 벗어나는 피세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봤다.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명상과 성찰이다. 그러나 옛 시문과 그림 속에서는 극단적 도피행위로 술에 취하거나 잠에 들거나 바둑에 빠지는 시간이 미화된다.

상산사호의 바둑도 엄밀하게 따지면 그러하다. 도피의 시간은 신선계의 시간으로 확장된다. 신선의 바둑이야기가 무수하다. 왕질은 산속에서 바둑을 구경하다 백 년이 흘렀다고 하고, 동그란 굴 속에서 바둑을 둔 신선이 살았다고 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속세에서 벗어나고픈 자유로의 환상이다. 

바둑의 현실적 미덕, 수담(手談)과 측인(測人) 

마음을 한가롭게 해주는 대화를 ‘한담’이라 하고, 명리에 얽히지 않으면 ‘청담’ 혹은 ‘고담’이라 한다. 말이 다른 선비들이 나눈 ‘필담(筆談)’은, 글로 나눈 대화다. 나는 예전에 조선선비들이 북경에서 중국인과 필담을 나눈 기록을 보며 답답할 것이라고 공연한 염려를 했다. 오늘날 카카오톡을 해보니 필담에서 누린 지적 재치의 묘미가 괜찮았으리라 깨닫게 된다.  

바둑은 ‘세설신어’에서 ‘수담(手談)’이라 했다. 손으로 바둑알을 나누면서 상대의 감정과 인격을 만나는 대화이다. 벗을 애도하는 글 중에 바둑의 시간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시절 바둑 둔 추억은 참으로 애절하다. 수담의 사귐과 묘미가 각별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초연한 의지를 보여준 일화도 있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완적은 모친의 서거 소식을 듣고 바둑을 그대로 두었다. 동진의 사안은 전쟁의 계략을 세워 놓고 바둑을 두기 시작해 승전보를 듣고도 바둑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바둑으로 지켜낸 놀라운 의지이며 홀로 나눈 수담이다.

배움을 즐기는 사람들은 바둑으로 세상을 배우려 했다. 최한기는 ‘추기측인(推己測人)’이라 하여,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을 헤아림을 바둑에서 취했다. 상대 바둑알의 행보를 미리 예측하는데 그 예측이 모두 틀리면 다시 한다.

세상살이에서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일의 기미를 파악하는 것이 그러하고, 계획과 달라진 변화에 대응하는 법이 그러하다. 한 수를 잘못 두면 온 판이 망가지고, 포국을 좁게 하면 큰 판을 못 짠다는 식의 비유가 허다하다. 기실 모든 비유가 그러하듯, 이현령비현령이다. 바둑판과 성리학의 태극이 비유되는가 하면, 흔적 없이 뒤집어질 바둑판의 덧없음이 다양한 현실상황에 비유됐다.

그림으로 바둑을 보는 뜻  

어떠한 바둑이야기가 바둑그림만 하겠는가. 바둑그림은 다양하게 그려졌다. 상산사호와 십팔학사의 이미지가 조합된 그림, 신선같이 앉아 대국하는 모습, 조선후기 풍속화 속에 갓을 쓰고 앉아 바둑을 즐기는 모습 등. 특히 산속의 영지 곁에 바둑을 즐기는 상산사호의 화면은 무수하게 많다.

조선중기 이경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하는 ‘송하대기도(松下對碁圖·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다)’에는 두 인물이 신선처럼 앉아 대국 중이다. 현실에서 누리기 힘든 그림 속 바둑. 두 인물에게도 지혜로운 시간과 아취의 공간이 가득하다. 유몽인(1559∼1623)이 그림첩에 쓴 제발이 마침 이러한 그림을 감상한 시이다.  

소나무 아래 노인들 주인도 없고 객도 없이 바둑 한판에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네.
내가 본 것은 두 사람이니, 두 사람은 영지버섯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을 줄 어찌 알까.
구름 속 산수 속에 잔잔히 물 흐르는 소리.  
-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데 나무는 있고 산은 없다.

(松下丈人, 非主非賓, 一局棋幾千春 송하장인 비주비빈 이국기기천춘
吾所見者兩人, 安知不復有兩人採芝猶未還 오소견자양인 안지불부유양인채지유미환
雲藏山水潺潺 - 右松下二人對棋, 有木無山 운장산수잔잔 - 우송하이인대기 유목무산)
- 유몽인,「화첩」 6수 중 제 4수  

그림 속 바둑의 시공간은 그림 너머 상상으로 펼쳐진다. 그림도 못 보고 바둑도 못 두는 소경 심봉사가 소경잔치로 끌려가며 흥얼거린다. “상산사호 몇 명인가, 날 더하면 다섯이지!”

[출처] : 고연희 미술사학가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 문화일보​
    



13. 김홍도 ‘죽리탄금도’… 금(琴), 성현과 군자의 멜로디

그윽한 대숲서 홀로 琴을 타니 달빛만이 知音일세



▲  김홍도, ‘죽리탄금도’, 종이에 수묵. 고려대박물관 소장


▲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탄금도’. 고려대박물관 소장



▲  작자미상 ‘구운몽도’ 8폭 병풍의 제5폭 정경패 장면의 부분. 경기대박물관 소장



그림을 보니, 대숲에 홀로 앉아 금(琴)을 연주한다. 혹은 줄도 없는 금을 안고 앉았다. 제왕과 성현도 즐겨 연주한 금. 옛 그림들 속에서 금을 연주한 인물들은 누구이며, 옛 그림 속 연주에는 어떤 선율이 울렸을까. 그 선율의 테마는 무엇이었을까.



‘금(琴)’이라는 현악기

옛 시문 속 금이라는 악기가 오늘날 ‘거문고’로 일괄 국역되는 데 대해 국악전공자들은 난색을 표한다. ‘학(鶴)’이 모두 ‘두루미’로, ‘규(葵)’가 ‘해바라기’로 번역된다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오역의 문제라기보다는 만물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강박의 문제이며, 이 글에서 ‘금’을 ‘금’이라 부르는 이유다. 금의 연주는 ‘탄금(彈琴)’이라 한다. 줄을 뜯어 튕김을 뜻한다. 

‘금’은 몇 줄로 된 악기인가. 요순시절 순(舜)임금이 ‘오현금’을 만든 데서 유래한다. 순임금은 탄금으로 ‘남풍가(南風歌)’를 불렀다.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근심을 풀어줄 수 있기를. 남풍이 제때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주기를!’ 따뜻한 바람을 기다리며 백성을 축복하는 성군의 탄금은 역사 속 영원한 그리움이 됐다.

순임금은 효자로도 유명하다. 훗날 문자도의 ‘효(孝)’ 글자에 금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이는 순임금의 상징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금은 두 줄을 더한 ‘칠현금’이었다고 한다. 고구려로 칠현금이 들어왔는데 왕산악(王山岳·6세기)이 ‘육현금’으로 개조해 연주했다. 고구려의 금을 일러 ‘거문고’라 부르게 됐고, 조선시대에도 육현금이 널리 운용됐다. 

