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그림을 만나다 Ⅳ
어진(御眞), 초원(蕉園),조경단(肇慶壇),서얼화(庶孼畵),유리창(琉璃廠),
17. 불멸의 초상, 어진 -화염 속으로 사라진, 그리고 잊힌 왕의 초상화 [御眞]
조선의 왕실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그림은 무엇일까? 아마도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이 아닐까 싶다. 어진만큼 군신(君臣)이 함께 논의하며 공력을 들인 그림이 또 있을까? 경험 많은 최고 수준의 화가에게 그림을 맡겼고, 왕과 신하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완성의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역대 임금의 실존적 모습을 담은 어진. 단연 조선 왕조의 주요 표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진은 우리에게 그만큼 깊은 존재감을 주지 못했다. 현존하는 어진이 불과 몇 점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도 잘 알려지지 못한 탓이다. 우리 문화사에 빛나는 초상예술의 결정체라 할 그 많은 어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약 60여 년 전 화재의 현장을 담은 한 장의 사진에 함축된다. 문화재의 망실(亡失: 잃어버려 없어짐)은 그 가치만큼이나 역사의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저 사진 속의 화재가 있던 날이 그랬다.(그림 1) 너무 오랫동안 잊혀온 참담한 어진의 실상, 이 한 장의 사진은 어진의 마지막 역사와 남겨진 흔적들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준다.
그림 1 어진의 보관처가 있던 부산 용두산 화재 장면(1954년 12월 10일).
1954년의 부산 화재와 어진의 소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건물을 진전(眞殿)이라 한다. 조선 왕조의 진전은 숙종 대부터 본격적인 정비와 관리가 이루어져 어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영희전(永禧殿) 등에 진전이 증축되고 어진이 걸렸다. 이처럼 어진의 전통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까지 진전을 통해 유지되고 거듭났다. 그러나 1908년 7월, 일제 통감부는 진전의 통합 관리를 명분으로 여러 처소에 있던 어진을 창덕궁의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기게 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는 창덕궁에 신선원전(新璿源殿)을 지어 구선원전 등에 있던 나머지 어진을 모두 옮겨와 총 11임금의 어진이 이곳에 봉안되었다.(그림 2) 이는 왕실의 의례문화를 축소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림 2 창덕궁 신선원전의 내부(2008년).
1950년의 한국전쟁 초기, 각 궁궐에 있던 유물은 포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창덕궁 내의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은 신선원전의 어진을 비롯한 상당수의 왕실 유물을 비밀리에 부산으로 옮겼다. 그 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이 1950년 11월경 부산으로 옮겨진 것을 보면, 창덕궁의 왕실 유물도 이 무렵에 이송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선원전을 떠난 어진은 부산시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釜山國樂院) 내 벽돌식 창고 건물에 임시로 보관되었다. ‘창고’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전쟁의 와중이긴 하지만, 굳이 창고밖에 없었을까?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휴전을 맺을 때까지 대부분의 유물은 온전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어진을 비롯한 유물을 서울로 옮기기 위한 계획을 세우던 무렵 예측지 못한 불행이 그 행로를 막았다.
1954년 12월 10일 새벽, 어진이 보관된 용두산 일대의 동광동 피난민 판자촌에 화재가 발생했다.(그림 4) 때마침 불어닥친 강풍으로 인해 불길은 판자촌을 전소시키고, 순식간에 어진이 있던 창고로 번졌다. 엄청난 화재의 위세에 어진을 포함한 왕실 유물은 속수무책으로 불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일보(1954. 12. 10.)의 보도에 따르면, 이 화재로 어진을 포함한 약 3,400여 점의 궁중 유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날 거기에 있던 3천여 점이 넘는 유물은 목록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로 화염 속에 묻혔다. 안전지대로 믿었던 부산의 보관처는 끝내 유물의 안전을 지키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건져낸 어진은 불과 7점 정도였다. 조선 왕조의 어진은 그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림 4 화재 직전의 동광동 용두산 일대의 판자촌. 어진이 보관된 부산국악원이 이 근처에 있었다. |
어진의 소실(燒失)과 관련하여 가장 궁금한 것은 당시의 화재 현장에 몇 점의 어진이 남아 있었나 하는 점이다. 이를 알려주는 당시의 조사 기록이나 보고서는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구황실재산관리총국에 관련 기록이 있었겠지만, 1960년 7월에 의문의 화재로 인해 서류 일체가 불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진의 가치를 가늠하고 역사의 교훈을 위해서는 사라진 어진의 현황만큼은 파악되어야 한다. 1955년 1월 6일자 경향신문(그림 3)에는 구황실재산관리총국과 치안국에서 화재로 소실된 어진이 “12대 임금 어진영(御眞影)”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 왕조 27대 임금 가운데 12대 임금의 어진만이 구한말까지 남아 있었고, 이 어진들이 부산으로 옮겨져 보관 창고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35년 신선원전 어진의 수리 과정을 기록한 [선원전 영정 수개 등록(璿源殿影幀修改謄錄)]에도 12개 감실에 있던 12대 임금의 어진이 모두 46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등록에 수록된 ‘어영정 수보공정 명세서(御影幀修補工程明細書)’에 적힌 12대 어진의 명칭과 수량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신선원전 어진 봉안 현황(1935년)
한 임금의 어진이 적게는 1점, 많게는 9점이나 되었다. 여러 봉안처의 어진을 모아놓았기에 동일한 복식을 한 사례가 많다. 익선관(翼善冠)본이 가장 많고, 면복(冕服), 원유관(遠遊冠), 군복 등을 착용한 어진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진 수리가 있던 1935년과 이듬해에 걸친 약 10개월간 세조와 원종(元宗) 어진의 이모(移模: 원본의 초상을 똑같이 베껴 그린 그림)가 있었다. 따라서 1936년에는 이 2점을 포함하여 모두 48점의 어진이 신선원전에 최종 봉안되었던 것이다. 1950년에 부산으로 옮겨진 어진은 바로 이 48점이 확실시되고, 부산의 현지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일괄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왕조 27대의 임금 모두가 어진을 남기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 대 이전의 어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은 봉안처가 궁궐 밖이었기에 이모본(移模本)과 원본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1936년 선원전에 최종 봉안되었던 어진 가운데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숙종 대 이후 임금의 어진에 해당한다.
