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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속 인물에 말을 걸다 Ⅰ

문수봉(李楨汕) 2018. 1. 9. 17:05

고연희의 옛 그림속 인물에 말을 걸다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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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 물을 보며 배우다

바위에 엎드려 물을 보는 선비… 쉼없는 수행을 말씀하시는군요!

  조선시대 학자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  명나라 ‘고운공편심’


# 무슨 생각 하시나요?  

선비 한 분이 바위에 엎드려 턱을 괴고 계시다. 배부른 큰 거북이 물가에 올라앉아 시간을 무시하는 양 편안하고 조용하게 거하시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보는 이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어느덧 차분해진다. 그런데 궁금하다. 선비는 하염없이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그림 속 선비에게 다가가서 물어볼까.

“저 옛날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가 적벽에서 노래하듯, 흘러도 다 흐르지 않는 물을 보라 하시며 우리의 생명도 저 물처럼 순간이 영원하다며 위로하고 계신가요? 혹은 동서고금 그러하듯 흘러간 과거를 바라보고 계신가요? 선비님은 아실 턱이 없겠으나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미국영화가 있지요. 그 주인공 교수님이 세상에서 사라져간 동생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했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추억을 바라보았듯이, 지난 시절 그 누구를 떠올리고 계시나요? 그런 것도 아니라면 무아지경이라던가요. 지난 세월도 다가올 걱정도 모두 떨치고 초월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나요?”  

# ‘물을 보다’ 이미지에 코드가 숨어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물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단순한 궁금증은 곧 ‘우리 선조들이 이 그림을 펼쳐 놓고 무엇을 감상하였을까?’라는 질문과 다름없다. 이러한 질문은 옛 그림을 이해하는 기본적 의문이며 감상태도이다. 산수화 속에 그려진 조그만 인물의 모습에는 선조들이 공유했던 생각과 감상이 응축되어 담겨있다.

근대기 이전의 옛 그림에서 화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특별한 생각을 찾아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시절 그림에는 그림을 향유하던 계급에서 공유하던 생각의 코드가 약속처럼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코드는 대개 그들이 섬기었던 성현의 말씀이거나 아끼며 암송하던 명시의 시구였다. ‘자왈(子曰·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되는 경전의 어록은 거듭 읽고 탐구하여 그 뜻을 바로 새겨야 했다. 성현의 말씀을 암송하고 행간의 뜻을 터득하는 것이 그 시절의 ‘공부(工夫)’였으며, 이 공부로 단련된 이후에야 관료로 출세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이 그림 속 선비가 취하고 있는 모습 ‘물을 보다’의 행위는 맹자(孟子)의 말씀에 등장하는 ‘관수(觀水)’를 떠오르게 하였다. ‘물’의 성질을 배우라는 말이야, 맹자뿐 아니라 공자도 그리하였고 노자와 장자도 그리하였다. 저 물을 보라 하신 공자의 말이나, 낮은 데로 흐르는 덕을 가르친 ‘노자’의 구절이 모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의 글을 두루 보면 ‘맹자’에 전하는 ‘관수’ 즉 ‘물을 보다’라는 이 한 마디가 특별히 애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을 보다’라고 하면,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맹자’의 다음 구절이었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나니, 觀水有術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하느니라. 必觀其瀾 
-『맹자』,「진심(盡心) 상(上)」 


# ‘관수’와 ‘관란’으로 배우다 

물을 봄(‘관수(觀水)’)에 그 여울목을 보라(‘관란(觀瀾)’)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의 여울목이란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서 급히 돌아 흐르며 물결이 일어나는 곳을 말한다. 맹자가 말하는 ‘관수’와 ‘관란’을 이해하려면, ‘맹자’ ‘진심 상’의 문맥을 앞뒤로 보아야 하고, 더하여 ‘맹자’ ‘이루(離婁) 하(下)’의 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진심 상’을 보면, 물이 여울목을 흘러가는 것을 보라 한 뒤 또한 해와 달이 밝은 빛으로 구석구석 빈틈을 비춘다고 하였다. ‘이루 하’를 보면, 물이 근원에서 솟아나와 구덩이를 모두 가득 채우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서 바다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맹자가 이른 바의 물이란, 근본에서 솟아 나와 흐르다가 여울을 만나면 채우고 가는데 그 흐름에 빠뜨림이 없고 그 채움에 차별이 없으며 바다에 이르기까지 멈춤이 없다는 뜻이다. 학자가 인격을 수행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태도가 이러해야 좋다는 비유의 표현이며, 너그러운 인성으로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양을 실천하라는 엄격한 가르침이다. 물이 이미 그러하니 물을 보며 배우라.

여울목을 보라는 뜻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여울목의 의미는 물결 즉 파란(波瀾)으로 집중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부딪히며 일어나는 물결을 보는 것이 물을 보는 방법이라, 물결 이는 곳을 보아야 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러하여 그가 환란을 당했을 때를 보고, 집단도 그러하여 그들이 분란에 처했을 때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사람과 그 집단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물의 본질은 어떠한가. 여울목을 보라. 온몸으로 부딪히며 물결을 일으킨 뒤 평온하고 유유하게 큰 줄기가 되어 너른 바다로 흘러든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보다(觀)’의 행위는, 실상을 보면서 내면을 보는 것이며 드러난 것을 보면서 그 숨은 바를 보는 것이라, 보았으되 그 속의 이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 것이 아니다. 유학자는 수행을 위하여 세상을 성찰하여야 했다. 

# 조선의 학자 강희안이 그렸다 

이 그림의 왼편 상단을 보면 흰 글자로 드러나는 백문인장에 ‘인재(仁齋)’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다. ‘인재’라는 호를 가진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그렸다는 뜻이다.

강희안은 15세기 조선의 이름난 학자였다. 한글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관료학자였고, ‘양화소록(養花小錄·꽃을 키우는 방법)’을 지어 화초의 생태까지 자세히 살폈을 만큼 세상의 작은 만물에도 관심을 가지는 섬세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그러한 관심으로 온갖 물상에서 천리(天理·하늘의 이치)를 살피고 제 마음의 성정을 도야한 유학자였다.

 그는 또한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그 시절 전문화가로 최고였던 안견(安堅·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제작)과 여러 측면에서 맞수가 될 만한 문인화가를 꼽으라면, 강희안뿐이었다. 

강희안은 1462년 중국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들과 그림을 주고받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들은 안견이 그리던 고전적인 산수화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는데 그 이유는, 그가 명나라의 새로운 화풍에 익숙하였고 사유적 차원의 주제를 즐겨 택하였기 때문이다.

물을 보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는 ‘고사관수도’는, 실로 강희안이라야 그렸음 직한 걸작이다. ‘인재’라는 커다란 인장을 강희안이 직접 찍었느냐 혹은 아니냐의 문제는 학계에서 분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빛바랜 인장에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강희안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는 조선시대 선조들의 공인(共認)이며 우리 회화사의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 명나라에도 유사한 이미지가 있었다.  

중국 명나라의 회화문화가 폭넓게 반영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고사관수도’의 인물과 매우 흡사한 인물상이 실려 있다. 이 책은 17세기 중후반에 출간된 판화서적으로 그림 그리는 각종 방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 ‘산수화 속에 그려 넣을 만한 인물상’의 표본을 정리한 파트가 있는데, 그 인물상 가운데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이란 표제의 인물이 ‘고사관수도’의 선비와 유사하다.

‘고운공편심’이란 오언(五言)의 시구이다. ‘높이 뜬 구름에 한 조각 마음이 함께 하네’, 즉 내 마음 한 조각이 구름 따라 두둥실 피어오른다는 말이다. 낭만적 운치가 물씬 풍긴다. 이 구절은 당(唐)나라의 명필가 안진경(顔眞卿·709∼785)의 시라 하며 안진경체의 힘찬 필치로 적혀서 명나라에 유전하던 시구였다. 가을 저녁 근심 없으니 높은 구름이 내 마음과 함께 하노라는 내용의 시이다.

명나라에서 안진경 서체가 인기를 누렸고 청(淸)나라에 들어서도 공식글체로 사용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진경의 이 시구가 청나라에서 판각된 서적에 거듭 수록된 것을 보면, 이 시구의 유행은 명나라의 문화였다고 판단된다. 정황을 미루어 해석하자면, 명나라 사람들은 안진경 서체를 좋아하게 되면서 안진경의 이 시구를 애호하였고,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을 이 시구의 이미지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은 무엇을 뜻하는 이미지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다시 묻게 된다. 먼저 말하여둘 것은, 동일한 이미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바위에 엎드린 인물상도 그런 예이다. 이 인물상의 유래를 거슬러 찾자면 관음보살의 포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명나라에서는 당나라의 시상으로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맹자의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사관수도’  

조선의 선비들은 ‘관수’와 ‘관란’의 가르침에 감응하는 시문들을 허다하게 남겼다. 그러나 ‘고운공편심’이란 시구를 애호하였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고, 조선왕조의 관료선비가 보살의 뜻으로 산수화 속 인물을 감상할 턱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물을 보다’의 이미지로 조선의 선비들이 맹자의 말씀 ‘관수’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감상법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견지한 유학적 사유와 원칙에의 열정은 중국학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글방이나 누각에 이름 붙이기를 몹시 즐겼는데, ‘관수당’ 혹은 ‘관란정’ 등의 이름이 특별히 애호되었다. 고려시대 이곡, 조선초기 서거정 및 조선말의 문헌에서 두루 만나볼 수 있다. 퇴계선생 이황의 도산서원에는 ‘관수헌’이 있었고, 기대승은 ‘관수헌’을 시로 읊으며 맹자의 교훈에 감복하노라 하였다.