‘금’의 짝꿍은 ‘슬(瑟)’이다. 슬은 25줄이며 금보다 제법 크다. 12세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사용됐는데 오래 애용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과 슬의 소리조합이 오묘하여 ‘금슬’은 남녀의 화합을 상징한다. ‘시경’에 ‘처자와의 좋은 화합은 금과 슬을 연주하는 듯하다’고 한 데서 유래하는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군신의 화합과 백성의 교화로 금슬의 뜻을 확대해석했다. 

‘금’은 고상한 악기로 통했다. 성현 공자(孔子)도 탄금을 즐겼다. 7일 동안 곡기가 끊어진 상황에서 공자가 금으로 마음을 다스린 일이 ‘공자가어’에 전한다. 제자 안회가 오현금을 연주하거나 제자 증점의 금 연주에 자연 속 즐거움을 말한 ‘논어’의 일화들이 모두 옛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제갈공명의 탄금,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의 금 연주실력 등 금을 사랑한 현자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치세의 예악과 군자의 수양 및 유예(遊藝)의 측면에서 금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옛 선비들이 여가에 즐긴 일 가운데 주색잡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 그리고 시 짓는 일까지 몰두해 빠지는 것이 염려되곤 했는데, 나의 과문 탓인지 모르되, 금의 단련과 연주를 경계한 옛 글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소리의 감화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功)이 널리 인정된 터였고, 그 가운데 금은 고상한 감화를 보장하는 으뜸악기였기 때문이다.

죽리탄금, 자오(自娛)의 기운 

김홍도의 부채그림 ‘죽리탄금(竹裏彈琴·대숲 속에서 금을 뜯다)’에 홀로 금을 연주하는 선비가 앉아 있다.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王維·699∼761)가 펼쳤던 대숲 속 탄금 독주 퍼포먼스의 재현이다. 선비는 홀로 앉히고 그 뒤에 차 끓이는 동자와 그 앞에 커다란 바위를 포치해 대숲이란 연주무대를 입체적으로 안배했다.

작은 부채 속 깊숙한 공간설정이며 댓잎의 농담 및 시원스러운 여백 처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구성력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화면 위 빈 곳 흘려 쓴 글씨는, 김홍도가 왕유의 시 ‘죽리관(竹裏館)’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윽한 대숲에 나 홀로 앉아, 
거문고 타다가 휘파람 길게 불어본다. 
숲이 깊으니 사람들이 모르지만 
밝은 달이 비추어 주네.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 왕유, ‘죽리관’ 

달 아래 대나무 숲에서 홀로 금을 연주하다 소리 높여 노래한다는 내용에는 다분히 당나라 시 특유의 주정적 낭만이 드러난다. 이러한 탄금의 연주를 따라해 본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옛 그림과 옛 시에서 수없이 재현되고 정착된 이미지다. 

왕유는 40세에 벼슬을 접고 홀로 장안 근처에 별장을 짓고 이사해 늘그막을 지냈다. 그는 30세에 아내와 사별했으나 불심을 지녔기에 홀로 지냈다고 한다. 그의 별장은 사실상 여러 채 건물이 화려하고 번듯한 호화별장이었는데, 왕유는 소박하게 지냈노라 생각했고 후대인들도 그것을 인정했다.

별장 이름이 ‘망천장’이다. 망천의 명소를 읊은‘망천별업’ 20수가 유명한데, 그 가운데 ‘죽리관’이 널리 인용됐다. 중국 원나라의 ‘망천도’를 보면 죽리관은 천여 그루 대나무 속 우람한 건물인데, 명나라로 들면서 사람들은 죽리관의 풍경을 소박하게 그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운치를 소박한 양 표현했다.

특별히 애호된 죽리관의 주제는 무엇일까. 홀로 연주하다 신이 나서 노래하며 달빛에 만족한다니, 건강한 자족이며 자오(自娛)이다. 달과 대숲의 무대에 단정하게 앉은 그림 속 연주자는 실로 의연하다. 남명선생 조식이 병석에 누웠을 때 한강선생 정구가 문병을 했다.

조식이 말했다. “고질을 앓다가 그대를 대하니 마치 왕유의 망천도를 감상하듯 황홀하구료.” 김홍도의 ‘죽리탄금도’를 보며 우리도 황홀한 기운을 느껴보면 어떠할까. 사실 조식은 그림은 보지 않은 채, 정구의 방문으로 연상된 기억 속 그림의 이미지로 큰 힘을 얻고 있다. 

백아탄금, 지음(知音)의 우정 

‘수용미학’은 문학이든 예술이든 창작자 못지않게 향유하고 수용하는 역할에 의미를 둔다. 책은 저자가 반을 쓰고 독서가 나머지 반을 완성한다는 프랑스 사르트르의 문학론도 비슷한 생각이다. 왕유의 탄금 독주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면 어떠한가. 탄금이란 ‘청금’(聽琴·금 연주를 들음)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라, 달빛과 나누고 후대에 전한 것이리라. ‘청금’을 주제로 한 옛 그림도 탄금의 주제 못지않게 그려졌다. 

‘청금’으로 유명한 이는 종자기(鍾子期)였다. 춘추시대 백아(伯牙)가 금을 연주할 줄 알았고, 그의 벗 종자기는 그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백아가 연주하면 종자기는 “좋구나, 아아(峨峨·높고 높음)하여 태산 같구나” 혹은 “좋구나, 양양(洋洋·넘치고 넘침)하여 강물 같구나”라며, 백아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러다 종자기가 죽었고, 백아는 금줄을 끊었다.

마음과 능력을 알아주는 벗을 일러 ‘지음’(知音·음을 알다)이라 하니, 종자기의 청금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의 우정을 일러 ‘지기지우’(知己之友·자신을 알아주는 벗)라 한다.

백아와 종자기에 비견되는 우정의 주인공이 관중과 포숙아다. 관중은 불우했고 포숙아는 성공했다. 관중은 포숙아를 속여도, 포숙아는 관중의 심중을 헤아려 항상 도왔다. 관중은 포숙아를 일러 ‘지아자’(知我者·나를 아는 사람)라 불렀다. 그들이 추구한 우정의 수준이 이러했다.

그러나 누가 누군가에게 종자기나 관중이 돼주기 어렵고, 그런 벗을 얻기란 더욱 어렵다. 조선의 선비들도 탄금도를 보거나 금을 어루만지며 탄식을 토했다.


“사람들은 모두 귀가 있지만, 종자기만 홀로 들을 수 있었지” (김맹성)

“그대에겐 백아의 손이 없고, 나에겐 종자기의 귀가 없어요.” (장유).

혹은 “이 세상에 지음이 적다고 하지 말게. 청풍과 명월이 종자기라네” (신흠)

라며 자오의 단계로 넘어서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그림기록을 살피면, 가장 많이 그려진 탄금도가 ‘백아탄금’이다. 서거정, 이승소, 김맹성 등이 백아탄금도를 감상한 기록을 남겼다.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첩 속에 ‘탄금도’가 있다. 달빛 아래 홀로 앉은 탄금. 그 시절의 ‘산수탄금도’를 보고 감상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의 시로 미뤄보면, 이 그림이야말로 백아의 탄금을 그린 듯하다. 