화염 속에서 구해낸 어진
그림 5 〈태조 어진〉1900년 이모(移模), 비단에 채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954년 12월 10일의 부산 화재 현장에서 구해낸 6점의 어진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태조 어진〉(1900년 이모(移模)), 〈영조 어진〉(1900년 이모), 〈철종 어진〉(1861년), 〈순조 어진〉(1900년 이모), 〈익종 어진〉(1900년 이모) 등이며, 최근 공신도상(功臣圖像) 형식의 〈원종 어진〉(1936년 이모)이 오른쪽 부분이 손상된 채로 전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임금의 얼굴인 용안(龍顔)이 보존된 것은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 2점뿐이다. 나머지 어진은 용안이 훼손되고 전체의 절반 이상이 없어진 상태이다. 불탄 어진을 살펴보면, 족자로 말려 있던 상태로 불이 붙었고, 화면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불길이 번지는 도중에 건져내었음을 알게 된다. 다행히 어진의 오른쪽 상단에 표제(標題)가 붙어 있어 초상의 주인공을 식별할 수 있다. 만약 어진의 오른쪽부터 불길이 미쳤다면 표제가 타버려 어느 왕의 어진인지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태조 어진〉, 〈영조 어진〉과 〈철종 어진〉의 특징을 통해 당시 화재로 사라진 어진의 일면이나마 미루어 짐작해보자.
〈태조 어진〉은 용안을 포함한 화면의 왼편 3분의 2 정도가 화재로 훼손되었다.(그림 5) 1900년 윤8월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잃어버린 7임금의 어진을 복원하고자 그해 12월에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어진의 오른쪽 상단에 “光武四年(광무 4년) 庚子(경자, 1900) 移模(이모)”라 적혀 있다. 영흥 준원전(濬源殿)에 있던 1837년(헌종 3)의 이모본 태조 어진이 모사의 대본이었다. 그런데 태조 어진의 홍색 곤룡포가 생소하다. 잘 알려진 전주의 경기전(慶基殿)본은 청색이지 않은가? 1837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이모할 때, 헌종(憲宗)이 곤룡포의 색상을 홍색으로 바꾸어 그리도록 했다. 그것이 헌종 자신이 입고 있는 색상처럼 현실에 맞다는 이유였다. 훼손된 〈태조 어진〉의 홍색 곤룡포는 준원전본을 대본으로 그린 결과이다.
〈영조 어진〉도 1900년 경운궁의 화재로 망실된 자리에 걸고자 이모한 본이다.(그림 6) 어진의 왼편에 불길이 약간 스쳐간 자국이 있고, 오른편은 불을 끄는 와중에 물이 스며들어 표제의 붉은색이 화면에 묻어나 있다. 화재 당시의 급박했던 순간을 떠올려 주는 흔적들이다. 이모본의 대본이 된 것은 1744년(영조 20)에 그려 육상궁(毓祥宮)에 봉안했던 영조의 51세 반신상이다. 영조는 특별히 이 반신상 어진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신하들에게 꺼내 보이며 근래의 기쁜 일 중의 하나가 이 화상이 자신을 닮은 것이라 했다.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봉안할 그림이라 그랬을까? 그런데 영조는 자신이 50세를 넘어서까지 살게 되리라 확신하지 못했다. 이 육상궁 봉안본을 생의 마지막 초상이라 여긴 듯하다. 신하들에게 이 어진을 보일 때면 마치 자신을 대하듯 자신의 저술과 업적을 기억해주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후 30년을 더 살며, 10년마다 한 차례씩 어진을 그리는 전통과 기록을 세웠다.
그림 6 조석진ㆍ채용신 등, 〈영조 어진〉 부분.1900년 이모, 비단에 채색, 110.5×61.8㎝,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932호. | 그림 6-1 드라마 <이산>의 영조. <출처: 연합뉴스> |
〈영조 어진〉은 사극에 등장하는 영조의 가장 표준적인 이미지로 다뤄진다.(그림 6-1) 복식의 고증은 물론 냉철한 표정과 완고한 성격 등 내면의 분위기까지 이 〈영조 어진〉에서 실존적 근거를 찾는다. 어떻게 보면, 〈영조 어진〉은 아주 세련된 화법의 초상화라 할 수는 없다. 음영법을 적용한 세밀한 묘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주관화사(主管畫師)를 맡은 채용신(蔡龍臣)과 조석진(趙錫晉)이 원화를 충실히 이모했음을 말해준다. 그 때문인지 〈영조 어진〉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사실적 완성도보다 오히려 영조의 성정과 내면세계가 잔잔히 드러난 듯하다. 영조가 이 그림의 원본인 육상궁 봉안본[1744년 도사(圖寫)]을 흡족히 여기고 호평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그림 7 이한철ㆍ조중묵 등, 〈철종 어진〉.1861년, 비단에 채색, 202.2×107.2㎝,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1492호. | 그림 7-1 <철종 어진> 부분. |
1861년(철종 12)에 그린 군복본 〈철종 어진〉은 왼편 3분의 1 정도가 불타 없어진 상태다.(그림 7) 입술 부위에도 불길이 튀어 상처를 냈지만, 전체 용안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판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은 이 군복본 어진을 마주할 때면, 마치 대궐의 난간에서 임금의 말씀을 듣는 듯하다고 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실존감이 잘 살아난 초상이라는 말이다. 당시 주관화사인 이한철(李漢喆)이 용안을 그렸고, 7명의 이름난 화원들이 복식과 배경을 맡았기에 묘사가 극히 정교하고 치밀하다. 다만 눈동자를 유난히 크고 동그랗게 그린 부분이 좀 인상적이다.(그림 7-1) 물론 실제 모습대로 그렸겠지만, 불길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연상하게 하여 놀라움을 준다.
〈영조 어진〉이 영조 특유의 분위기와 외모를 잘 살린 초상이라면, 〈철종 어진〉은 용안과 복식 등의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다. 이는 어진을 포함한 초상화의 기본 요건인 ‘정신’과 ‘형상’의 두 요소가 어떻게 결합하며, 또 강조되었는가를 예시해주고 있다.
사진 속에 걸린 세조 어진
그림 8 세조 어진 모사 장면(1936년). | 그림 8-1 좌측 사진 속의 세조 어진. |
1936년 조선왕조에서는 세조(世祖, 1417~1468) 어진과 원종(元宗, 1580~1619, 인조의 아버지) 어진을 각 한 점씩 이모하였다. 당시의 이모 장면을 촬영한 흑백사진 한 장이 전한다.(그림 8) 사진 속의 화필을 잡은 이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알려진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이다. 사진에는 아무 기록이 없지만, 그가 마무리에 열중하는 초상은 세조 어진이다. 1872년(고종 9) 1월, 고종이 선원전의 세조 어진을 둘러보며 “옛날의 신발은 흰 가죽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 속의 임시 봉안 시설인 가당가(假唐家) 안에 걸린 어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그림 8-1) 희미한 상태지만, 흥미롭게도 어진은 흰색 가죽신인 백피혜(白皮鞋)를 신었다. 앞서 고종이 질문을 던진 어진이 바로 이 사진 속의 세조 어진이다.