관수헌의 실제 용도는 선비들의 휴게실이었다고 한다. ‘독서’에 비할 때 ‘관수’란 휴식의 자세라, 물처럼 쉼이 없는 수행을 가르친다. 우리 어릴 적 뛰어다니던 교실마다 정직이며 성실이란 단어들이 붙어 있었던 것도 그러한 유풍일까.

‘고사관수도’는 이전에 ‘한일관수도(閑日觀水圖)’란 제목으로 불렸다. 휴식하는 날의 관수이다. 우리 옛 그림 속에는 물을 보는 선비상이 많다. 폭포를 바라보는 ‘관폭(觀瀑)’도 그 중의 하나이다. 물을 ‘관(觀)’하는 그림 속 선비는 은거자가 아니라 고귀한 신분의 현직관료들이다. 세상을 다스리며 유학자적 수행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 물을 보는 그림으로 소통된 까닭이다.

유학자의 관점과 열정으로 물을 보고 세상만물을 대하는 태도, 그것은 유학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게임이었고 실천이 어려워도 매력적인 배움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공부를 제아무리 오래 하여도 완벽한 물의 속성을 삶 속에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현들이 물을 배우라고 이르고 또 일렀겠는가. 옛 선조들이 ‘관수’와 ‘관란’을 말하고 또 말하고 그림으로까지 그려 보았겠는가.  

이 그림 ‘고사관수도’는 우리 선조들에게 인재선생 강희안의 가르침이라 보듬어진 그림이고, ‘관수’의 표현이라 사랑받은 그림이다. ‘고사관수도’에 엎드린 선비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아, 그 느긋하신 모습은 공평무사의 인자함과 빠뜨림 없고 쉼이 없는 완벽한 수행법을 가르치고 계셨군요. 자연의 물도 정녕 그렇지 않거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래서 옛 분들의 마음이 붙들렸던 게지요.” 


▲ 고연희 : 1965년생.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그림, 문학에 취하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책을 통해 조선시대 그림에 대해 문학사상적으로 접근하면서 옛 시각문화의 내면을 재해석해왔다.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

 


2. 이방운의 ‘사인암(舍人巖)’ - 조(趙)대감의 단양(丹陽)나들이

엉뚱한 趙 대감님, 기암절벽 앞에서 興이 도도해지는구나



▲  이방운의 ‘사인암(舍人巖)’. 사인암과 주변 강을 실제 풍경과는 반대방향에서 그렸다. ‘사군강산삼선수석’ 서화첩(1802~1803년), 종이에 수묵담채, 32.5×26㎝


 


▲  이방운의 ‘금병산(金屛山)’. ‘사군강산삼선수석’ 서화첩



  이방운의 ‘도담(島潭)’. ‘사군강산삼선수석’ 서화첩


충청도 단양(丹陽)을 유람한 조선의 선비는 무수하게 많았지만 유람하는 그 모습이 그림으로 전해진 예는 매우 적다. 소개하는 그림 속 가마 탄 인물을 보라. 보란 듯 그림으로 기록된 유람의 주인공이다. 드문 예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그가 누군지 검토된 바 없다. 그는 ‘조(趙) 대감’이 분명하니, 이 글에서 그를 조 대감이라 부르겠다. 그는 우리 역사나 문학사에 특별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고, 숨어있던 한 선비의 곁으로 다가가 보려고 한다. 


유머러스 조 대감



조 대감의 관하에서 일을 보는 윤 씨는 친밀하게 지내는 기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생이 또 다른 관리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를 안 윤 씨는 보란 듯이 그녀를 멀리했다. 행여 연회장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바짝 여미어 그녀의 눈길이나 옷깃이 그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윤 씨가 그녀를 존경하여 쩔쩔매는 것 같았다. 조 대감이 이를 보고 소리 내어 놀렸다.  

“어허! 형수로 예우하다니, 그 예법이 특이하구나!”  

기생과 첩으로 문제가 많던 시절에 윤 씨의 행동은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였다고 한다. 조 대감의 농담은 주변의 웃음을 터지게 했고, 윤 씨의 단정함은 세상에 선포됐다. 이 에피소드는 다산선생 정약용(丁若鏞)의 기록으로 전한다. 조 대감의 빈번한 익살에 정약용은 눈이 동그래져 탄복하곤 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조 대감의 해학이 원래 심하십니다.’ 그 당시 정약용이 들은 귀띔이었다.  

의리 있던 조 대감 



왕조실록에서 조 대감을 찾아보면, 고을에 자비를 베풀어 포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딱 한 번 나온 뒤로, 그 나머지는 깡그리 암행어사에게 고발되어 감직 혹은 파직을 당했다는 기록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의 관할에서 화재가 나서 군사서류가 잿더미가 된 일이 그 하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민사재판을 군법에 적용하여 다스렸다는 재판소동이 또 다른 소동이었다. 실로 ‘엉뚱한 일’이라고 ‘홍재전서’에 기록돼 있다. 아마도 조 대감은 죄질의 파렴치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렇기로서니 민간인을 군법으로 다스리다니! 국가적 위법이다.

그는 청풍부사를 지내다가 또다시 암행어사에게 고발되어 파직당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청풍마을에서 의로움(義)을 원하는 이들이 모두가 조 대감을 그리워한다”는 기록이 함께 전한다. 보나 마나, 조 대감은 군사재판 못지않은 엉뚱한 짓을 또 저질렀고 그것은 의리와 인정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 후 조 대감은 금산부사가 되었다. 역시나! 고발되고 파직되었다.  

자는 안숙, 이름은 조영경.  

조 대감의 이름은 조영경(趙榮慶·1765년 생년시 합격). 할아버지 조태채(趙泰采·1660∼1722)가 명신(名臣)으로 이름이 높았고, 아버지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대제학에 올랐으니, 명문가 출신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 이름을 그만 부르고 자를 지어 불렀다. 조영경이 관(冠)을 쓰고 성년식을 치를 때, 아버지 조관빈이 글을 지어 축복했다. “사랑하는 나의 막내아들이여, ‘안숙(安叔)’이라 자(字)를 삼느니, 세상을 편안(安)하게 다스리는 인물이 되거라!”

조영경은 명신 조태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종종 품계를 올려 받았다. 고발되어 파직되더라도 다시 번듯한 군수자리를 얻었다. 옛 신하의 후손을 보살피는 국왕 정조(正祖)와 헌종(獻宗)의 배려 덕분이었다. 게다가 조영경의 형이 일찍 죽었기에 나라에서 주는 음복은 모두 조영경의 차지였다.

‘조상 덕’에 팔자가 좋았으니 그럴 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가문의 영광이나 제 몸의 출세를 위하여 처세에 급급하지 않고 의리와 소신으로 버티며 호탕한 유머를 터뜨렸던 선비 조 대감. 호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사인암’에 이르다.  

이제 다시 그림을 보라. 해학과 의리의 조 대감이 가마를 타고 단양나들이를 나섰다. 그림 속 조영경은 나이 지긋한 청풍부사 시절이다. 

조 대감이 이른 곳은 ‘사인암(舍人巖)’이다. 충청도 단양의 풍취에서도 최고라 일컬어진 바위언덕이다. 바위이름이 사인암이라니 이상하다. 집 사(舍)와 사람 인(人) 이의 조합으로 그 뜻을 알 수 없다. 여기서의 사인(舍人)은 ‘사인’(捨人)을 대신한다. 버릴 사(捨)와 사람 인(人)이다.

옛 한자사용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 뜻은 ‘사람을 버리다’가 되고, ‘사람의 세상을 버리다’가 된다. 세상 살던 사람이 세상을 버리기 쉬운가. 그래서 이름이 ‘사인’이다. 그리하고 싶을 만큼 사람들의 넋을 잃게 하는 바위란 뜻이다. 

사인암의 모습은 무어라 형용하면 좋을까? 다산선생 정약용은 “바위벽이 대패로 깎아놓은 듯”하다 했고, 청장관 이덕무(李德懋)는 “붓에다 유황을 찍어 죽죽 내리그은 듯하다”고 했다. 사인암은 분명히 자연이건만 도대체 자연스럽지 않으니 그리들 표현하신 게다.

그림 속 사인암은, 실로 대패로 깎아낸 듯 붓으로 내리그어 기이하게 세워져 있다. 그 앞에 흐르는 맑은 물은 바위의 풍취를 배가시켜 준다. 만약에 사인암이 깊은 산 속에 있었다면 절경으로 꼽히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이다. 사실 이 그림은 사인암과 너른 물이 어울린 풍광을 그리고자 사인암 뒤의 나무와 언덕을 모두 제거했다.