고요하던 깊은 못 여울 일러 우는데, 
금을 안은 사람이 이 가운데 앉았구나. 
소리 없음의 오묘함을 이미 터득하였으니 
아양 곡조의 탄금을 연주하지 말라. 

靜作深潭鳴作湍(정작심담명작단), 
抱琴人坐此中間(포금인좌차중간). 
已將心會無聲妙(기장심회무성묘), 
莫把峨洋絃上彈(막파아양현상탄). - 정문부, ‘산수탄금도’ 

물 흐르는 언덕 위에 금을 안고 앉은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연주자가 ‘아아’ 혹은 ‘양양’하게 금을 뜯어도 알아들을 종자기가 없고, ‘소리 없음’(無聲)의 묘함이 그 차원을 넘어선다. 이경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그림의 금에는 줄이 그려져 있지 않다. 지음(知音)이 없으니 지극한 고요의 묘를 즐기는 탄금과 청금. 귀의 감각을 넘어선 마음의 만남이다. 

봉구황(鳳求凰)의 탄금, 구애의 세레나데 

우정뿐이겠는가. 남녀 간의 사랑에도 탄금은 군자의 고상한 수단이었다. 한나라의 대문장가 사마상여가 금을 연주하며 ‘봉황가’를 불러 미인 과부 탁문군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이야기가 중국 남송대에 편찬된 ‘옥대신영’에 전한다.

봉황이란 태평한 세월로 날아드는 상상의 새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봉황가’의 가사가 노골적이다. ‘봉이여 봉이여 고향으로 돌아오네. 사방을 헤매다 그의 암컷 황을 찾아서∼’라며, 멋진 남성이 제 짝을 찾고 있다는 곡조를 부르자, 탁문군은 그날 밤으로 도망쳐서 사마상여의 품에 들었다. 훗날 두보가 ‘돌아온 봉새가 황새를 구하는 뜻’이라 사마상여의 기상을 기린 뒤로, 이 노래는 ‘봉구황’이라 불린다. 

금이 동양의 남성적 현악기라면 서양의 남성적 현악기로 대표악기는 피아노다. 미국영화 ‘프리티 우먼’이나 한류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남자 주인공의 피아노 연주가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강력하게 이끄는 설정도 유사한 예다. 

조선시대 소설 ‘구운몽(九雲夢)’에는,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인물 양소유가 여덟 선녀를 차례로 거느리기까지 여덟 가지 연애술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여인 정경패를 얻고자 양소유는 여도승으로 변장하여 정경패의 집에 들어 금을 연주한다. 정경패가 규방을 나오지 않는다기에 낸 묘책이다.

정경패가 등장하자 양소유는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뜯는다. 정경패가 황급하게 자리를 피한다. 연주자에 대한 의심도 있었지만, 홀연한 사랑의 감지로 그녀의 마음이 벌써 요동쳤기 때문이다. 구운몽 그림 중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한 여성이 금을 연주하는 장면이 곧 이것이다. 구운몽은 17세기 소설이며, ‘구운몽도’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화려한 채색민화 스타일로 널리 제작됐다.

‘탄금도’에 담긴 바람 

탄금이란 군자의 교양이요, 성현이 즐긴 고품격 선율이었다. 그러나 잘 자란 오동나무로 제작된 금을 소유하고 훌륭한 연주력까지 갖추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멋진 금을 훌륭하게 연주하고픈 선비들의 바람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탄금주제의 옛 그림에는 최고연주자의 현이 울린다. 현의 울림 속에는 성현군자의 여유, 충만한 시인의 내면, 지상최고의 우정, 그리고 연애의 황홀함 등의 테마가 연주되고 있었다.
 
 [출처] : 고연희 미술사학가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 문화일보​
     



14. 백자도… 아이들이 가득한 집 -복스럽고 천진한 모습에 세상 근심마저 사라지네

▲  ‘백자도’ 10폭병풍 중 제 10폭 매화따기장면, 비단에 채색, 88.8 x 39㎝.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  ‘백자도’ 10폭병풍 중 제 2폭 닭싸움장면, 비단에 채색, 88.8 x 39㎝.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열폭 병풍 화폭마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동물놀이, 장군놀이, 꽃놀이, 물놀이 등 여러 가지 게임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칠 새가 없다. 우리 집에 아이들이 한 백 명쯤 태어나서 모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길, 나의 자손들이 무궁하게 번창하길 꿈꾸는 그림이다.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산신령께 빌고 사찰에 시주하는 시절, 아이를 가지려고 남몰래 씨내리 남성이며 씨받이 여성을 고용하던 시절, 양자를 들리는 건 사회의 통례였다. 혼인 후 아이가 없으면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의 애절한 기도가 조선시대 설화집에 실려 있다. “신령님, 저희에게 아이 하나 주세요. 아들이 없으면 딸이라도 주시고, 건강한 아이가 없으면 아픈 아이라도 주세요.” 산신령이 거절한다. “너희들은 만복을 가졌으되 자식복은 없으니 물러가거라.” 그래도 부부가 간청하자 산신령이 할 수 없이 아이를 약속하는데, 어려서 죽을 아이란다. 부부는 감사의 절을 올리고 돌아온다.

자손이 번창하는 福!

“복을 구하여 모든 복을 얻었으니,
자식과 손자가 천억이로다.” -『시경』·「대아」편
(干祿百福 子孫千億 간록백복 자손천억)

중국 고대의 노래집 『시경』의 한 구절이다. 아들손자 천억이면 자손만대가 보장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묘지명에 평생의 덕(德)으로 복을 받아 ‘자손천억’이라는 축복이 종종 사용되었고, 비유의 표현에는 베짱이가 자주 거론됐다. “수많은 베짱이들 옹기종기 화목하듯, 그대의 자손들이 번성하기를”이란 노랫말이 『시경』의 「주남」편에 있기 때문이다. 베짱이는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서경』의 오복에는 자손의 종목이 없다고들 말한다. 오래 사는 수(壽), 풍요로운 부(富), 건강하고 편안한 강녕(康寧), 덕을 베푸는 유호덕(攸好德), 탈 없이 천명을 누리는 고종명(考終命)이다. 한(漢)나라의 환담(桓譚)이 다시 쓴 신론(新論)에도 오복은 장수(長壽), 부(富), 무병(無病), 식재(息災), 도덕(道德)이라, 표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서경의 오복이란 사회복지의 차원이다.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건강하고 부유하면 인구증가는 당연지사다.  