그렇다면 사진 속에 걸린 구본(舊本) 세조 어진에는 어떤 사연이 감추어져 있을까? 1735년(영조 11) 7월, 영조는 신하들과 의논하여 영희전에 세조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모사의 원본은 세조가 살았을 때 그린, 3백 년이 넘은 어진이었다. 형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던 것이 모사를 하게 된 이유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어진은 모두 망실되었다고 했는데, 세조 어진의 원본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수난으로 얼룩진 전세(傳世: 대대로 전해짐)의 사연을 알아보자.
1468년(세조 14)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睿宗, 1450~1469)은 광릉(光陵)을 조성하고 능침사찰로 봉선사(奉先寺)를 중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생존 시에 그린 세조 어진 한 점을 봉안하였다. 이 세조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몇 차례나 사라질 위기를 넘겼다. 1593년(선조 26) 3월, 봉선사에 왜적이 주둔하자 승려 삼행(三行)과 광릉참봉이 봉선사로 잠입하여 세조 어진을 받들어 나왔고, 이를 의주의 행재소로 옮겼다고 한다. 전란이 끝난 뒤 다시 서울의 남별전에 봉안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의 영숭전(永崇殿)으로 세조 어진을 모셨지만, 1637년(인조 15) 2월 강도(江都)가 함락될 때 어진을 분실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이내 성 밖에서 극적으로 찾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세조 어진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중수(重修: 건축물을 손질하여 고침)를 마친 남별전에 다시 봉안되었다. 이후 새로 이모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약간의 보수만 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영조는 세조 어진의 이모를 앞두고 “300년을 봉안해온 영정이 하루아침에 훼손되고 나면 바라보고 정리(情理: 인정과 도리)를 펼 곳이 없게 된다”고 했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심하게 망가진 세조 어진을 처음 이모한 것은 1735년(영조 11)이다. 이때 이모한 세조 어진이 바로 사진 속 가당가(假唐家) 안에 걸린 초상이다. 이 어진은 조선 초기 어진의 원본 형식을 담고 있어 희미한 사진 상태만으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영조는 유난히 〈세조 어진〉에 관심이 많았다. 1735년 9월 10일, 영조가 완성된 이모본 세조 어진을 살펴본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영조의 관심은 용안에 집중되었고, 몇 가지 보완할 점을 화사 이치()에게 지시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용안의 눈동자와 눈썹의 끝이 희미하니 먹을 더 올릴 것, 오른쪽 볼에 닳은 듯한 자국을 없앨 것, 용안에 흰색기가 많으니 홍색조를 더 채색할 것, 볼 아래에 채색이 약하니 가채할 것 등을 명하였다. 안경을 쓴 이치가 시력에 자신없어하자 수종화사 장득만(張得萬)이 붓을 잡아 성공적으로 수정을 마쳤다. 영조는 대단히 기뻐하며 다행스러운 일이라 했다. 완성된 어진에 이처럼 보정을 가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위험이 따르는 일이지만, 영조는 세심한 자신의 판단을 양보하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본 세조 어진은 정면의 모습을 취한 점, 앉은 의자가 교의자(交椅子)인 점, 소매가 좁은 축수형(縮袖形)의 곤룡포, 바닥의 채전(彩氈) 문양, 어진 좌우에 걸쳐진 유소(流蘇)가 길게 드리워진 점 등이 주요 특징이다. 15세기 어진의 특색을 어렴풋하게나마 만나볼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이다. 세조 어진과 원종 어진은 한 점만이 전하는 유일본이어서 이모본의 제작이 왕가의 시급한 과제였다. 모사를 무사히 마친 화사 김은호에게 사례금 1,500엔, 상여금 100엔, 조수 장봉운에게는 수당 200엔, 상여금 20엔이 지급되었다.
사진으로 남은 순종 어진
그림 9 순종 어진 모사 장면(1936년). | 그림 10 김은호, 〈순종 어진〉1928년 이모, 비단에 채색. |
순종 어진과 관련된 사진은 2점이 전한다. 하나는 1928년 김은호가 순종(純宗, 1874~1926)의 어진을 모사하는 장면이고,(그림 9) 다른 하나는 완성된 순종 어진의 사진이다.(그림 10) [순종실록 부록] 1928년 7월 6일 조에는 어진을 선원전에 봉안한 기록이 있다. 또한 순종 어진의 모사 과정을 기록한 <어진 모사 급 봉안 일기(御眞摹寫及奉安日記)>(1928)가 남아 있어 더 자세한 사실을 고증해낼 수 있다.
순종은 재위 기간(1907~1910)에 1점의 어진도 남기지 못했다. 순종이 29세(1902) 때인 황태자 시절에 그린 초상은 많지만, 이를 어진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1928년의 순종 어진은 무엇에 근거하여 그린 것일까? 1909년(36세)에 군복을 입고 촬영한 순종의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모사의 범본(範本: 본보기)으로 삼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에서 순종의 얼굴만을 취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황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한 모습으로 바꾸어 그렸다.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신선원전에 봉안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종 어진〉은 순종이 승하한 이후에 모사한 것이지만, 사진을 통해 얼굴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순종 어진〉은 신선원전에 봉안되었으나, 1954년의 화재 현장을 끝내 피해 나오지 못했다.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은 마지막 황제의 초상이다.
글을 맺으며
화재만큼 우리 문화재를 허망하게 만든 악재는 없을 것이다. 가까이는 수년 전 숭례문의 실화를 통해 경험했듯이 화마는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만을 남긴다. 특히 어진은 역대 임금의 실존적 모습을 담은 초상화이기에 그것의 망실은 더욱 큰 아쉬움으로 각인된다.