사인암과 너른 물은 서로 반대방향에서 그렸다. 그러나 단양의 사인암을 실제로 본 사람이라도 이 그림의 속임수를 단숨에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사인암과 물 배경의 인상만이 우리의 기억에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사인암을 마주 보고 서서 사인암을 뚝 떼어 그린 뒤, 뒤돌아서 사인암 앞의 맑은 물을 그렸다. 바위와 푸른 물길 어울린 정취를 이 한 폭에 전달하기 위함이리라.

사인암 아래로 조 대감의 유람이 당도했다. 해학이 심했다는 조 대감. 가마 위에 올라 앉아 멋진 산천 들이키고 흥에 잔뜩 취했으니, 그 해학이 툭툭 터져 나왔으리라. 머슴들은 웃다 행여 힘이 빠질까 가마라도 흔들릴까 조심조심 키득키득. 조 대감의 단양유람이 무르익는다.

‘한벽루’에 올라 눕다. 

사군(四郡)산수가 묵은 빚이 되어,  
꿈에 본 지 오래 되었더니. 
수령 행장이 홀연히 동으로 나서,  
청풍으로 나아가 벼슬을 나왔구나. 
한벽루(寒碧樓)에 높이 올라 누운 것은, 
가을 여물어 백성 다스릴 일 없기 때문이지. 

조 대감이 유람의 입장을 밝힌 시이다. 사군산수란, 단양일대는 네 개 마을이다. ‘단양사군(丹陽四郡)’이라 불렸다. 단양, 청풍, 영춘, 제천을 말한다.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는 곳으로 큰 바위와 반석이 즐비하고 강원도 영월에서 강물이 흘러들고 남한강 상류의 너른 물이 흐르니, 수석(水石)이 길고 높은 곳이다.  

청풍댐 건설로 이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한벽루’는 청풍문화단지로 옮겨 놓았다. ‘금병산(金屛山)’에 그려진 누각이 한벽루다. 오른편 누각에 올라앉아 비스듬히 누울 듯한 포즈의 인물이 조 대감이다.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고자 단양유람 묵은 뜻을 가을이 늦도록 미루었더니, “물가 난초 산의 국화가 모두 시든 것이 애석하도다”라고 한다. 이들의 유람은 음력 9월, 국화가 모두 시든 늦가을이었다.

‘도담’을 돌아 ‘석문’으로 흘러가다. 

또 한 폭을 펼쳐보자. 제목이 ‘도담(島潭)’이다. 조 대감을 태운 배가 물 위 세 봉우리를 슬슬 돌아 난다. 조영경의 단양유람은 여덟 면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시문까지 더하여져 화첩(앨범)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사인암’을 보았고, 한벽루가 그려진 ‘금병산’을 보았고, 이어서 석문이 함께 그려진 ‘도담’을 보고자 한다.  

‘도담’이란 ‘섬이 있는 못’이다. 세 봉우리라서 ‘도담삼봉(島潭三峯)’이다. 모습이 기이하니 이야기도 무성하다. 정도전의 호 삼봉(三峯)이 도담삼봉에서 나왔다는 사연이 전한다. 혹은, 그 모습이 한 지아비에 본처와 첩의 세 사람 같다 하며, 세 개 바위섬의 애증이 드라마로 펼쳐진다. 조영경의 시는 다정하다. “배에는 손님이 세 분이고, 강에는 섬이 세 개로다.” 

‘도담’에는 ‘석문(石門)’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화면 왼편 상단에 선 돌문이 그것이다. 사인암을 그리듯이 석문 주변의 흙더미와 무성한 초목들은 모두 걷어치우고 개선문이나 독립문처럼 돌문만을 깔끔하게 그려놓았다. 그림 속 석문의 변조에서 화가의 발칙한 용기를 볼 수 있다. 볼 것은 석문이니 석문만을 떼어보자는 방식이다. 게다가 이왕이면 제대로 된 석문으로 그리노라 깎아 만든 양 반듯한 돌문을 그려놓았다. 원래 도담의 물가에 자리한 석문은 수목에 파묻힌 양 두루뭉술 큼지막한 바위구멍이다.

화가 이방운 

그린 이가 누구인가. 문인화가 이방운(李昉運·1761∼1815년 이후)이다. 몰락한 양반의 자제로 그림으로 생계를 꾸린 전문적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밝고 붓질이 경쾌하여 옛 그림 같지 않은 화사함이 감돈다. 간혹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묘한 독특함이 있다. 이러한 이방운의 발랄한 화풍이 조영경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방운이 조영경의 단양유람을 그려드린 그림들과 조영경 및 그의 벗들이 더하여준 시문이 합하여져 서화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온전한 모습으로 현재 국민대박물관에 전한다. 그 제목은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이다.  

단양으로 간 선비들  

퇴계선생 이황이 단양을 보고, ‘노닐 만한 곳’이라 한 기행문이 유명하여 조선의 글 읽은 문사라면 모두 이를 읽었다. 선비들의 단양나들이는 퇴계선생이 인정해준 일, 놀아도 좋은 떳떳한 놀이였다.

선비들은 남북을 오갈 때 단양을 거치려고 했다. 다산선생 정약용은 울산 계신 아버님께 문안하고 한양으로 돌아올 때는 길을 바꾸어 단양을 둘러보았다.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찾는 곳도 한양에서 멀지 않은 단양이었다. 충청도에 고을을 살러 가면 단양유람이 가장 좋은 일이었다. 이 그림 속 조 대감은 청풍부사가 되었으며 농사일 모두 끝난 늦가을을 맞았으니 단풍지는 단양풍취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양산천은 의구한데 단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십여 년 전 공부하던 여러 선생님들과 단양을 찾았다. 도담삼봉 선명한 모습이 신기하였는데 쾌속정이 물살을 가르며 굉음으로 달리는 데 놀랬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 여행에 동참했던 한 분은 이방운의 이 그림을 학계에 소개해 주었다.  

조 대감의 가을풍취를 올해 안에 즐기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혹은 이방운의 이 그림을 다시 펼쳐 그 옛날의 가을풍취와 조 대감의 너스레를 상상해 보면 어떨까. ‘나의 자가 안숙(安叔)이라 세상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할 터인데, 허허! 내 한 몸만 편안하군. 가마꾼, 뱃사공, 수고시켜 미안하네!’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




​3. 이명기 ‘송하독서도’ - 소나무 다 늙도록 책만 읽는 선비라니!

老松 아래서 세상잊고 讀書 조선 선비들의 로망이었다


 


▲  이명기의 ‘송하독서도’(103.8×49.5㎝, 종이에 옅은 채색).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  조석진의 ‘소나무’(33×28㎝, 종이에 수묵 위주 옅은 채색).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중국 한(漢)나라의 왕충(王充)은 참된 사유를 지키고자 사회적 통념에 따른 생활을 포기했다. 왕충은 자신의 방문을 굳게 닫았고, 문과 창에는 칼과 붓을 걸었다. 경조사의 사회예절도 일절 그만두었다. 오로지 생각에 침잠해 독서하고 저술하기를 30여 년 하여, ‘논형(論衡)’ 85권을 완성했다.

 중국 고대사상사의 최고 역작이라고도 불리는 ‘논형’. 그 논리는 치밀하고 결론은 파격적이다. 예컨대 결혼은 욕망을 위한 것이고 벼슬은 녹봉을 위한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인과관계로 설명되지만 우연도 많이 작용한다. 정치가의 위선 논리에 사람들이 속는다. 하늘이 사람에게 복을 주는 기능이 없다. 사람은 죽은 뒤 귀신이 되지 않는다 등등.

그 시절 거론조차 어려운 문제를 현대의 상식 수준으로 끌고 간 사유가 독보적이다. 선입견에 지배되지 않았고 주위를 상관하지 않았던 왕충. 그의 삶은 불우했다. 왕충의 논리에 따르면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도 불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 귀신이 이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왕충의 저술법, ‘폐문저서’

왕충이 전념했던 저술 방법을 일러 ‘폐문저서’(閉門著書·문을 닫고 책을 쓰다)라 부른다. 이후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보면 인물지에 ‘폐문저서’ 하였노라는 칭송이 종종 등장한다. ‘폐문저서’ 혹은 ‘폐문독서’(閉門讀書·문을 닫고 책을 읽다)란 말은 출세할 수 없었던 학자들에 대한 위로였고, 학자의 참된 모습에 대한 기대였다. 그리고 ‘폐문저서’란 표현은 하나의 정제된 ‘환상’이 되어 갔다.   

# 왕유의 시, ‘폐문저서’의 이미지  

당(唐)나라의 왕유(王維)는 시 짓고 그림 그리는 데 재주가 탁월했던 귀족 문인이다. 호화로운 별장을 장안 근교에 지어 놓고 세월 좋게 살았던 인물이다. 어느 봄날 왕유가 벗을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했다. 그 벗의 뜰에 소나무가 있었던 모양이다. 왕유는 이때의 정황을 시로 읊었다.  