가문 중시의 사회제도가 발달하면서 개인적 구복 차원에서 오복이 새로 생겼다. 청나라 적현(翟顯)이 지은 함해(函海)의 통속편의 축송구절이 그 증거다. 축송된 오복이란 수, 부, 귀(貴), 강녕, 그리고 자손중다(子孫衆多)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자손종목이 사람들 사이에 오복의 하나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대정치서의 오복과 통속편의 오복에서 다른 점은 딱 한 가지. 덕을 베푸는 유호덕의 도덕 대신 자손중다가 삽입된 것이다. 조선후기 학자들도 새로운 통속적 오복의 내용을 거듭 인용하며 다자다손(多子多孫)을 기원했다.  

호사자들은 역사를 거슬러 자식 많은 사람을 물색했다. 동양의 기네스북이라 부를 만한 명대의 『용당소품』과 청대의 『견호비집』 등을 참고하면, 중국 역사상 아들이 100명 이상이었던 사람이 한나라의 이름난 회계사 장충, 명나라 주원장의 손자 경성왕을 비롯하여 총 7명이 집계된다.  

조선후기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다자(多子)에 대하여 논설한 <다자변증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아들이 4∼5명만 되어도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고, 7∼8명이면 기이하다 하고, 10명 이상이면 드문 일이라 홍복(弘福)을 일컫는다”고 했다.

효(孝)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시절, 『맹자』에서 지목한 가장 심한 불효는 ‘무후(無後)’였다. 후손이 없다는 말이다. 자식을 두지 못하는 죄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초래할 불효막심이었다.

다자자손의 바람 ‘백자도’

자손번창의 축복을 담은 그림이 ‘백자도’(百子圖·백 명의 아들)다. 조선왕실의 기록에는 ‘백자동도’(百子童圖)라 불렸다. 현전하는 그림들은 대개 6∼10폭의 민화류 병풍이며, 8폭이 가장 많다. ‘백’(百)이라지만 100명을 헤아려 그릴 필요는 없었다. 옛 그림에서 백화도란 꽃이 많이 그려진 그림이요, 백안도는 기러기, 백록도는 사슴, 백마도는 말, 백학도는 학이 화면에 가득한 그림이다.

 ‘백’이란 풍성함이다. 소개하는 《백자도》는 드물게 전하는 ‘10폭’ 병풍으로, 각 폭마다 10명 남짓 아이들이 장군놀이, 닭싸움, 잠자리잡기, 파초 아래 잠자기와 새놀이, 연못 속 물놀이, 행차놀이, 사슴놀이, 학놀이, 원숭이놀이, 매화따기 등을 즐긴다.

 병풍 속 아이들을 모두 합하면 100명이 넘는다. 백자도에서 모델로 삼은 자식복의 주인공은 누구나 존경하는 주나라 문왕이라지만, 성덕군자에게 마땅한 자식복의 풍요와 복됨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주제였다.  

여기서는 지금의 때에 가까운 매화따기 장면과 닭싸움 장면을 보겠다. 매화 핀 화면을 보면, 정원의 괴석이 눈에 띈다. 중국 강남산 태호석(太湖石)으로 값비싼 괴석이라 부의 상징이다. 기와에 금빛 장식도 그러하다. 정원에는 매화와 동백이 활짝 피었다.  

소한이 지나는 추위 속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매화와 동백은 옛 그림에서 겨울정원을 대표하여 쌍으로 어울린다. 계절따라 꽃이 피는 정원도 선비들의 바람이었다. 복두를 쓴 아이들이 매화나무에 올라 꽃가지를 꺾는다. 화병에 꽂아 봄소식을 전할 참이다. 다른 두 아이는 커다란 꽃가지를 들고 급히 집으로 간다. 활기찬 아이들은 봄맞이의 즐거움에 추위를 잊었다. 

닭싸움은 봄이 지날 무렵에 벌어진다. 단오의 풍속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닭은 농가의 귀한 가축이라 닭싸움으로 죽일 일은 아니다. 닭은 싸움에 임하면 죽기 전에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서구선진국에서 법으로 금지된 놀이다. 이미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그 잔인함과 우매함을 우려하여 거듭 만류했다.  

이 그림 속 아이들은 가정의 부유함과 남자다운 기상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그림에는 목털을 치켜세운 두 마리 닭이 싸움을 벌이려고 대결하는 순간이다. 머리에 붉은 볏이 곤두섰고 꼬리는 둥글게 뻗쳐 내려온다. 수탉들의 긴장 포즈에 숨을 멈춘 아이들이 퍽 귀엽다. 싸움 후의 난장판은 상상할 때가 아니다.

이 그림들은 비단바탕에 채색이 화려하다. 하늘에는 오색구름, 아이들은 색 고운 비단옷, 다채로운 보석바위에 구슬처럼 영롱한 이끼, 이 세상이라기보다는 신선세상 풍광처럼 환상적이다.

조선후기 백자도의 수요와 유행 속에서 베껴 그린 그림의 한 경우다. 화가의 창의적 표현보다는 장식그림 고급품의 제작상을 반영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백자도 병풍의 유행 

아이들의 여러 가지 놀이장면을 세트로 구성하여 병풍으로 그렸던 방식은 중국 원나라의 기록에 보이고 조선전기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백자도는 새해정초에 복스러운 이미지로 사용되었고, 혼인과 잔치에 펼쳐졌다. 특기할 것은 백자도 ‘병풍’의 유행이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궁정의 혼인을 기록한 가례도감, 잔치를 기록한 진연도감의 의궤에 백자동도 병풍이 사용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러한 왕실문화가 사대부에게 전파되어 그들의 혼례에 사용되면서, 거리에서 일반에 판매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팔폭병풍의 유난스러운 성행 속에서 백자도는 걸맞은 주제였다.

백자도 속 모든 아이들 머리가 두 갈래 상투의 쌍계이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동자들의 헤어스타일도 두 갈래 상투였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선녀의 머리도 그러하다. 쌍계는 고전적 이미지이고 천상세계 신선다운 고귀한 이미지다.  

아이가 많으면 발생하는 문제 

그런데 아이가 정말로 수십 명 혹은 일백 명이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규경의 <다자변증설>은 다자(多子)의 실상에 대한 씁쓸한 현실을 늘어놓는다. 못난 자식이 많이 나오면 제일문제다. “제 부모만 못하여 조상을 욕되게 할 것이다.” 그뿐인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열댓이 넘어간다면 예상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가 누군지, 누가 형인지 아우인지 어떻게 구분하나? 교육은 어찌 시키나? 때맞추어 혼인시키는 건 어쩌나? 재산분배는 어떻게 균등하게 하나? 먹일 때는 행인들이 역에서 급히 먹듯 법석일 것이요, 질병은 갈마들 듯 끊이지 않겠지.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구나. 아이 많은 것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이규경의 현실적 걱정은 무자식상팔자의 결론에 도달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곧장 소망으로 글내용을 옮기면서 자식복의 변증을 마무리한다. 만약 그들 “하나하나 문(文)을 잘하고 무(武)에 능해 호랑이 같고 용 같이 자라 집안에서 경영을 잘하고 벼슬에 나가 쓰임이 있다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근심도 없고 수고도 없겠지.” 글의 마무리가 다소 급하지만,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이 바로 이것이었다. 바람대로 된다면 문제가 있을 리 없다.  