12대 임금의 어진 48점 가운데, 어진이 아닌 〈연잉군 초상〉 한 점을 더한 7점이 1954년 12월 부산 화재의 현장에서 구해졌고, 나머지 41점의 어진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1935년에 작성된 ‘어영정 수보공정 명세서’를 토대로 파악한 어진 48점의 제작 시기를 각 왕대별로 추적해보면, 각 어진이 그려진 도사와 이모의 시점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48점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그린 숙종의 소본(小本) 익선관본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린 것은 1928년에 그린 순종 어진이고, 이모본으로는 1936년에 그린 세조와 원종 어진이 있다. 화재 이전에 남아 있던 48점의 어진이 지닌 역사와 내력을 추적해 보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한국전쟁으로 신선원전을 떠난 어진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왕조의 어진이 멸실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화재 현장에서 구한 〈영조 어진〉, 〈철종 어진〉 등이 남아 있고, 어진의 도사(圖寫)와 이모(移模)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 어진 화사에 대한 사료, 또한 그들이 남긴 수준 높은 사대부 초상들이 전한다. 이러한 수많은 관련 기록은 왕과 신하, 그리고 화사들 간에 이루어진 그 치밀하고도 생생한 어진 도화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준다. 이처럼 어진의 공백을 메워주는 방대한 기록 유산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초상화의 전통은 조선 왕조의 어진을 여전히 잊힐 수 없는 ‘불멸의 초상’으로 남아 있게 한다.
[출처] :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불멸의 초상, 어진 [御眞]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네이버 지식백과]
18. 김석신(金碩臣)과 이수민(李壽民)
- ‘초원(蕉園)’이라는 동일한 호를 사용한 두 화원(畵員)
김석신(金碩臣, 1758~?)과 이수민(李壽民, 1783~1839)은 조선 후기의 화원(畵員)으로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초원(蕉園)’이라는 동일한 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세창(吳世昌) 선생 같은 한국회화사의 개척자를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이 착각과 오해를 계속해왔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초원’의 작품들을 보며 자주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던 차에 그동안 소개된 자료들을 검토하여 착오와 혼란을 정리하고자 한다.
김석신과 이수민은 누구인가?
김석신은 자가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으로 개성 출신이다. 화원으로서 부사과라는 관직을 지냈으며, 김응리(金應履)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유명한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동생이자 김양신(金良臣, ?~?)의 형이기도 하다. 단원 김홍도(金弘道)의 선배였던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이 김석신의 백부였는데 나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 김화종(金和鍾)도 화원이다. 유명한 초상화가 이명기(李命基)와 어해화(魚蟹畵)로 이름 높은 장한종(張漢宗)은 그의 매형이다.
화원으로서 그의 활약은 문헌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59세 때인 1816년에 장헌세자빈 국장(國葬)에 따른 빈궁혼궁도감(殯宮魂宮都監) 혼궁(魂宮) 수리소에 근무한 것만 확인된다. 그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것은 〈도봉도(道峯圖)〉로 도봉산과 도봉서원 일대의 실경을 겸재 정선(鄭敾) 풍의 활달한 필묵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표제를 참조하면 당대의 명류(名流: 유명인사)였던 이재학(李在學)과 서용보(徐龍輔)가 도봉산을 산책할 때 만든 〈도봉첩(道峯帖)〉에 속했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재학은 판서, 서용보는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니 두 사람의 행적을 조사하면 이 작품의 제작 연대부터 행적까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수민은 자가 군선(君先), 호는 초원(蕉園)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아쉽게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그의 자를 ‘용선(容先)’으로 잘못 적은 까닭에 현재까지 답습한 곳이 많다. 이수민도 화원으로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였으며, 순조 대에는 규장각 차비대령 화원을 지냈다. 조부 이성린(李聖麟, 1718~1777)과 부친 이종현, 형 이윤민도 화원이며, 역시 화원인 삼촌 이종근에게 양자로 출계(出系: 아들을 양자로 주어 그 집의 대를 잇게 함)하였다. 그리고 아들 이택록과 이의록도 화원이 되어, 3대 화원 집안을 이루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딸이 착각된 김석신의 손자 김제운과 혼인한 점이다.
그의 활약은 김석신에 비해 여러 자료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20세 때인 1802년에는 순조순원후가례도감(純祖純元后嘉禮都監)에 참여하였고, 29세 때인 1811년에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발탁되어 1835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1811년에 통신사행으로 대마도를 다녀왔으며, 이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외에도 여러 점 전한다. 또 신위(申緯, 1769~1847)의 기록에 의하면 30세 때인 1812년에는 주청사의 수행화원으로 연행(燕行)하였다. 48세 때인 1830년 4월 5일 자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순조어진 도사 참여 공로로 변장(邊將)에 제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착각 1, 오세창 선생이 이수민의 <신선도>를 김석신의 작품으로 오판하다
20세기 전반에는 회화 작품들이 제대로 발굴 또는 소개되지 않은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한국 회화사의 선구자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깊은 안목으로도 실수를 하였다. 1927년에 오세창 선생이 쓴 화제에서 이도영 구장의 이수민 필(筆) 〈신선도(神仙圖)〉를 김석신 작(作)으로 잘못 감정한 것이 그 예이다(그림 1).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이 작품은 1989년경 부산시립박물관에 전시되었고, 이미야가 쓴 [전 초원 김석신 필 〈신선도〉]([부산시립박물관연보] 11호, 1989)에 이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글에 인용된 번역문을 조금 수정하여 인용한다.
그림 1 이수민, 〈신선도(神仙圖)〉이도영 구장.
정가루(靜嘉樓) 주인이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말하기를, “탄월(灘月) 김군(金景源, 1901~1967)이 시장에서 얻었는데 그림이 좋아 그 사람에게 물으니 자세히 말해주는데 초원의 솜씨인 것 같다 합니다”라며, 그러나 확실하지 않아 내게 물어본다고 하였다. 내가 “감식안이 다르지 않구나”라고 하며 구장한 초원우객(蕉園羽客)의 〈취소도(吹簫圖)〉와 비교하여 보니 과연 형태와 의습, 필치가 같으므로 서로 보고 한번 웃으며 “좋구나”라고 하였다. 초원 김석신을 조사해보니 자가 군익이고 개성인이다. 그 형인 김득신도 역시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인물에 능해 대를 이어 화원에 봉직하였다. 초원이 숙부 김응환의 양자가 되었을 때, 단원 김홍도가 김응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다 하였다. 초원은 단원보다 두 살이 많아 항상 같이 어울리며 그림을 익혀 각기 한 기치를 세우니, 세상이 말하기를 세 사람(김응환, 김석신, 김홍도)이 솥발처럼 섰다고 하였다. 초원은 영조 무인년(1758) 생이니 지금부터 170년 전이다. 이 그림에는 관서나 인장이 없어 누구 작품인지 몰라 귀한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게 보존되었으니, 신물(神物)에는 스스로 보호자가 있는 것인가. 초원의 유묵은 이 그림을 보더라도 김득신, 김홍도보다 적으니 더욱 귀중하다 할 수 있으므로 몇 자 적어 돌려보낸다. 정묘년 소제석 위창노인 오세창 적다.