‘폐문저서’를 여러 세월 하노라니,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 
閉門著書數歲月,
種松皆作老龍鱗.

어린 소나무가 다 늙는 줄 모르고 책을 썼다니! 부재 중인 벗에 대한 칭찬이 지나치다. 세월의 길이에 대한 과장이 심하지만, 왕충의 ‘폐문저서’가 30년이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서 떠올려 보게 된다. 왕유의 벗이 왕충 같은 저술가는 물론 아니었지만,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에 그럴듯한 시적 표현이다.

무엇보다, 왕유의 이 시구를 읽노라면 “왕유의 시에 그림이 있다”고 한 소식(蘇軾)의 글이 정녕 빈말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선비의 서재 앞에 노송 한 그루. 그 풍경이 운치 있게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옛날 왕충의 불우한 인생과 고독하고 치열했던 저술마저도 멋스러운 영상으로 슬그머니 변조되어 기억된다. 시인의 요술이 이것이다.  

왕유의 시구가 빚어 놓은 멋스러운 이미지는 이후 중국과 한국의 회화작품으로 무수하게 재탄생되었다. 특히 중국 명(明)나라에서 위의 두 줄 시구를 얹어 소나무 아래 서재에서 독서하는 화면이 유행하였다. 중국 근대기에는 오직 소나무 한 그루만 덜렁 우람하게 그려 놓고 그 위에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라 적어 넣은 그림이 적지 않다. 왕유 시의 이미지가 그림에 정착되면서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독서를 뜻하는 코드로 작동하는 경우다.   

# 탈속의 여유로 그려진 그림들 

조선 후기 정조 때의 화원화가 이명기(李命基)는 초상화를 잘 그린 실력파 화가였다. 18세기 후반에 활약했고, 호는 화산관(華山館)이다.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데 참여했고, 김홍도와 합작으로 그린 ‘서직수초상’은 조선시대 회화사의 걸작이다. 초상화가 이명기가 그린 ‘산수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다. 제법 큰 화면에 정조대 왕실의 산수화풍이 반영된 그림이다. 그림 속 화제가 이러하다.  

독서하기 여러 해,  
심어 놓은 소나무에 모두 늙은 용의 비늘이 났구나. 
- 화산관  

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鱗.  
- 華山館 

왕유의 위 시에서 앞구가 단축되면서 ‘책을 쓰다(著書)’는 ‘책을 읽다(讀書)’로 바뀌어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책 읽기가 느긋하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인공은 늙은 소나무다. 바위에서 자라나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선비를 호위한다. 솔잎은 살짝 휘어진 바늘침들 같고, 가지에는 솔방울이 닥지닥지. 청록의 선염을 더하여 기운이 청정하다. 소나무의 몸통은 온통 우툴두툴 용의 몸통이다.

선비는 쓱쓱 그려 작게 아래 앉히고, 소나무는 공력을 더하여 치밀하게 크게 그렸다. 말할 것도 없이, 선비의 내면을 소나무로 표현한 장치다. 세상 잊고 독서하는 선비의 기상과 여유로움. 흥미롭게도 이 화면은 왕충의 고독이나 왕유의 방문을 상기시키기보다는 ‘푸른 소나무’와 ‘즐거운 독서’의 탈속을 만끽하도록 인도해 준다.

오랜 독서에 지겨운 양 쪼그린 동자가 귀엽다. 달그락달그락 끓어오르는 차향기에 향긋한 솔향기가 어우러져, 독서하는 선비 마음이 맑고 여유롭게 보인다.

누군가가 왕실의 전문화원 이명기에게 요청해 이를 그리게 한 것이리라. 요청자와 화가 모두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그림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나무 아래 책 읽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은 이 그림으로 그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다른 예로 조선 말기 조석진(趙錫晉·1853~1920)의 ‘소나무’를 소개한다. 조석진 역시 고종의 어진을 그린 전문화가이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왕유의 시구 두 줄이 온전하게 적혀 있다. 휘어진 소나무의 가지와 그 아래 서재의 선비 모습은 다소 쓸쓸해 보인다. 세상명리에서 벗어난 한적함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준다.      

# 선비는 ‘독서’만 하나 

한국과 중국의 산수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재에 앉아 독서하는 선비가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그림은 대략 중국의 원나라 말기부터 은거학자의 이미지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산수화에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서재와 독서 선비가 매우 작게 그려진 경우도 많다. 이는 산수 속 독서라는 운치를 말해 준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분해 그림의 주제로 끌어낼 때, ‘서재도’ 혹은 ‘독서상’ 등의 명칭이 쓰인다. 조선 후기에는 독서상이 한결 부각된다.  

그림 속 서재와 독서상 때문일까. 우리에게 떠오르는 옛 선비의 대표 이미지는 낮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독서상이다. 또한 이러한 옛 그림 속 선비들을 보노라면, ‘아 옛 분들은 밤낮없이 독서만 하셨나?’라고 존경하거나 부러워하기도 한다. 답은 노(No)다. 그들이 마음껏 독서할 수 있었다면 그림으로 그릴 리 만무하다. 게다가 산수 좋은 공간에서 동자까지 거느린 느긋한 독서라니, 어느 시절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 ‘독서’ 이미지의 진짜 이유들  

그러면 독서상은 조선시대 문화 속에서 무엇을 뜻하는 코드였을까.

독서는 사회적 권력이었다. 책을 들고 배울 수 있는 신분은 제한돼 있었다. 그 책이란 몽땅 외국어(중국한문)였다. 책을 읽고 저술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다. 게다가 과거를 통과해 평생 맘 놓고 책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의 관료층이었다.  

관료들도 바랐던 최고의 독서가 있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임금이 여가를 내려 독서하다)다. 대제학이 10명 안팎의 신진학자를 선발해 오로지 독서하고 토론하도록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주는 인재육성 제도였다. 세종대에 생겨 독서당이 운영됐고 정조 이후로는 규장각이 이어갔다. 한 시절 이른바 ‘호당독서’(湖堂讀書·풍취 좋은 동호가에서의 독서)라 운치 있게 불렸던 이 혜택은, 조선의 관료라면 누구나 선발되기를 바라던 ‘로망의 독서’였다.  

독서는 경제력이기도 했다. 정보의 유통이 오직 책이라는 매체로 이뤄지던 시절이라, 책이란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명나라 출판문화가 급격히 성장하자, 조선의 문인들은 책 구입 열망에 빠져들었다. 중국 시장에 서적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를 사들이는 장서(藏書)의 취미가 조선 후기 문인사회에 크게 유행했다. 돈이 많은 이라야 장서 취미를 향유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독서 리스트를 만든 뒤 서적을 갖춰 소유하고 독서할 것을 갈망했다. 전통적인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이요, 중국 생존작가들의 신간서적, 치병을 위한 건강서적, 혹은 식물 재배와 수석의 취미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조선 후기 문인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어느 집에는 책이 몇 만 권이라더라, 어느 장서가가 근래 신간을 잔뜩 사들였다더라, 어느 독서광이 수십만 번을 읽고 또 읽어 깡그리 암송한다더라 등등.

또한 독서는 무엇보다 인격과 지식의 이미지였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하며 제자를 키워 냈던 처사(處士)들이 있었고, 이러한 분들에 대한 존경이 있었다. 독서에 내재된 권력과 경제력을 잊도록 해주는 탈속의 이미지는 이러한 존경과 바람이 더욱 크지 않았다면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문화의 욕망과 이미지의 탄생  

이명기의 그림 속 소나무 아래 독서하는 저 선비를 다시 본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나라의 왕충이라 해도 그만이고, 당나라 시인 왕유의 벗이라 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 눈에 이 선비는 조선 후기 선비들이 꿈꾸었던 자화상이며 그들의 정체성이다. 꿈이기에 ‘환상’이지만, 떨칠 수 없는 소망이었다.  

관료 문인으로 글과 그림을 즐겼던 한 학자는 그 시절 독서상에 담긴 소망을 온전히 그림 위에 올려놓았다. 프랑스 기메미술관에 소장된 윤제홍(尹濟弘·1764~?)의 작은 그림 ‘산수도’를 보면, 너른 물가 작은 서재에 선비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윤제홍이 그림 위에 글을 적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산속에서 독서하는 것이거늘, 아직 이루지 못했지. 이에 그림으로 그려 봤다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긴 한숨으로 탄식할 뿐이지.”

윤제홍은 과거를 거쳐 대사간에 이른 문인이다. 시문과 그림에 능했고 여행과 풍류가 남달랐다. 그의 꿈은 독서, 산중 고요한 곳에서의 세월 모르는 독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지 못하는 소망이었다.  