그림의 환상, 아이를 소망한 그들 

백자도 속 아이들은 세상 부모들의 바람대로 건강하여 용처럼 범처럼 씩씩한 모습이다. 아이들은 이마가 넓고 볼이 토실토실하다. 아이들의 복스럽고 천진한 모습에 보노라면 세상의 근심마저 사라진다. 그림 속 환상이다.  


한 이십 년 전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열상 이가원 선생님 댁으로 나는 초서강을 들으러 다녔다. 하루는 좀 일찍 갔더니 벌써 오신 분들이 사사로운 시사토론을 벌이면서 누구누구 잘잘못을 논하느라 떠들썩하였다. 이가원 선생님이 방으로 들자 모두들 일어났다 앉느라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생님께 그들의 잘잘못에 대하여 의견을 여쭈었다. 선생님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보래. 내 자식이 여럿이래. 이놈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몰라. 자식이 많으면 남의 집 자식들의 잘잘못을 왈가왈부할 수 없지.” 

자식이 많아 봐야 이 자식 저 자식의 어리석음과 아픔을 보면서 세상의 고충을 이해하고 겸손함의 기회도 얻게 된다. 요순시절 요임금의 말이다. “자식이 많으면 근심도 많다.” 논어 속 공자의 말이다. “부모는 자식의 아픔을 걱정한다.” 그러니 자식이 많으면 그들 심신의 상처를 보느라 부모의 걱정은 그칠 틈이 없다.

세상의 어려움을 견뎌내기 두렵고 못난 내면을 드러내기 싫어서, 자식 낳기를 겁내는 현실이다. 예전에는 생활고가 지금보다 심하였고, 아이를 낳다가 몸을 버리기도 일쑤였다. 그래도 그들은 그림 속 아이들의 환상을 바라보며 자식을 넉넉히 두고자 소망하였다.

유교적 사고의 이유도 적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삶과 출산과 육아에 임했던 옛 분들의 용기는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사뭇 달랐던 것 같다. 백 명쯤 아이들이 뜰 가득 집안 가득 뛰어노는 그림이 그 시절에 널리 그려졌던 이유이다.

[출처] : 고연희 미술사학가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 문화일보​
    




15. 파교심매도…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 이유

매화 찾아나선 곤궁한 詩人… 얼어버린 입에선 詩가 술∼술

▲  그림1 미상, <파교심매도> 16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128.5×72.3㎝, 야마토분가칸(大和文華館)​



▲  그림2 심사정, <파교심매도> 1766년, 비단에 옅은 채색, 115×50.5㎝, 국립중앙박물관 ​

겨우내 쌓인 눈 속으로 나귀 타고 가는 시인의 이미지가 조선시대 내내 거듭 그려졌다. 추위 속에 홀로 가는 시인의 가련한 모습에 맨발로 주춤대는 시동의 이야기가 더해진 그림. 여름이고 겨울이고 이 그림을 펼쳐놓고, 옛 분들은 춥고 궁핍한 마음이 되고자 했다.



 # 죽은 시인의 혼령

고려시대 문학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반드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은 고려시대 이름난 문인들 정지상(?∼1135)과 김부식(1075∼1151)이고, 출전은 이규보의 ‘백운소설’이다. 내용이 이렇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멋진 시구를 탐내다가 거절당했다. 그 후 김부식은 현달하고 정지상은 죽어 혼령이 됐다.

하루는 김부식이 “버드나무 천 가지가 푸르고 복숭아꽃 만 송이가 붉도다”라 읊었더니, 정지상 혼령이 나타나 뺨을 때리며, “누가 그 수를 헤아렸냐. 버드나무 가지가지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송이 붉도다!”라 고쳐 읊었다. 김부식은 정지상의 혼령 앞에 당당하려 애썼다. 하지만 측간에서 혼령에게 음낭이 붙들린 채 ‘가죽주머니’란 놀림을 당한 뒤 숨이 끊어졌다.

정지상의 이별시 ‘송인(送人)’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시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쓴 문장가로 현실적 승리자였지만 그 내면엔 정지상의 수준으로 시를 짓지 못한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현대심리학을 빌리자면 이야기 속 혼령은 열등감으로 빚어진 환상이요, 환청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측간에서 홀로 쓰러진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그럴듯한 사연이었다. 호의호식 김부식은 명구 창작에 한계가 있고 가엾게 죽은 시인은 칼날 같은 한 글자 한 마디로 김부식의 기를 누르고 숨통마저 끊어냈다고, 옛 문사들은 명구의 위력에 환호했다. 

일상에서나 큰 행사에서 시문으로 재능을 발휘하던 시절. 좌중을 놀라게 하는 명구는 두고두고 칭송됐다. 문인이라면 그런 칭송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시인이 산 명인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감상하려는 나귀 탄 시인의 그림이 오래도록 애호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옛 시인의 명구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 옛 시인의 환영  

당나라 시인 맹호연(689∼740)의 시가 뛰어났다. 맹호연의 시는 눈바람 속 장안의 파교란 다리를 나귀 타고 지나가며 고심할 때 튀어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개인의 과거가 기억 속에 얽히듯, 역사의 과거가 해석으로 재정리된다. 맹호연의 이야기도 불완전한 기억과 해석으로 만들어졌다. 맹호연이 남겨놓은 수백 편의 시에서 그가 나귀 타고 파교를 건넜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반면 당나라의 정경(?∼899)이 “시상은 눈 나리는 파교에 나귀 타고 지날 때 나온다”고 말했다. 이는 송나라 손광헌의 ‘북몽쇄원’과 ‘전당시화’(全唐詩話)에 버젓하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맹호연의 말로 옮겨 전해졌다. 수백 년 동안 기억되는 파교 위의 나귀 탄 시인 이미지의 주인공이 맹호연이었던 이유다.

맹호연에 대한 기억을 공고하게 해준 것은, 송나라 대문인 소식(소동파)의 시구다. 

또 보지 못하였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노라 눈썹은 찌프리고 어꺠는 산처럼 솟은 것을

(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우불견 설중기려맹호연 추미음시견용산 ) 
- 소식, ‘초상화 그리는 수재 하충에게(贈寫眞何秀才)’ 

소식은 그가 보았던 맹호연 그림의 이미지가 이와 같았노라고 묘사하고 있다.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의 초상은 이 시구로 인해 고착됐다. 맹호연이 정말로 그랬던가 묻는 사실 추적은 무모한 일이 됐다. 정경보다 맹호연의 시가 좋았기에, 사람들은 맹호연의 창작 행적에 관심이 있었고, 소식이 기억해준 맹호연의 행적은 역사적 사실이 됐다. 

#‘파교심매’의 이미지 

시인 맹호연의 초상은 ‘파교심매’(橋尋梅·파교에서 매화를 찾다)라는 회화이미지로 그려졌다. 겨울 끝자락 하얀 잔설이 두툼한 산으로 나귀 타고 드는 시인. 그 시인이라면 눈 속에 피어난 첫 매화를 찾아낼 것이다. ‘파교심매’는 ‘파교음시’(파교 위에서 시를 읊다)와 ‘답설심매’(눈을 밟고가며 매화를 찾다)가 합해진 것이다.