<strong><em></em></strong>
오세창 선생은 위 작품을 김석신 작으로 판단하면서, 그 근거로 소장하고 있던 초원의 〈취소도(吹簫圖)〉와의 화풍을 비교하였다. 지금은 이 〈취소도〉가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김석신이 아니라 이수민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수민의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간송미술관)이다. 〈좌수도해도〉는 〈신선도〉와 같은 해상신선도의 형식이며, 일렁이는 파도의 표현과 인물의 의습선 등 김홍도의 영향이 짙은 화풍을 보여준다. 또 〈좌수도해도〉에는 ‘초원’이라는 서명 아래에 ‘壽民(수민)’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 음각으로 새겨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림 2 이수민,〈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개인 소장.
한편 간송미술관에는 이수민의 다른 해상신선도인 〈해섬자도(海蟾子圖)〉도 소장되어 있어 더욱 증거를 보강해준다. 〈해섬자도〉도 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김홍도의 짙은 영향과 심사정의 일부 영향이 섞여 있는 공통점을 보여주며, 이수민의 〈좌수도해도〉와 거의 비슷한 도상의 다른 작품도 소개한 바 있다(그림 2). 이상의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오세창 선생은 김석신의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초원’이라는 호, 그리고 김석신이 김홍도의 또래로 김응환에게 함께 그림을 배웠다는 선입견 때문에 오판을 피하지 못했던 듯 보인다. 이런 오판의 배경에는 당시 김홍도의 생년이 1760년으로 잘못 알려진 상황도 한몫하였다. 즉, 1758년생인 김석신이 김홍도보다 두 살 연상으로 그림을 함께 배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김홍도는 1745년생으로 김석신보다 열세 살 연상이다.
오세창 선생의 착각은 그의 제자인 이도영에게 계승되었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21일 자에는 ‘조선고서화(朝鮮古書畵) 기십(其十)’이라는 제목하에 앞서 오세창 선생이 오판한 〈신선도〉의 사진을 수록하고, 그 아래 “초원 김석신 신선도―이도영 씨 구장”이라고 명기하였다. 앞서 오세창 선생이 ‘정가루(靜嘉樓) 주인’이라고 칭한 사람이 이도영이거나 그 주변 인물로 보이는데 이 점은 추후 확인이 요망된다. 어쨌든 오세창 선생에 이어 당대 고서화 감정에서 크게 활약한 이도영도 이 작품을 김석신의 것으로 오인하였음을 보여준다.
오세창 선생의 오판 근거, 즉 김석신이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이수민의 작품이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예가 이어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도 ‘김석신’ 조를 검색하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수민의 작품 〈좌수도해도〉가 김석신의 작품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그림 4 이수민, 〈고승한담(高僧閑談)〉개인 소장. | 그림 5 이수민, 〈쌍작〉개인 소장. |
공화랑에서 2007년 개최한 [구인의 명가 비장품전]의 도판 37-40에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화첩]도 이수민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고승한담(高僧閑談)〉, 〈소년행락(少年行樂)〉 등 산수와 인물, 그리고 〈쌍작(雙鵲)〉, 〈월죽(月竹)〉 두 폭이 소개되어 있다(그림 4, 5). 이 네 폭은 모두 김홍도 화풍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 작품들로 앞서 신선도와 같은 성격이며, 또한 ‘초원’이라는 관서의 필체와 ‘君先(군선)’이라는 이수민의 자가 분명히 찍혀 있다. 이처럼 이수민의 자가 분명한 도인이 찍혀 있는데도 김석신의 작품으로 전칭된 데에는 오세창 선생의 [근역서화징] 이수민 조에서 이수민의 자가 ‘容先(용선)’이라고 기재됐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화첩 중 〈고승한담〉과 〈월죽〉 두 점은 2011년 3월 마이아트옥션 1회 경매에서 역시 김석신의 작품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수민에 대한 오류가 답습되다
이수민에 대한 오류도 오세창 [근역서화징] 이수민 조에서 자 ‘君先’을 ‘容先’으로 오기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오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이수민’ 조에도 답습되었다. 한편 여기서는 이수민의 개인 소장 〈하일주연도〉를 간송미술관 소장으로 잘못 기록하기도 하였다. 근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역대서화가사전](011) ‘이수민’ 조에도 [근역서화징]의 오기가 답습되어 있다. 또한 유복열의 [한국회화대관](문교원, 1969) ‘이수민’ 조에는 초전(蕉田) 오순(吳珣, ?~?)의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 병풍〉 중 한 폭을 이수민 작품으로 잘못 소개하기도 했다.
위와 관련된 예로서 2011년 동산방에서 개최한 [옛 그림에의 향수] 전시 도록 도판 57에서 이수민의 노년작으로 소개된 〈춘야희우도(春夜喜雨圖)〉는 오순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작품에는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 1764~1844?)이 제시(題詩) 뒤에 “초로가 그리고 학산 늙은이가 제하다(蕉老寫 鶴翁題)”라고 적어서 도록에서는 이수민의 작품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윤제홍이 늘그막에 거의 한 세대나 나이가 어린 초원(蕉園) 이수민을 ‘초로(蕉老)’라고 지칭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의 작가를 초전(蕉田) 오순으로 보는 것이 여러모로 타당해 보인다. 즉, 오순은 19세기 전반 80세 가까이 생존하였으므로 연대상 맞고, 화풍상으로도 김홍도와 다소 거리가 먼 초연한 남종화풍을 구사한 점도 그와 일치한다.
아울러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김석신’ 조에는 어쩐 일인지 앞의 〈춘야희우도〉를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하였다. 아마 연대를 고려하여 ‘초로’를 김석신으로 본 듯한데, 앞서 언급했듯이 초전(蕉田) 오순의 화풍과 가깝고 김석신의 화풍과는 거리가 멀다.