한 시절의 꿈은 그 시절의 현실과 문화 속에서 자라나 그림으로 그려진다. 조선 후기 문화의 꿈이 독서 이미지로 그려졌다면, 우리 시대의 문화적 욕망은 어떠한 이미지로 그려질 것인가?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

 


4. 이흥효 ‘추경산수도’ - 나도 그대처럼 권력에서 떠나가리

삶이 번잡했던 벼슬아치들 江湖에 내려앉아 세월 낚는 부들삿갓 ‘어부’를 꿈꿨다


 


▲  기러기 내리는 강남의 가을을 그린 이흥효의 ‘추경산수도’.(16세기. 산수화첩. 비단에 수묵, 29.3 x 2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빈 배가 정박돼 있고, 어부는 주점에 들었다. 이흥효의 ‘산수도’.(산수화첩. 29.3 x 2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시에서 선비들이 바라는 직업의 제1순위는 ‘어부’다. 복사꽃 흩어지는 물길로 흘러가는 어부도 좋고, 비 오는 날 푸른 도롱이에 부들삿갓으로 폼을 잡은 어부도 좋다. 쓸쓸한 가을 강이나 눈 내린 겨울 강에 으슬으슬 손발이 저려 와도 무시하고 앉아 있는 어부라면 더욱 좋다. 그래서다. 그러한 ‘어부’의 그림이 실로 많이 그려졌고, 이를 감상한 시문도 풍성하게 지어졌다.


# ‘어부’가 되겠다는, 대제학  

조선전기 관료문인 서거정(1420∼1488)이 ‘추강독조도(秋江獨釣圖; 가을 강에 홀로 낚시하네)’ 한 폭을 펼쳐놓고 시를 읊는다. 자신은 언제나 ‘어부’를 꿈꾸며 살아왔거늘 아직도 어부가 아닌 것이 부끄럽다는 고백이다.   

거룻배와 낚싯대가 꿈속에 자주 드니, 
나는 지난 세월 물고기랑 새랑 친한 정을 나누었지. 
저 옛날 푸른 도롱이 입은 현진자여, 
올해도 인간세상 못 떠난 게 부끄럽다오.    
- 서거정, 「추강독조도」 제 2수.  

서거정은 최상급 관료문인이었다. 국가문서와 귀빈접대로 일생이 바쁘고 호화로웠다. 그는 이미 20대 약관에 집현전 소장학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적었고, 승승장구 출세하며 대제학을 거듭 지냈다. 시문창작은 물론이요 역사서, 지리서, 음담패설집까지 갖은 집필에 분주했고 성격도 쾌활했다.  

서거정의 소망이 ‘어부’라니! 벼슬이란 오르기는 어렵지만 떠나기란 쉬운 것이고, 그의 벗 김시습은 떠난 지 오래였다. 서거정은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거정에게 도롱이와 삿갓을 선물한 이가 있었다. 서거정은 그의 어부 꿈을 거듭 고백했다. 서거정이 도롱이에 비 맞으며 나앉을 리 만무한 일이다. 옛 분들의 ‘어부’ 꿈, 그 정체가 흥미롭다.    

# ‘어부’는 마음이 한가롭다.  

나무 끝에 너른 들에 가을빛이 물들고, 
아득아득 강과 호수 기러기 그림자가 어스름하네. 
서쪽에서 부는 바람 소매에 가득 들고, 
한 평생 고기 낚는 마음이 한가롭구나. 
- 서거정, 위의 시, 제 1수 

서거정이 ‘추강독조도’의 내용을 묘사한 시다. 누구의 그림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의 화원화가 이흥효(1437∼1593)의 그림으로 그 화면을 유추할 수 있다. 가을 너른 들에 아득한 물, 기러기들의 실루엣이 어스름하다.   그림 하단 조그만 배 위에 ‘어부’가 앉아 있다. 낚싯대는 배 뒤편에 꽂아 두었다. ‘어부’는 하는 일이 없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 ‘어부’에게 드레스코드가 있다.  

이 그림 속 어부를 들여다보라. 그가 입은 옷은 관료의 평상복 ‘도포’다. 그가 전직 벼슬아치였음을 뜻하는 코드다. 직업적 어부가 아니라 은일자란 뜻이다. 서거정이 위 시에서 언급한 현진자는 청색 삿갓에 녹색 도롱이를 입었다. ‘푸른 도롱이’란 말이 예서 비롯한다. 이 그림엔 달이 떴으니 맑은 날씨다. 도롱이(비옷)가 필요 없다.   


세상 밖 어부라 하여 옷을 함부로 입히면 안 된다. 어부의 도포에 붉은색을 칠했다가 화원의 자리에서 쫓겨 난 사람이 있다. 명나라 화가 대진이다. 붉은색은 황제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진의 그림제목도 ‘추강독조도’였다.  


# ‘어부’는 강남(江南)에서 노닌다.  

‘어부’가 머무는 곳을 ‘강호(江湖)’라 한다. 조선시대 시를 보면, 그저 ‘강호’에 가겠노라 읊는 경우가 많다. 국문학계에서는 옛 시와 시조에 등장하는 ‘현실’/‘강호’의 공간대립에 대하여 오랜 논의가 있었다.

‘강호’란 자연에 실재하는 어느 강과 호수가 아니다. 현실의 명리다툼이 없는 곳, 마음이 편하리라 확신되는 곳이었다. 상상의 ‘강호’. 그곳의 물풍경에는 계절의 변화가 우주의 순리처럼 오고 간다.

모든 상상에는 이미지(image)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강호’에는 중국 ‘강남(江南)’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알고 있는 천하제일의 경치, 일러 ‘소상팔경’이 그곳이다. 오늘날 중국의 호남성 동정호 일대다. ‘소상팔경’을 상상하는 시와 그림은 고려왕실로부터 조선왕실로 인기를 누렸고, 양반가에 팔폭으로 펼쳐졌던 병풍그림이었다.  

소상팔경의 여덟 경치 중 조선선비들이 특히 애호했던 이미지는 ‘평사낙안’(平沙落雁; 너른 모래벌판에 내려앉는 기러기들)과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가을달)이었다. 믿음의 새요, 질서의 새로 통하는 기러기들이 따뜻한 강남으로 내려앉으니, 보는 이는 안식을 느낀다. 둥근 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흥효가 그린 ‘강호’에는 이 두 풍경이 조합되어 있다.

# ‘어부’에도 유형이 있다.  

‘어부’는 물에 산다. 세상의 발길이 이르기 힘든 조건이다. 나에게 ‘어부’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다. 겸허한 인성과 집념의 마력. 그것은 헤밍웨이가 멀고 검은 바다를 상상하며 빚어준 환영의 인격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상의 진짜 어부를 만나본 일이 없다. 조선시대 관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도 ‘어부’란 세상 너머의 존재이며, 글 속의 상상어부, 즉 ‘가어옹(假漁翁)’이었다.

동아시아 문학의 전통 속에서 ‘어부’는 종류가 다양하다. 문사들의 노래문화와 사상철학이 변화하면서 그들이 꿈꾸는 어부상도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어부’의 기본형은 고대 중국의 노래집 ‘이소경’의 어부다. 초나라 대부 굴원이 바른 말을 고하다가 세상에서 쫓겨났을 때, 어부는 굴원에게 말한다. 물이 깨끗하면 갓끈을 닦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을 일이지, 더러운 세상에 깨끗한 마음을 말한 것이 어리석다고.  

굴원은 타협을 원치 않고 끝내 멱라수에 투신했다. 굴원을 추모하는 시문이 조선시대 문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굴원처럼 살겠노라 다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에 달관한 어부의 통찰력이 오히려 매력으로 옛 분들 마음에 파고든 것 같다.  

역사의 실존 인물 강태공은 세상의 리더가 될 어부다. 강태공은 기원전 11세기 중국인이다. 주나라를 부흥시키고 세상의 정의로운 풍속을 일으켰다고 칭송되는 위인이다. 강태공이 무왕의 부름을 받아 재상으로 오르기 전 그는 위수의 어부였다. 강태공형 어부는, 세상을 꿰뚫어 통찰하며 때를 기다리는 잠재적 정치인이다. 조선의 시문과 그림에서 지속적으로 애호되는 유형의 ‘어부’다.

당나라 시인 장지화는 ‘어부사’를 매우 잘 지어 유명하다. 그는 실제로 은일어부의 생활을 했다. 당나라 황실과 귀족들은 그를 상당히 우대해 배와 노비 등을 제공해 주었다. 앞에서 서거정이 부끄럼을 고백할 때 ‘현진자’를 불렀는데 이가 곧 장지화다. 시문으로 명성을 얻고 행복하게 살았던 시인형 ‘어부’다.

정결한 어부로 엄자릉이 있다. 엄자릉도 ‘후한서’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다. 퇴계 선생 이황이 어부 중 엄자릉을 좋아했다. 동강에서 염소가죽을 걸치고 낚시했던 엄자릉. 그는 한나라 황제 광무제와 어린 시절 동문수학한 벗이었다. 광무제가 그를 아껴 조정으로 불렀으나 엄자릉은 거절했다.