매화는 추위 속에 피어나는 봄의 전령이다. 모습은 가냘프고 성질은 강인하다. 추위 속에 고심하는 가난한 시인의 의지에 부합한다. 항재선생 정종영(1513∼1589)이 ‘패교음설’이란 제목의 맹호연 그림을 감상하고 읊었다. “흩어져 날리는 눈 난만한 은빛 더미, 나귀 등에 시 짓는 신선은 매화처럼 야위었네.” (輕盈飛雪爛銀堆 驢背詩仙瘦若梅 경영비설란은퇴 여배시선수약매)

명시를 품고 가는 시인과 매화가 숨어 핀 설산이 조합된 그림. 이러한 그림들은 대략 ‘파교음설’(吟雪), ‘파교방매’(訪梅), ‘파교탐매’ 혹은 ‘설중기려’ ‘설중탐매’ ‘설행’ 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 수도 없이 그려졌고, 지금까지 전하는 ‘파교심매’의 대표작만도 10여 점이나 된다.

일본 나라(奈良)의 대화문화관에 소장된 커다란 화축 ‘파교심매도’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을 보관한 나무궤짝 위에는 ‘송나라 사람의 산수(宋人之山水)’라 적혀 있다. 그림을 펼치면 왼편 아래에 남송의 화원화가 마원의 인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조선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판정되고 있다. 그 외 이 그림 위 인장들은 모두 후날(뒤에 찍음)이라, 이 그림이 정작 누구의 필적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조선 중기 솜씨 좋은 화원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옛 그림의 기법이나 스타일의 변화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 그림의 산수표현이 다소 특이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첩첩의 주름으로 그려져 있는 거대한 산 덩어리는 원근의 처리가 모호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기세가 주는 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기이한 형상으로 표현된 설산의 무게와 깊이다. 이러한 표현은 중국 명나라 초반의 강남지역으로부터 한 시절 유행한 스타일이었기에, 이 그림을 16세기 정도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이밖에 비단이며 붓질의 스타일에서 중국의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호연시궁’(浩然詩窮)  

‘파교심매’라는 그림의 대주제는 ‘시궁’(詩窮·시인의 곤궁함)이다. 맹호연은 변변한 벼슬이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시절 좋은 당나라 때 빈궁하게 살았다. 조선 전기 남효온이 병풍에 그려진 맹호연의 모습을 보며 읊기를, “지위 잃은 맹호연이 시 짓느라 곤궁했지…. 긴 파교 다리 위 저녁에 눈이 개고, 남은 술기운에 스스로 몽롱하리.” 가난한 시인에게 겨울의 끝은 추위가 지겹고 배고픈 고비다. 그 와중에 절룩대는 나귀로 나선 이유가 매화도 찾고 명구도 얻기 위함이라니 궁상이 이를 데 없다.

‘시궁’이란 말은 원래 송나라 시인 구양수가 벗 매요신을 평한 시론이다. 구양수는 “예로부터 좋은 시는 곤궁한 자에게서 나온다”며 “곤궁한 사람이 된 뒤에 그 시에 멋이 든다(窮者以後工 궁자이후공)”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시궁론은 시창작론에서 중요한 개념이 됐다. 시인의 궁색함과 시의 공교함이 결합한다는 이론은 가난한 학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글 짓는 마음의 근본을 깨끗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을 제공했다. 

조선의 시인들이 ‘파교심매’를 펼치면, 혀를 차며 맹호연의 가련한 꼴을 마음껏 탄식했다. 조선 전기 서거정이 여러 차례 그림을 감상하며 “가련해라. 추위 참는 맹호연 고생스러운데, 눈 속에서 나귀 타고 어깨는 산처럼 솟아 으쓱이네.” 혹은 “얼어버린 입으로 시를 읊으니 뼛속으로 추위가 파고들겠지!” 어떤 이는 마음이 화락해야 좋은 시문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까지 풀어놓지만, 대개 시인이라면 시궁의 엄숙함에 동의했다. 맹호연의 이미지가 시인의 초상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포만감 속에서 좋은 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금의 지론이다. 예전에 드라마 대장금을 연출한 PD와 우연히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방송작가의 상황이 좋아지면 대본에 맥이 빠지고 아파트 골방에 처박혀야 기막힌 대본이 나온단다.

그의 경험담 속 후끈한 현장감은 고전시론 속 ‘시궁’의 의미를 내게 제대로 알려줬다. 맹호연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궁(窮)’의 이미지는 그가 뱉을 시구의 긴장감을 보장하는 개연성이었다. 

시궁에 대한 의논이 성해지면서 그것이 몸의 궁함이냐, 마음의 궁함이냐는 논의가 개진됐다. 항상 궁할 수 없고 그러기를 조장하고 싶지 않았기에, 풍요롭게 살더라도 마음이 가난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도 마련됐다. 시궁에 관련된 조선후기문학론은 특히 흥미롭다. 말하자면 그림 속 맹호연의 모습은 가난한 마음자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혔다. 

# 시동(侍童)의 서사  

그림의 주제는 시인의 궁색함인데, 조선 중기 ‘파교심매도’ 속에는 더욱 궁색한 인물이 등장한다. 시인을 따라오는 시동. 그의 존재는 이 그림에 잔잔하고 따뜻하게 서사의 결을 더해 준다. 시인은 뒤를 돌아보고 시동은 겨우겨우 따라온다.

그림을 들여다보라. 시인은 절룩대는 나귀에라도 올라탔고 모자에, 목도리에 가죽신을 신었다. 따라오는 시동은 홑바지저고리, 민머리에 맨발로 눈길을 걷고 있다. 시인의 표정이 안타깝고 시동의 표정이 실쭉하다. 시궁의 주제를 살짝 비껴간 시동의 이야기로 그림에는 따뜻한 심리적 교차가 발생한다. 시인과 시동 사이로 오가는 시선을 바라보며 그림 밖 감상자는 추위 속 궁색함과 다정함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또 다른 16세기 대작 ‘파교심매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도 돌아보는 시인과 쭈물대는 시동이 이 그림과 흡사하다. 서파선생 오도일(1645∼1703)은 ‘패교방매’라는 제목의 맹호연 그림을 감상하며, “겨우 한 마리 나귀에 의지해 가면서, 오히려 게으른 시동이라 재촉하여 부르는구나”라고 묘사했다. 그림 속 이러한 시동의 서사가 조선 중기 한동안 ‘파교심매’의 화면 위에 인상적으로 그려졌던 상황을 포착할 수 있다. 

# 가난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사실 이런 대작을 수장하고 감상하던 사람들이 추위에 나갈 일은 별로 없었다. 겨울이면 청동화로를 끌어안고 여름이면 비단부채를 흔들면서 그림 속 시인의 가난하고 따뜻한 마음을 상상했을 것이다. 더하여 소개하는 심사정(1707∼1769)의 ‘파교심매’는 조선 후기의 수작이다.