김석신과 이수민와 화풍을 가름하니
김석신은 그의 대표작 〈도봉도〉를 통해 볼 때 겸재 정선의 과감한 필묵법과 적묵법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또한 활달하고 구애되지 않은 구도, 원산의 표현 등에는 양부 김응환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그림 6). 김석신의 이런 면모는 이동주 선생의 역저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서 ‘한강사경 4폭’으로 소개한 작품들에서도 드러난다. 이 네 폭 중 세 폭이 개인 소장 〈가고중류도(笳鼓中流圖)〉(그림 7)와 〈금호완춘(琴湖翫春)〉, 그리고 간송미술관 소장의 〈담담장락(澹澹張樂)〉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모두 ‘초원’ 서명과 ‘君翼(군익)’ 도인이 찍혀 있다. 또 성격이 비슷한 김석신의 작품인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압구청상도(鴨鷗凊賞圖)〉에도 ‘초원’ 서명과 ‘군익’ 인이 있으며 화풍과 서명이 모두 동일하다. 이들 작품을 통해 볼 때 김석신은 김응환의 양자로서 그의 형 김득신과 김홍도와 함께 활동했으나 화풍상으로는 정선이나 양부 김응환처럼 뚜렷한 남성적 개성을 지녔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초원’이라고 쓴 서명이 이수민과 김홍도의 우아한 여성적 필치에 비해 각이 진 남성적 필체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김석신의 작품으로 소개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 형 김득신의 작품임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조선후기 국보전]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 3〉(호암미술관, 1998. 7.) 도판 59로 소개된 바 있다. 의습 표현은 김득신의 〈노중상봉도〉, 〈짚신짜기〉, 〈강변회음도〉 등과 유사하고, 나무는 〈타작도〉 등과 유사하다. 그리고 화면 우측 상단에 찍힌 ‘김득신인’ 백문방인도 김득신의 〈긍재전신첩〉(간송미술관) 중 여러 폭에서 확인되는 도인이다.
이수민은 김석신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연하이다. 이수민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던 때에 김홍도는 이미 은퇴했지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김홍도의 영향은 18~19세기에 활약한 많은 화가에게서도 볼 수 있지만, 이수민의 경우 전기보다 후기에 김홍도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다. 이수민의 작품 중 29세 때인 1811년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작품들, 예를 들어 두암 김용두 기증품 중 〈수하독서도〉 같은 작품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는 하나 경직되고 진하고 뚜렷한 선묘가 특징적이다. 〈하경산수도〉 등 이 시기의 산수도에서도 아직 개성이 확립되지 못한 면을 볼 수 있다. 이런 면모는 1819년 37세 때 작인 〈하일아집도(夏日雅集圖)〉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그림 8). 비록 깔끔하게 정돈되기는 했으나 조심스러운 남종화풍의 구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좌수도해도〉를 비롯한 여러 점의 〈해상신선도〉, 그리고 김석신으로 잘못 비정된 [화첩] 속의 〈고승한담〉, 〈쌍작〉 등을 통해 자유롭고 능숙한 필묵법으로 김홍도 화풍의 특징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런 점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유연수금도(柳燕水禽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가 수양버들 나무 아래 헤엄치는 한 쌍의 오리를 그린 이 작품은 김홍도의 〈유당유압도(柳塘遊鴨圖)〉(간송미술관)와 비교해 볼 때 그 영향 관계가 분명하다. 요컨대 이수민은 대략 30대까지의 전기에서 당시의 남종화풍을 구사하며 김홍도의 영향을 일부 보이다가, 후기에는 김홍도 화풍을 풍부하게 수렴하여 자신의 원숙한 화풍을 이루었던 셈이다.
김석신과 이수민, 두 사람의 도화서 화원이 약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초원’이라는 같은 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별다른 이유가 없는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을 오인하고 착각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미술사를 위해 다행한 일이 결코 아니다. 두 사람의 화원은 화풍과 개성이 매우 다른 화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김석신은 주로 정선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남성적이고 활달한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린 반면, 이수민은 주로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시정(詩情)이 감도는 산수나 인물, 화조화 등을 자주 그렸다.
오랫동안 착각을 불러일으킨 두 사람의 관계가 이 글에서 분명히 가름될 수 있기를 다시 바란다.
[출처] : 진준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두관 < 김석신(金碩臣)과 이수민(李壽民)>'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19.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 조경단(肇慶壇) - 조선의 뿌리를 찾아서
조선 왕실의 시조, 이한
마태복음 1장의 첫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가 연속되다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이며,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로 마무리되는 문장 말이다.
[태조실록]의 총서를 보면 이와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제일 먼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국왕이 된 후 이단(李旦)으로 이름을 바꾼 것을 소개하고, 이한(李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안사(李安社)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여기에서 이안사는 태조의 고조부로 목조(穆祖)에 추존되었다. 태조의 가계를 기록한 문장은 정릉(貞陵) 비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393년 9월에 태조는 함주(咸州: 함흥)에 있던 부친 이자춘(李自春)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훗날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게 되는 정총(鄭摠)이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태조는 전주에서 명망이 있던 집안의 출신으로, 시조인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했으며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시중 벼슬을 지낸 이자연(李自淵)을 낳았다”고 했다. 이를 보면 조선이 건국될 당시 태조는 원래 전주 지역의 출신이며 그 시조는 이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 이씨의 시조로 알려진 이한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선 정부가 명나라에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요청하는 외교 문서에서 주로 나타났다. 종계변무란 명에서 편찬된 역사서에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인 이성계가 고려 말의 네 국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내용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사건으로,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명과 조선에 있어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다. 조선 정부에서 명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를 보면 “태조의 22대조인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 벼슬을 했고, 이한의 6세손인 이긍휴(李兢休)는 고려에서 벼슬을 했으며, 이긍휴의 13세손인 이안사는 원나라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했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다. 태조는 전주 출신의 이한에서 이어지는 분명한 혈통이 있으며, 이인임이란 인물은 태조의 적수이지 태조의 부친이 될 수 없다는 해명이었다.
건지산 수목의 보호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은 전주부에서 북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진산(鎭山)이다. 전주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볼 때 남쪽이 높고 북쪽은 허전하여 땅의 기운이 분산되므로, 진산의 이름을 건지산이라 하고, 덕진(德津)이라 불리는 제방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은 전주에 태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을 세웠다. 세종은 그 건물의 이름을 경기전(慶基殿)이라 하면서, 건지산을 경기전의 비보소(裨補所, 풍수지리상 결함이 있는 곳의 기를 보충하는 장소)로 지정했다. 이로 인해 건지산의 수목은 조선 초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건지산의 수목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연산군이 장녹주(張綠珠)에게 건지산을 떼어주자 산의 계곡과 제방에 있던 나무들은 베어지고 개간이 되었다. 중종은 공신 유순정(柳順汀)에게 이곳을 떼어주어 역시 개간이 진행되었다. 인조는 건지산에 금표를 세워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지만, 효종은 다시 이곳을 숙안공주에게 떼어주려고 했다.
영조 초년에도 건지산의 개간 문제를 놓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1729년(영조 5)에 영조는 새로 태어난 옹주에게 건지산을 떼어주려 했다. 그러나 전라 관찰사 이광덕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이광덕은 “예부터 건지산의 땅이 비옥하여 유순정, 임해군, 숙안공주, 숙원(淑媛), 진휼청, 충훈부, 종부시 등이 이곳을 차지하려 했지만 아무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서, 경기전의 주맥(主脈)이 되는 건지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조가 건지산을 딸에게 떼어주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영조는 이광덕의 발언에 화가 나서 그를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이 무렵 영조는 건지산 일대에 있던 백성들의 무덤을 이장시키고, 주변 10리 지역에 표지를 세워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양(禁養) 조치를 내렸다. 이때까지 건지산은 경기전의 비보소로 이해되었다.