황제와의 하룻밤 일화가 유명하다. 그를 찾아온 황제와 한 방에서 잘 때, 엄자릉이 발을 황제의 배 위에 올려놓고 잤다. 황제와의 인연을 빌미로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던 결연함이, 정치권력에 붙어 사는 현대의 소인배들까지 거침없이 조롱한다. 조선의 학자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어부’가 엄자릉이었다.

그 유형이 무엇이든, ‘어부’는 세속적 성공을 바라지 않고 정치권력을 비루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따라서 ‘어부’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로부터 자유롭다. ‘어부’는 세상 너머에 머물면서 세상을 통찰하는 존재다.   

# ‘어부’를 권하는 학자들 

성리학적 정신수양의 추구가 조선의 문인사회에 자리 잡히는 조선중기, 몇몇 유학자들은 어부노래를 다듬어 ‘어부’의 마음으로 수양하라 권면하는 문화캠페인을 벌였다. 그 당시 술자리에서 연주되는 노래와 춤은 그 내용이 음탕해 성리학자들이 이를 사회문제로 판단했던 까닭이다. 대표학자가 농암 선생 이현보(1467∼1555)다. 그는 노랫말을 지어 시동에게 부르게 하고 다시 벗들에게 돌려 읽도록 해 거듭 다듬었다.  

조선사회에 유가문화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는 거대한 지각변동과 함께 나타났던 문화면 특기사항이었다. 그렇게 다듬어진 곡조 중 유명한 것이 이현보의 ‘어부사’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일엽편주를 만경파에 띄워두고.  
인간세상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알겠느냐. 

퇴계 선생이 이현보의 어부노래를 좋아했다. 놀이의 방탕함을 절제하면서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라 했다. 노래 속 ‘어부’는 날 밝으면 노닐다가 날 저물면 주막으로 든다. 물 보며 달 보며 술 한 잔을 들이켜면 근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잊혀지리. 퇴계 선생도 걸맞게 시를 읊었다.

강물 보며 술 마시니 높은 뜻 감흥이 일어나, 
술 한 잔에 마음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네. 

‘어부’를 상상하는 마음은 이흥효의 또 다른 산수화로 표현되어 있다. 어부의 배는 강가에 정박하고 있다. ‘청렴’(푸른 깃발)이 휘청 꽂힌 주점이 그 곁에 있다. 여기 소개한 이흥효의 그림 두 폭은, 현재 여섯 면으로 엮어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흥효산수화첩 중 두 면이다. 

# ‘어부’ 그 상상의 기능 


세상을 살며 담당하는 책무는 벗어나기 어렵고, 쉬이 벗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대제학 서거정이 ‘어부’를 노래할 뿐 어부가 되지 않았던 현실적 이유다. 대제학뿐인가. 새 왕조의 태종은 경복궁이 완성되자 기생에게 어부노래를 부르게 했다. 어부노래를 애써 다듬은 이현보는 76세까지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 속에 쓸쓸하게 앉은 저 ‘어부’! 그는 세상을 통치하던 이들이 상상으로 공유하던 존재였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격의 상징이었다. 옛 분들은 한결같이 그림 속 어부와 더불어 한가롭게 강호를 즐기겠노라 노래했다.  

‘어부’를 노래하는 그들의 심리가 단순하진 않았으리라. ‘어부’는 그 자체로 벼슬살이 고달픔의 반증일 수 있다. 혹은 드러낼 수 없는 권력자의 이면일 수 있다. 속마음은 청렴하다고 주장하고픈 관료들의 자기과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어라고 추적하든 분명한 것은, 마음의 수양을 추구하던 옛 시절 노력의 한 가지 방법이요, 정착된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 이 글의 ‘어부’는 고기를 낚지 않는 이상한 어부다. 즉 어부의 일반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특별명칭이기에 어부에 홑따옴표를 붙여‘어부’라 표기했다.)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


5.  김득신 ‘출문간월도’ - 개 짖는 소리가 어떻게 들리나요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보지도 않고 짖는 개처럼 속된 인간들 때문이다

▲  김득신의 ‘출문간월도’(종이에 옅은 채색, 25.3×22.8㎝) 개인 소장​

▲  신윤복의 ‘나월불폐’(25.3×16.0㎝) 간송미술관 소장​



# ‘잠부론’의 교훈 

한 마리 개가 어떤 모양(形)에 짖자,
백 마리 개가 그 소리(聲)에 짖는다.
一犬吠形, 百犬吠聲 - 왕부, ‘잠부론’

한 마리 개를 짖게 만든 것은 ‘형’(形)이다. 형은 외형이다. 그것은 겉모양이라, 실상을 알 수 없다. 한 마리 개는 그 모양이 이상하고 두려워서 짖었을 것이다. 백 마리 개는 한 마리 개의 짖는 소리(聲)를 듣고 짖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지만 실상을 본 것처럼 짖는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백 마리 개처럼 떠드는 사람들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의 왕부(王符)가 위 문구를 속담으로 기록하고 해설을 더했다. “세상에 이런 병이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옳고 그른 사정을 살피지 않는 것을, 나는 걱정하노라.” “형(形)이란 그림자”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 것은 한갓 그림자일 수 있다. 

위 속담이 실린 왕부의 책은 ‘잠부론’이다. ‘잠부(潛夫)’란 잠적한 사람이다. 움직이지 말아야 할 때 움직이면 흉하게 된다. 재주가 부족하거나 때가 적절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를 멈추고 기다림이 상책이다. 이러한 때를 일러 ‘잠(潛)’이라고 ‘주역’에서 칭하였다. 왕부는 스스로를 ‘잠부’라 부르면서 세상의 속된 일을 기롱하여 ‘잠부론’을 저술했다.    

# ‘잠부론’을 아낀 조선의 선비들 

‘잠부론’은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고전의 대열에 올려놓고 아껴 읽은 책이다. 성균관박사에 오른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이 높았던 여대로(1552~1619)가 ‘잠부론’의 속담을 다시 옮겼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한꺼번에 천백 마리 개가 짖네.  
개들은 무엇 때문에 짖나? 
한갓 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보지 않았거늘.  
一犬吠, 二犬吠, 一時吠千百.  
群吠爲何物. 徒耳不以目.

- 여대로, ‘개 짖음을 듣노라’(聞犬吠)

여대로는 덧붙였다.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얼러주고 싶지만, 이놈들이 측간까지 쫓아올까 걱정이로다!” 시끄러워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속된 인간들은 가르치기도 다스리기도 어렵다. 

# 개 같은 사람들

우리 옛말에 ‘개’가 붙으면 천한 것이다. 지천의 개나리, 먹지 못하는 개살구와 개머루, 쓸데없는 개꿈 등. 요즈음 쓰는 말로 개망신, 개수작, 개죽음 등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은 개에게 비루한 시기심(猜)이 있어 해를 보고 눈을 보고 짖는다고 하고, 시기심이란 모든 악(惡)의 근원이라 경계하였다. 조선후기 학자 위백규(1727~1798)는 개가 비천한 이유와 개 같은 사람의 속성을 말했다. 

개는 도둑을 잡고자 짖어야 하거늘, 
개 중에는 제대로 짖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  
관복을 차려 입은 손님이 오셨는데 짖고,  
달이 밝게 떴는데 짖고,  
눈이 하얗게 왔는데 짖는다.  
이런 개는 지극히 천한 녀석이다.  
사람 중에 떠들고 화내기를 좋아하고 변덕이 심하면  
이 또한 천박한 사람이다.

- 위백규, ‘격물설’ 

시기하여 짖는 개, 쓸데없이 짖는 개는 비천한 개다. 사람도 그러하다. 개 같은 사람이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시기하지 말라. 모르면 호들갑 떨지 말라. 화내기 전에 혹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 개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 패러디의 마력  

‘패러디’란 이미 있는 말과 생각을 사용하면서 그 본래의 뜻을 변형시키는 유희이다. 알던 것을 변화시키면, 새로 만든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옛 그림과 시문에 맛깔스러운 패러디가 많다. 패러디를 거치면, 말의 뜻이 달라지고 생각이 뒤집힌다.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득신(1754~1822)의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 문을 열고 달을 보다)’를 보면, 한나라 속담의 교훈적 언어가 장난스럽게 변화되어 있다. 그림 왼편에 앉은 개를 보라. 입을 크게 벌리고 컹컹 짖는다. 그 위에 적힌 글은 ‘잠부론’의 교훈어투 그대로인데 개 짖는 사연이 사뭇 다르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만 마리 개가 이 한 마리 개를 따라 짖네. 
동자를 불러 문 밖으로 나가 보라 하니, 
“달님이 오동나무 제일 높은 가지에 걸려 있어요!” 
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呼童出門看, 月??梧桐第一枝.  