 이 그림 속 시동은 두건에 목도리를 두르고 거문고와 붉은 서화보따리를 짊어졌으니, 전달하는 분위기가 사뭇 낭만적이다. 사실 이후로 그려지는 민화류의 파교심매엔 매화꽃 가득 핀 봄 산으로 맹호연이 들고 있어 봄나들이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물론 심사정의 ‘파교심매’는 설산의 시객이란 고전적 이미지를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조선 중기 ‘파교심매’의 서늘함과는 다르니 파교심매 전개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그림의 상단 오른편에 “파교심매, 병술(丙戌) 초하(初夏) - 현재(玄齋)”라고 적혀 있다.

1766년(심사정 나이 60세) 초여름에 그렸음이다. 현재는 심사정의 호이다. 그림을 요구한 선비는 옛 시인의 겨울풍경에 더위를 피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의 피서법이 춥고 힘든 시인을 상상하며 그 마음을 쓸쓸하고 가난하게 유지하려는 오랜 전통의 향유였다는 것, 명구를 추구하여 고심하는 가난한 마음에 대한 존경이고 그리움이었다.  

[출처] : 고연희 미술사학가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 문화일보​


     



16. 압구정도 - 압구정, 한강유람과 역사유감

‘자연’과 더불어 놀아야 할 곳에 ‘욕망’을 지어올렸구나…

▲  정선 <압구정도> 간송미술관 소장 ​



▲  정선 <압구정도> 견본담채 29.5×23.5㎝, 독일 성오티리엔수도원 소장

서울과 평양.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강(江)을 뺄 수 있을까.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 강물과 서울 한강의 풍취는 우리나라 우수한 문학작품의 밑거름이었다. 강가의 빼어난 명소가 그림으로 거듭 그려졌다. 대동강변 멋진 부벽루와 연광정은 평양감사가 부임한 뒤 마중잔치가 벌어진 곳이었고, 한강의 풍취로는 예부터 서호와 동호 일대가 제일로 꼽혔다. 대략 서강대교가 지나가고 동호대교가 지나가는 언저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시리즈 끝>

# 한강의 동호, 동호의 압구정! 

동호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곳은 ‘압구정’이란 정자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압구정이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 압구정동 구현대라 불리는 현대아파트 1차 72동과 74동 사이에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비탈진 응달의 공터가 제법 넓게 자리하고 있다.

그 공터에 ‘狎鷗亭址(압구정지)’라 적힌 커다란 바위 푯말이 덩그렇게 서 있다. 74동의 지대가 한결 높으니, 압구정은 74동쪽 언덕 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바위 푯말과 한강 사이에는 여러 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올림픽대로가 뻗어 있지만, 아파트를 건축할 당시 압구정 터에서 한강까지는 온통 배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는 그로부터 100여 년 전 압구정이 서 있던 실경이며 그 주변의 경치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번듯하게 선 건물이 압구정이겠다.   

# ‘압구(狎鷗)’

‘압구’란 “갈매기와 친압(親狎·친해 가깝다)하다”란 뜻이다. 물에 사는 갈매기와 사람이 사귀기란 만무한 일이지만, 중국 고전 『열자』에 갈매기와 친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사람은 매일 아침 바다로 나가 갈매기와 놀았다.


갈매기 수백 마리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갈매기 한 마리만 잡아오라 하여 이튿날 그는 갈매기 한 마리를 잡을 마음으로 바다에 나섰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너울너울 하늘 위로 날 뿐 한 마리도 그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기심(機心)’이란 말이 있다. 계획해 생각하는 욕심이며, 사특한 마음이다. 기심이 없어야 ‘압구’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자연과 일체가 되려면, 될 말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나 자신이 사회 속의 사람이란 사실조차 잊어야 할 것이다.

중국 북송 때의 한기(韓琦)는 조정과 백성에게 헌신적인 재상이었는데 성품이 겸손해 명망이 높았다. 그의 집이름이 ‘압구정’이었다. 대학자 구양수가 시를 지어 기렸다. “어찌 기심을 잊어 갈매기가 믿어주는 데 그치시리. 만물을 다스림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리라!” 세상에서 재상 임무를 행하느라 수고로운 마음을 이제 훌훌 벗고 자연을 즐기라는 기대와 믿음이 대단하다. 

# 압구정 주인의 ‘기심’ 

옛사람들은 이름(名) 외에 ‘호(號)’라는 별명을 지어 서로를 불렀다. ‘호’를 짓는 데도 스타일이 있었다. 고려 말에는 포은(정몽주), 야은(길재), 도은(이숭인) 등으로 은거의 ‘-은(隱)’자가 유행하더니, 조선 전기에는 비해당(안평대군), 사가정(서거정), 보한재(신숙주) 같이 ‘- 재(齋)’, ‘-당(堂)’ 혹은 ‘-정(亭)’ 등의 사유 건축물에 붙인 멋진 이름이 호로 널리 사용됐다.  

한강변 별장에 ‘압구정’이라 현판을 걸어 놓고 그것을 ‘호’로 삼은 인물은, 조선 전기의 관료 한명회(韓明澮·1415~1487)였다. 한명회는 한기의 옛 고사가 담긴 압구정의 이름을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1479)에게 직접 받아 왔고 현판도 예겸의 글씨로 달았다. 그러나 압구라는 이름 치장은 겉멋이었고, 한명회의 골수에는 ‘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과거에 실패했지만 수양대군의 심복이 돼 사육신을 참살하는 데 앞장섰고 일등공신이 돼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조 이후 성종대까지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세웠다. 아이러니 아닌가. 압구를 하려면 기심이 없어야 하는데 압구정을 차지하려면 기심이 많아야 했다. 후대 사람들이 한명회를 일컬어 ‘사람의 탈을 쓴 원숭이’라 불렀다. 학봉선생 김성일(1538~1593)은 압구정을 바라보며 죽은 한명회를 야단쳤다.  

평생토록 명예와 이익이라면 작은 것도 따졌으니,  
기심이 얼마나 되었는지 너는 알겠지.  
헛된 이름을 세상에 자랑 말게. 
하얀 갈매기는 원래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 一生名利較銖?, 多少機心爾自知. 
莫以虛名誇末俗, 白鷗元不被人欺. 
일생명리교수치, 다소기심이자지.  
막이허명과말속, 백구원불피인기.) - 김성일, 「압구정」  

# ‘기심’을 키워 준 왕(王) 

한명회 생전에 그를 밀어 준 사람은 조선의 역대 국왕들 세조, 중종, 그리고 성종이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보자마자 모든 일을 털어놓고 상의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왕실 치장으로 압구정을 치장하겠다는 등 한명회의 무례한 행동으로 주변 관료들이 분노해 처벌하자고 들끓을 때, 중종은 한명회를 감싸느라 요리조리 말을 돌렸다.