조경묘의 건설
1765년(영조 41) 종실인 학림군 이육(李焴)이 이한의 묘소가 있는 건지산에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건지산과 시조 이한의 묘소를 분명하게 연결시킨 발언이었다.
건지산은 전주부의 경계에 있으며, 사람들이 사공(司空)의 묘소가 있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어찌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묘역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아 축대를 쌓고 계절에 따른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우리 성상께서 덕과 효에 통달하시어 삼대를 본받으시니, 높이고 제사 지내는 법식도 상(商)나라 주(周)나라의 예법과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표지를 세워 수호하는 것에 그치십니까? 건지산의 산록에 비석을 세우고 묘역을 조성하며, 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여, 조상을 영원히 추모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장소로 삼아 옛 성인께서 동짓날 조상들께 제사한 뜻에 합치되게 하소서.
이육은 건지산에 있는 시조의 묘역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낼 사당을 건립하자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조의 묘소가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육의 건의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뒤에 시조의 사당인 조경묘(肇慶廟)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1771년 10월에 이득리(李得履) 등 유생들은 왕실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건지산의 묘소는 위치가 부정확하여 묘역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천자는 천자대로, 사(士)와 서인(庶人)은 그들대로 시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국왕만 시조의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인가 반문했다. 이에 대해 영조는 시조의 위판(位版: 위패)을 종묘에 모시기는 어렵지만, 전주에 따로 사당을 만드는 것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시조도 사당을 세웠는데, 우리 시조의 사당을 세우지 않겠느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살펴보면 부인의 성씨도 있고 그 선조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시조를 살피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물며 국조(國朝)의 시조이겠는가? 백두산은 조선의 조종산(祖宗山)으로 이제 그 사당을 세웠다. 하물며 국군(國君)의 시조이겠는가?
이튿날 영조는 삼국시대에 시조묘를 세웠듯이 경기전 옆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그 이름을 ‘조경묘’로 정했다. 또한 시조의 위판은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라 했고, 부인의 위판은 처음에는 ‘시조 비 신라 경주 김씨(始祖妣新羅慶州金氏)’로 했다가 얼마 후 ‘시조 비 경주 김씨 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로 바꾸었다.(그림 1) 조경묘의 관리와 제사는 경기전과 역대시조묘의 선례를 따랐다.
그림 1 조경묘에 모셔진 시조 위판.왼쪽에 ‘시조 고 신라 사공 신위(始祖考新羅司空神位)’, 오른쪽에 ‘시조 비 경주 김씨 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가 보인다. 현재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다.
위판이 만들어지자 글씨는 세손 정조가 썼다. 위판을 보관하는 독(櫝: 함)의 앞면에 쓰는 ‘전(前)’ 자는 영조가 먼저 쓴 후에 세손이 그 획을 보충했다. 영조는 조경묘의 위판을 경희궁의 자정전에 6일 동안 모셔놓고 매일 아침마다 그곳을 찾아가 절을 올렸으며, 위판을 전주로 모셔갈 때에는 서빙고 나루터까지 따라갔다가 위판이 강을 건널 때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이때 영조는 왕실 시조의 사당을 건립한 것은 천 년 만에 있는 성대한 일이라고 했다. 후직(后稷)이 덕을 심은 지 천 년 만에 문왕(文王)이 주나라를 건설하고 그 제사를 지냈듯이, 이한이 덕을 심은 지 천 년 만에 전주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였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같은 수준에서 관리되었고 관리 책임자는 전라 관찰사였다. 1868년(고종 5)에 전주 출신의 윤내형이 대역죄를 저질러 전주의 읍호(邑號: 읍의 칭호)가 강등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전주에는 경기전과 조경묘가 있었기 때문에 읍호의 강등을 피할 수 있었다. 1894년에는 동학운동이 일어나 전주성이 점령되었다. 이때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과 조경묘에 있던 시조의 신주는 위봉산성 행궁으로 피난을 갔다. 관찰사였던 김문현은 관리 소홀을 이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고, 어진과 신주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모실 때에는 우의정 정범조와 예조판서가 현지로 파견되었다. 조선 왕실에서 경기전과 조경묘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조경단의 건설
영조 대 이후 건지산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수목 관리는 여전히 형편없었다. 소나무 숲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무덤이 늘어났으며, 산을 개간하고 쇠를 다루는 야장(冶場)까지 설치되는 상황이었다. 1782년(정조 6)에 정조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전라 관찰사가 매년 봄가을에 건지산의 상태를 살펴 장계(狀啓)로 보고할 것과 예조에서 매년 낭관(郎官)을 파견하여 비리를 적발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는 건지산과 전주성 안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보고하라고 했다.
건지산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된 것은 대한제국이 건설된 직후였다. 1898년(고종 35)에 종실 출신의 이종건(李鍾健)이 상소를 올렸다. 태조 이후로 시조의 묘소가 있는 건지산에 수호군(守護軍)을 두어 나무를 베거나 짐승 기르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근래에 나무를 베어내거나 몰래 무덤을 쓰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는 지적이었다. 이종건은 몰래 쓴 무덤을 모두 파내고, 금지 표지를 한 경계를 다시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고종은 ‘일반 백성도 조상을 잘 모시려고 정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황제의 집안은 어떠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건지산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1899년 초에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이 대책을 보고했다. 이전 국왕들이 묘소의 이름을 정하지 않은 것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미 조경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묘소의 구역 안에 제단과 담장을 쌓고 비석을 세워 영원히 보존하자는 건의였다. 이재순이 묘소를 정비하는 대신에 제단을 쌓자고 한 것은 그때까지도 묘소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은 건지산에 조경단(肇慶壇)이란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되, 비석 앞면의 글씨는 황제가 직접 쓰고, 뒷면의 글은 직접 지었다.(그림 2) 비석의 글씨는 궁내부 특진관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고종은 건지산에 제단을 쌓는 일은 선대의 국왕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이므로 자신은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건지산에 조경단이 건설된 것은 1899년 5월 10일이었다.
그림 2 고종 친필의 조경단 비석과 탁본.‘대한 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썼다. 현재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다.