이를 말하는 인물은 가옥 안의 선비이다. 선비의 심부름에 나와 선 동자가 그림에 등장했다. 동자가 살펴보니 아무 일도 없다. 오동나무 저 끝에 달님만 둥실. 동자는 우두커니 섰다. 그렇다면 개도 달을 보고 짖었을 테지. 그것은 달빛에 어른대는 오동잎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잠부론’에서 짖어대던 개를 달빛 아래 천진스러운 개로 바꾸어 부른 이 노래는 패러디이다. 이러한 노래문화는 적어도 조선중기에 정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전(1567~1664)의 문집을 보면, 그가 13세에 지었다는 한시 한 편이 위 그림의 제발과 매우 흡사하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세 마리 개도 따라 짖네. 사람일까? 호랑이일까? 바람소릴까? 동자가 말하네. 달이 산 위에 올라 등불 같고요, 뜰의 반에는 추운 오동만 버석거려요!”(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人乎虎乎風聲乎. 童言山外月如燭, 半庭唯有鳴寒梧.)

어린 소년 이경전이 그 당시의 노래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 노래는 오래도록 전해졌다. 조선후기 김득신의 그림 위에 다시 적힌 사연이다.

그림을 보라. 짖는 개가 귀엽고 동자는 순진하다. 고개 들어 둥근 달을 바라보는 한가로움. 함께 사는 선비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 맘이 이렇게 한결 같아도, 어리석은 부화뇌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한 마리가 짖자 만 마리가 짖는다는 말은 같지만, 뜻은 완전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패러디의 마력이 이것이다. 한 마리가 짖자 만 마리가 짖는데, 달을 보고 짖는다니 재미있고 기분 좋다. 개 짖는 소리는 달밤의 운치로 울리면서 그림 보는 우리를 달빛으로 인도해준다.      

# 반갑고 복스러운 개  

개라는 동물은, 사실상 얼마나 다정한 인간의 동반자인가. 쓸쓸한 시골집의 개 짖는 소리라면 상상만 해보아도 마음이 훈훈하다. 소리의 활기참이 좋고 기다리던 사람일까 설레니 좋다.

그뿐인가. 집집마다 개가 짖고 닭이 울어야 살 만한 마을이다. 5세기에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꿈꿀 때 그곳에 개와 닭의 울음이 들린다고 했다. 도원의 넉넉한 경제사정을 효과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다.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는 이미 ‘노자’로부터 농경 유토피아의 절대조건으로 통하고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요 먹거리였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좋아했던 송나라의 소동파는 달 보고 짖는 개를 일러 ‘영방(靈尨)’이라 불렀다. ‘영방’이란 신령스러운 삽살개다. 우리 선비들도 달 보고 짖는 개를 신선의 개라 하여 영방, 천방(天尨) 혹은 선방(仙尨)이라 불렀다.

하늘 보고 짖는 모습이 신선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리라. 촌방(村尨), 즉 촌마을의 삽살이도 달을 보며 짖으면 그 모습이 신선개로 보였으리라. 개가 할 일 없어 하늘 보고 짖는 마을, 사람도 덩달아 신선되는 기분이다.

황색 누런 개가 황금빛 달을 바라보고 짖는 것은 더욱 좋게 보았다. 옛 점성가는 ‘금구폐월(金狗吠月)’의 별자리를 말했다. 금빛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뜻이다. 옛 풍수가는 땅의 생김새를 보아 온갖 이름을 붙였는데, ‘황방폐월’(黃尨吠月)의 땅모양도 중시하였다. ‘황방폐월형’이라 하면, 머리를 치켜들고 짖는 개의 형상을 가진 땅이며, 복된 길지였다.   

# 오동 추! 

‘출문간월도’를 다시 보자. 화면에서 가장 큰 물상이 무엇인가. 화면을 가로질러 우뚝 자란 나무 한 그루, 오동(梧桐)이다. 이 오동이 없었다면, 장담컨대 이 그림은 한국회화사 수작으로 꼽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화가는 과감하게 먹물을 베풀어 오동잎을 그렸고, 옛 노래는 오동에 달이 걸렸다고 노래했다. 왜 하필 오동일까.  

‘장자’에 이르기를, 오동나무 아니면 봉황새가 내려앉지 않는다고 했다. 봉황은 태평한 시절에만 세상에 나타나는 환상의 새다. 상서로운 봉황이 가려 앉는 나무라 하여, 오동은 나무 중에 으뜸으로 우대되었다. 줄기 푸른 벽오동이면 더욱 좋다. 오동은 또한 거문고를 만드는 목재였다. 가을에 바람 불어 오동잎이 서걱대면, 그것이 봉황의 곡조 혹은 거문고의 연주라 읊어졌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뜨락에 오동을 심고자 했다. 그림 속 오동나무는 장대하고 무성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든든하고 시원하게 해준다. 오동나무를 가꾸는 가옥 안의 선비도 그런 인격이라고 암시해준다.

오동에 무서리가 내리면 그 모습이 남다르다. 커다란 오동잎이 떨어지면서 사람들 가슴속에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온다. 오동에 서리 내리고 달이 매달리면, 조선후기 사람들 혀끝에 뱅글뱅글 노랫말이 맴돌았다.

오동 추(秋)에 밝은 달을 그리는 ‘오동추야가’(梧桐秋夜歌, 오동잎 시드는 가을밤 노래)다. ‘오동추야가’는 그 시절의 인기곡으로, 중국 갔던 사신들이 무사히 당도하면 접대의 연회에서 즐겨 불리던 노래이다.  

# 그림의 선비는 노래로 그리던 분 

이 작은 그림 ‘출문간월도’에는 개 짖음의 교훈과 시정이 어울려 담겨 있다.

선비라면 마땅히 개 짖는 소리에 ‘잠부론’을 떠올릴 일이다. 한 마리 개, 백 마리 개, 저들이 왜 짖는가. 옷깃을 여미고 시끄러운 세속을 경계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개에 대한 애정과 인정이 교훈 너머로 흘러넘친다. 아, 우리 누렁이 달을 보고 짖었구나. 오동나무에 달이 걸렸으니!

세상만사는 마음먹은 대로 보이기 마련이다. 세상에 염증을 느낄 때는, 개 짖는 소리가 듣기 싫다. 덩달아 짖는 소리는 사람들의 시비소리 같아 더욱 싫다. 개는 개라서 싫고, 사람은 개를 닮아서 싫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알게 된다. 개가 무슨 잘못인가. 짖는 소리가 반갑고, 덩달아 짖는 소리가 다정하다. 개를 일러 비루하다 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조롱하는 곡진한 가르침이었다.

개들의 달밤 합창이 한 차례 지나가면, 고요가 찾아들고 달이 기울 것이다. 신윤복이 그렸다고 전하는 ‘나월불폐(蘿月不吠, 넝쿨 속에 달이 뜨고 개는 짖지 않네)’란 그림이 있다. 작은 비단그림이다. 달빛 아래 앉은 개가 사색에 잠긴 듯 조용하다. 짖어 보니 달빛이라, 충실하고 착한 개는 묵묵히 홀로 깨어 밤을 지킨다. 어느 선비집의 추워지는 뜨락이리라.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


​6. 조속 ‘금궤도’ - 훌륭한 지도자와 평화로운 나라를 염원합니다


▲  조속의 ‘금궤도’(비단에 채색, 105.5×56.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비단에 채색, 110.9×6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했고 북녘 오랑캐의 기세로 혼란스러운 상황. 이때, 조선의 왕실에서는 옛 신라의 전설적인 한순간을 커다란 화폭에 담았다.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하늘의 축복, 새 지도자의 생명이 붉은 끈에 매어져 하강하는 순간이다. 그림의 제목은 ‘금궤도’다.



 # 금궤!

‘금궤(金櫃)’는 황금도색의 나무궤짝이다. 그림의 한가운데 위치한다. 크고 번듯한 상자에 정교한 자물쇠 장식이 얼핏 봐도 그 존재가 예사롭지 않다.

흰색 수탉이 소리쳐 운다. 금궤의 등장을 세상에 알림이다. 새벽이 들고 어둠이 물러난다. 금궤를 매달고 선 나무를 보라. 무성한 잎들이 아침 햇살에 흰 꽃으로 빛난다. 안개가 밀려나며 드러나는 청록의 산수. 금궤의 황금빛과 영험함을 부각시켜 준다.

영험한 궤짝이라니, 혹자는 미국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화두였던 성궤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신의 권력으로 축복이 보장되는 궤짝. 민족의 미래를 보장하는 측량할 수 없는 은총. 그것의 소유를 소망한 이유이다. 이 그림 속 금궤의 의미와 기능도 사실상 그러하다. 하늘이 내린 축복의 약속이며 만백성의 바람이다.

그림 속 금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전한다. 금궤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다. 이 아이의 후손에서 신라의 왕들이 날 것이며, 다른 왕조가 누리지 못했던 영광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 김알지, 신라 김 씨 왕의 시조가 되다  

그림을 보면, 금궤로 도달한 인물이 있다. 신라의 4대왕 석탈해(昔脫解·기원전 19년∼기원후 80년)다. 보위하는 황색 의장부채가 그의 고귀한 신분을 표시한다. 석탈해는 금궤를 열어보고 기뻐했다.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로다!  

금궤에서 나온 아이는 남달리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다. 석탈해는 아이의 이름을 김알지라 했다. 지략이 많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김(金)’이라 한 것이다. 김알지. 우리나라 김 씨의 시조로도 알려지는 이름이다.  