성종은 한명회를 일러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불러 총애했으니 성종은 자신을 한나라 고조에 비기면서 장량(張良)만 한 뛰어난 충신을 두었노라 뿌듯함을 표현한 셈이다. 성종은 또한 압구정에 직접 시를 하사해 관료들도 이를 따르게 했으니, 명공의 시문 수백 편이 한명회의 압구정에 걸렸다.

점필재선생 김종직도 참여시를 지었는데, “공이 오면 갈매기가 모여들고, 공이 가면 갈매기가 울어댔지”라는 달콤한 문구가 있으니, 지금 보면 민망한 일이다. 한명회가 중국을 가면 명나라 황제가 노한(老韓)이라 융숭하게 대접했고, 중국 문사들이 압구정에 지어 준 시문도 수십 편이었다.

이 같은 국내외의 예우가 역사에 드물었다. 충신도 간신도 지도자가 키워내는 법. 한명회를 총애했던 국왕들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거론되며 역사를 돌아보는 후인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장원급제하고 기운도 좋았다는 최경립은 한명회 생전에 비난의 시를 지어 줬다. “가슴속 기심만 고요하게 가라앉히면, 벼슬의 바다에서도 백구와 노닐 수 있을 텐데!” 한명회는 이 시를 고깝게 여기고 현판에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경립의 이 시구가 조선 후기까지 인구에 회자됐다. 후인의 마음을 통쾌하게 했기 때문이다.  

# 한강유람과 압구정 

한명회가 죽은 뒤로 압구정을 독차지한 뚜렷한 인물은 없었던 것 같다. 기대승(16세기)의 시 「압구정」에서 “거친 숲 엉킨 풀이 높은 언덕 덮였으니, 그 옛날 성대한 놀이 베풀어지던 일 생각나네. 인간사 100년이 그 얼마나 되던가. 안개 낀 강을 바라보며 머리만 긁적긁적.”

정약용(18세기)도 “압구정 피리연주 즐거웠겠지. 그때는 금가락지 미녀를 끌어안았으리. 지금은 적막한 집 누가 살려 하겠나. 수양버들 예전 같고 저녁 매미 많이 우네”라 했다. 압구정은 종종 주인을 못 찾았고 이따금씩 찾아드는 문인들이 한숨을 짓게 하는 곳이었다.

애당초 좋은 것은 압구정 앞 한강의 풍취였다. 임진왜란 후 혼란하던 1606년 봄 명나라 사신이 한강뱃놀이를 원해 사신을 배에 태워 술과 생선회로 대접하고 그의 배는 압구정에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한강의 생선회는 농어가 유명했다.  

조선 후기에 산수유람 문화가 풍미하면서, 권세 있는 문인은 국내의 명산대천으로 수십 일에 걸쳐 노비들을 이끌고 다녔고, 이를 기록한 글과 그림이 유례없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천하명산 금강산, 동해안 절경, 신선경이라고 퇴계선생 이황이 감탄한 단양 일대가 가장 애호됐고, 한강유람이 빠지지 않았다.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은 그 시절 문인들이 유람한 발자취며 그들이 거주한 곳의 풍경을 정취 있게 그려 인기가 높았다. 정선은 조선의 문인들이 갓 쓰고 두루마리 입고 산으로 유산(遊山)하고, 배 띄워 선유(船遊)하는 장면을 척척 그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천 명소의 이미지를 결정시켜 준 특별한 공헌이 있다. 정선이 금강산을 그릴 때는 기세 넘치는 필선으로 그렸고, 한강변을 그릴 때는 곰살맞은 붓질로 그려 장소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정선의 <압구정도>에는 고요하고 한가함이 느껴진다. 잔잔한 필묵에 신록의 봄기운 속 풀어지는 물결 위로 유람선이 슬슬 간다. 압구정 앞 동호의 풍광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보다.

# 압구정 그림, 황학루의 시  

심사숙고를 요구하는 예술이론 중 하나가 “강산이 그림 같다”거나 “그림이 풍경 같다”는 상반된 칭송에 대한 해석이다. 예술과 자연의 이미지는 무엇이 지배적일까. 게다가 “그림 속 풍경이 옛 시의 구절 같다”고 조선 문인들이 종종 말했다. 그런데 일단 그림으로 알려지면, 옛 시의 이미지는 그림에게 지배당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화첩이 독일의 한 수도원에 소장돼 있는데, 그 화첩의 한 화면이 <압구정>이다. 이 화면에 적힌 글이 이러하다.  

이 그림은, 최사훈의 ‘역력한양수(한양의 나무들이 역력하구나)’의 구절과 맞바꿀 만하다. 
(此作, 與崔司勳歷歷漢陽樹句, 相?. 차작 여최사훈역력한양수구 상질)

최사훈은 사훈벼슬을 지낸 최호(崔顥·704~754)로 당나라 시인이다. ‘역력한양수’란 구절은 중국 호북성 무한(武漢)의 ‘황학루’를 읊은 시의 일부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로, 시와 그림에 무수하게 담겨졌고 지금은 이름난 관광지다.

황학루에 들어서면 황학과 신선의 거대한 그림이 화려하게 맞이하고 최호의 위 시도 걸려 있다. 새로 설치된 황학루 내부의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면 다름아닌 ‘동호(東湖)’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게 된다.

중국 황학루 곁 호수 이름이 ‘동호’였으니, 한강 ‘동호’의 압구정 풍경이 황학루의 시구에 비견된 것이다. 황학루를 읊은 시와 압구정을 그린 그림을 맞바꾼다 함이, 중국 경치와 조선 경치를 동호로 걸어 바꾸자는 언어유희만은 아닐 것이다. 압구정의 한강 풍광이 황학루 못지않노라는 감탄이요 자랑이다.

# 압구정 강변의 금빛 모래  

정선을 후원한 안동김씨 출신의 대학자 김창협(1651~1708)이 압구정 앞 나루터에서 연착되는 배를 기다리고 서서 지은 시가 있다. 모래사장 황금빛과 봄물의 녹빛이 어른대어 좋은데도, 흉했던 옛 역사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푸르른 봄날 강물이 마침 좋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근심이 사라지네. 


기러기는 먼저 어디로 돌아가고, 
물 한가운데 갈매기가 자유롭네.  

모래사장 깨끗하여 말에서 내려 
한참 전에 불러놓은 배를 기다리노라. 

지난날 한공의 흥취가 생각나지만 
작은 섬을 살 돈이 나에게는 없다오.  

- 김창협, 「한양에서 딱섬(楮島)으로 돌아올 때 배를 불렀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배가 오지 않기에 말에서 내려 모래사장에서 시를 짓노라」   

정선의 그림 <압구정도>를 다시 보자. 언덕 아래 깨끗한 모래사장 노란빛이 밝다. 오늘날 한강유람선 ‘한강랜드’가 잠실대교서 출발해 동호대교 아래서 어정거리며 배를 돌린다니, 압구정 앞 뱃놀이를 흉내내볼 만하다.

[출처] : 고연희 미술사학가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