김알지의 7대손이 석 씨 왕조를 계승해 신라왕이 되었다. 미추왕이다. 미추왕은 살아서 성군이었고 죽어서 혼령이 되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왔다. 미추왕의 혼령이 김유신 장군과 교유했다는 신비로운 일화가 기록으로 전한다.

요컨대, 금궤에서 김알지가 나왔고, 김알지에서 미추왕이 나왔고, 미추왕으로부터 김 씨 왕조가 세워졌고, 김 씨 왕조는 신라를 다스리고 삼국을 통일했다.

# 하늘(天)이 내려주시다

사람의 몸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의 궤짝에서 나왔다는 이런 식의 이야기는, 사실상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로, 지배권력의 탄생에 대한 정치적 신비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믿음 속에서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하늘이 내렸다는 태생의 신비는 김알지만의 것이 물론 아니다. 삼국시대 왕의 시조들은 대략 그 태생이 유별나다. 고구려 고주몽이 알에서 나왔고, 신라의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고, 가야국 수로왕이 금합 속 황금알에서 나왔다. 이 그림 속 금궤를 발견한 신라왕 석탈해도 궤짝에서 나온 인물이라, 그 이름이 탈해(脫解)다.  

수로왕의 신화를 다시 보면, 금합이 붉은 줄에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자승(紫繩)이라 부른다. 김알지의 금궤를 설명하는 ‘삼국사기’에는 자색구름 자운(紫雲)이 흩어졌다고 한다. 자색구름은 하늘이 상서로운 일을 보일 때 나타나는 고대적 발상이다. 그림 속 금궤가 붉은 끈으로 매어져 있다. 하늘의 적극적 개입을 표시하는 이미지다.  

조선시대 왕의 도장 어보(御寶)를 보았다면 기억할 것이다. 어보는 금색 거북 모양이 주를 이루는데 거북등에 예외 없이 붉고 굵은 끈이 달려 있다. 이 붉은 끈은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권력을 뜻한다. ‘자승’의 유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이 내려야 정당한 권력이라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한나라 즉 고조선시대로부터 정착된 오래된 사고방식이다. 이 때문에 권력층은 그들의 권력이 하늘이 내려준 것이란 표징을 제시하고자 가련한 노력을 멈출 수 없었다.  

#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어명으로 그려졌다 

‘금궤도’의 윗부분에 글이 적혀 있다. 

어제(御製·왕이 짓다)  
이것은 신라 경순왕 김부의 시조로, 
금궤 속에서 얻었기에 김 씨 성이 됐다는 내용이다.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우니, 
그것을 보고 가져오게 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으며,  
석 씨를 계승해 신라왕이 되었다.  
그 후손 경순왕이 고려로 들자,  
그가 순순히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경순이란 시호를 내렸다. 

때는 을해년(1635) 다음 해의 봄,  
명하기를 그림을 그려 삼국의 역사를 보이라 하셨다.  
이조판서 신 김익희(金益熙)가 명을 받들어 쓰고,  
장령 신 조속(趙涑)이 명을 받들어 그렸다. 

御製 
此新羅敬順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掛于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順來, 諡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吏曹判書 臣 金益熙 奉敎書, 
掌令 臣 趙涑 奉敎繕繪. 

이 글의 내용을 보면, 어제와 제작 상황이 나뉘어 있다.  

‘어제’를 먼저 보면, 통일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그의 시조 김알지가 한 가닥으로 엮여 있다. 김알지가 나온 뒤 오랜 계승을 거쳐 경순왕에 이르렀고, 신라의 국운이 기울었다.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해 백성의 안전을 도모했다. ‘금궤도’의 화면은 김알지 하강의 순간만을 포착했지만, 왕이 요구한 주제는 김알지의 혈통이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오랜 서사였다.  

그 아래 제작 상황이 난해하다. ‘을해년 다음 해’에 왕이 그리라고 했다는 표현방식부터 그러하다. 을해년 다음 해는 병자년 즉 1636년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이 사무쳐 병자년이란 말을 피한 것이다. 그런데 ‘봄’이라 했으니 병자년 ‘겨울’에 맞은 치욕에서 한참 이전이다.

그림이 제작된 당시에 적었다면 이렇게 적었을 리 만무하다. 굳이 병자년을 피해 쓴 것을 볼 때, 그림 위의 글이 병자호란 이후에 적혀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김익희(1610∼1656)가 이조판서가 된 것은 그의 말년(1656년)이다. 그렇다면 그림 위의 글은 ‘적어도 1656년 이후’로 밀려난다.  

지금 보는 이 그림의 글이 이렇듯 후대에 적혀진 것이라면, 그림은 어떠할까. 인조 때의 제작품이 후대의 왕실에서 모사되고, 글은 모사된 시점에서 새로 적은 것이 아닐까. 아직 학계의 진지한 검토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 이에 대한 추정은 여기서 접어 두고자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김알지 탄생의 신비로운 순간이 병자년 봄 인조의 명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그 후 수십 년 뒤 조선왕실에서 이 그림에 대해 다시 글을 쓰고 기렸다는 것.  

# 왕실의 영광과 평화를 기원하다  

이 그림이 원래 제작된 시기 1636년 봄은 역사상 절묘한 시점이다. 그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어지는 1637년 정초의 한파 속에서 인조가 겪은 삼전도 치욕을 생각하면, 그 분통에 숨진 이들을 생각하면, 1636년의 봄은 그들에게 마지막 봄이었다.

그러나 따사로운 봄은 결코 아니었다. 왜란과 정묘호란으로 나라는 쑥대밭이었다. 강해지는 후금(後金·이후 청나라가 됨)의 등쌀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었고 학자들은 명분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조선왕실은 중국대륙의 실제상황을 파악하는 정보력이 부족했다. 국왕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터라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 과정이 어려웠다.

인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1636년 봄 당시, 왕실에서는 왕후의 죽음으로 국상의 절차가 시끄러웠고 곧 태어날 원손이 기다려지는 시점이었다. 인조가 고대 신라의 영광과 평화를 기원했던 사정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다.  


‘금궤도’를 그리게 한 뒤, 인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힘든 고비를 넘어가야 했다. 오랑캐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황폐한 국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역경이었다. 청 황실은 점점 강성해졌다. 수십 년 뒤, 조선왕실은 청나라를 무찌르겠노라는 북벌론의 환상을 붙들어 세우면서, 이 그림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하늘이 내려주신 황금빛 궤짝에 새벽 햇빛이 비친다. 이 나라를 이끌어줄 생명과 힘에 대한 기원, 평화로운 역사의 보장을 기도하는 간절함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러한 염원으로 이 나라를 이끌겠노라는 왕실의 자기표현이었다.  

김알지의 왕조는 석 씨 왕조로부터 인정받아 왕권을 인계받았고, 그 후손은 고려로 왕위를 인도했다. 김 씨 왕조는 통일 왕조의 영광을 차지한 왕조이자 평화로운 왕위계승을 누린 왕조였기에, 그 시조 김알지의 탄생을 빌려 왕실의 영광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음 직하다. 

# 좋은 지도자가 나셨다. 짝짝!  

훌륭한 지도자와 평화로운 번영에 대한 바람이 표현된 조선왕실의 그림으로 ‘진단타려도(陳?H墮驢圖·진단이 나귀에서 떨어지다)’가 있어 함께 감상할 만하다. 진단(陳?H·872∼989)은 중국 북송대의 은일자이다. 그의 은일 방법은 오랜 수면이다. 몇 달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니, 왕이 찾아가도 그를 만날 도리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잘 수 있느냐. 명대 서적 ‘준생팔전’에는, 믿거나 말거나, 진단의 수면방법 및 수면포즈가 소개돼 있다. ‘진단타려도’에는 수면의 달인 진단이 웬일로 나귀에서 떨어지고 있다. 무슨 일인가.  

그 위에 적혀 있는 숙종의 어제가 이러하다. ‘회이 선생(진단)이 무슨 일로 갑작스레 안장에서 떨어지나. 취하거나 졸아서가 아니라오, 특별하게 기뻐서라오. 혐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고 참된 임금 나셨다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송나라 태조(조광윤)가 왕위에 오르자 진단은 기쁨에 못 이겨 짝짝! 손뼉을 치다가 나귀에서 꽈당! 미끄러진다. 그래도 진단의 마음은 여전히 기쁘다.

여기 소개한 두 폭 그림은 화사한 안료에 필치가 매우 공묘하다. 전형적인 화원(畵員)의 화풍이다. 그런데 그린 이는 각각 조속(1595∼1668)과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 전하고 있다. 조선의 대표적 문인화가 이름들이다. 실상은 왕실이 후원해 실력파 화원의 공력으로 제작된 그림들이었으리라.

우리는 지금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앞두고 있다. 그것이 하늘의 축복처럼 믿을 만하고, 넘어져도 좋을 만큼 기쁜 소식이기를! 옛 그림 속 인물의 마음으로 기원할 때이다.

​[출처] 고연희 미술사학자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게 말을 걸다>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