고종은 현지 사정을 살피기 위해 특진관 이재곤(李載崐)을 파견했다. 이재곤이 돌아와 시조의 묘소가 있는 터는 “주룡(主龍)을 타고 내려오다가 모래 언덕이 조금 높고 산세가 껴안는 듯한 형상이며, 그 아래에 잔디가 비단처럼 펼쳐져 있다”고 했다. 고종은 묘소의 봉분을 개축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으므로 묘소 위에 흙을 더하여 자리를 표시하고, 묘소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정자각을 짓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고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조의 묘소를 확정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재곤의 보고이다.
위 무덤과 아래 무덤 사이의 거리는 17척(尺)이며, 그 사이에 또 세 군데에 무덤으로 짐작되는 곳이 있습니다. 사공(이한) 공 이하로 15대의 묘소가 [선원보략]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지금 이 묘역 안은 땅을 파지도 못하고, 풀뿌리나 나무뿌리를 뽑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조경단 일대에는 묘소로 보이는 곳이 많았고, 황실에서는 시조 이한에서 15대에 이르는 선조의 묏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시조의 묘소라고 지정하지는 못하고 그 아래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것으로 대처했다. 고종 황제는 황실의 역사를 새로 만들었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날조된 역사는 아니었다.
1899년 조경단을 조성한 관리들은 황제 보고용으로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을 작성했다.(그림 3-1) 그림 상단에 재실이 있고, 하단 조경단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 그 우측 위쪽에 제단, 아래쪽에 비각, 오른쪽에 ‘의묘소(疑墓所)’라 기록된 시조의 묘소가 있다. 중하단의 우측과 좌측에는 흰 바탕에 비각의 전면도와 비신의 세부도를 그렸으며, 비석을 만들 때 사용한 석척(石尺)의 견본을 붙여 두었다. 시조 이한의 묘소라 확정할 수 없었기에 ‘의심스럽다’고 표현한 것이 눈에 뜨인다. 현재 장서각에는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과 한 세트를 이루는 〈완산 도형(完山圖形)〉과 〈전주 건지산 도형(全州乾止山圖形)〉(그림 3-2)이 함께 소장되어 있다.
그림 3-1 <조경단 비각 재실 도형(肇慶壇碑閣齋室圖形)>1899년(광무 3), 63.2×49.5cm, 장서각 소장. | 그림 3-2 <전주 건지산 도형(全州乾止山圖形)>1899년(광무 3), 61.2×49.6cm, 장서각 소장. |
또 다른 역사 만들기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는 조경단의 건설에서 끝나지 않았다.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 부부의 묘소를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태조의 4대조인 이안사의 집터가 있던 전주의 활기동과 삼척의 자만동, 태조가 황산전투에 승리하고 잔치를 열었다는 전주 오목대에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이 사실을 새로 편찬하는 [선원보략]에 모두 기록하게 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를 정비한 일이다. [조경단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 의궤(肇慶壇濬慶墓永慶墓營建廳儀軌)]가 작성된 것은 조경단과 이양무 부부의 묘소가 함께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1898년에 이종건은 건지산의 관리를 건의하면서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켰다. 세월이 오래되어 묘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묘소 가까이에 새롭게 조성된 백성들의 무덤이 많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이재순은 종실 출신의 재상을 파견하여 경계 구역을 다시 정하고, 삼척군수가 매년 봄가을에 묘소를 살핀 후 조정에 보고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고종은 특진관 이중하(李重夏)를 삼척에 파견하여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이양무 부부의 묘소와 삼척 관아에 있는 붉은 서대(犀帶: 무소뿔 띠)를 살펴보게 했다. 서대는 1393년(태조 2)에 태조가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면서 삼척부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영조가 이를 보고 기문(記文)을 작성하기도 했다. 고종은 이중하에게 묘소에 관한 문헌을 널리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이중하는 조사를 통해 삼척의 묘소는 세종 대에 처음 발견되었고, 성종 대에 묘역을 정비하다가 이내 공사가 중지되었다고 했다. 이양무 부부의 묘소라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하는 선조 대에 강원 관찰사로 나갔던 정철의 보고, 현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지은 서문과 기문을 근거로 할 때 이양무 부부의 묘소가 확실하며, [동국여지승람], [읍지], 숙종 대에 편찬된 [선원보략]에 관련 기록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고종은 두 묘소의 이름을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로 정하고, 묘역을 정비한 후 비석을 세우게 했다. 또한 정자각, 전사청, 재실 같은 부속 건물도 건축하라고 명령했다. 건지산의 시조 묘소는 문헌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아 제단을 세우는 데 그쳤지만, 삼척의 묘소는 근거가 분명하므로 선조의 묘소로 확정한다는 논리였다. 고종은 두 묘소에 세운 비석의 앞면 글씨를 쓰고, 뒷면의 글도 직접 지었다. 현재 삼척의 준경묘는 ‘전주 이씨의 실제 묘소로는 남한에서 최고(最古)의 시조묘’로 알려져 있다.
1899년에 있었던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는 원래 전주에서 살았던 황실의 선조가 함흥에 정착하기 이전까지의 역사, 즉 전주에서 삼척에 이르는 역사적 흔적을 찾아내어 보존하고 이를 의례적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조치였다. 이 조치가 있은 후 고종은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했고, 동짓날 환구단 제사에서 태조의 신위를 호천상제(昊天上帝)의 신위에 배향하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거행했다. 이는 국가 제사에 있어 황제국의 건설을 완전히 구현하는 행사였다.
[출처]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종 황제의 역사 만들기, 조경단(肇慶壇)>'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20. 이인상의 서얼화(庶孼畵)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림은 시작된다 [李麟祥] (1710~1760)
모든 그림에는 사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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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 1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Self-Portrait)>1500년, 66×49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2 그림 2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부분. |
그림은 모두 그려진 이유가 있고,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의 사연이 글로 밝혀져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가의 의도와 그림에 얽힌 사연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중요한 미술사적 문제에 천착한 책이 바로 마이클 박산달(Michael Baxandall)의 [의도의 패턴(Patterns of Intention)](1985)이다. 박산달은 화가에 대한 전기적 자료와 작품과 관련된 문헌자료가 없더라도 그림 속의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화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박산달의 주장을 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기로 한다. 독일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1500년에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그렸다(그림 1). 이 그림 속의 뒤러는 털 코트를 입고 오른손을 위로 살짝 올린 모습으로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뒤러의 자화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그림이 정면상이라는 것이다. 정면상은 예수 그리스도 등 성상(聖像)에만 적용된 것으로, 이른바 ‘베라 아이콘(the vera icon)’이라 불린 정면 응시 도상이다. 뒤러는 이 도상을 사용하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또한 눈여겨볼 것이 오른손이다. 이 그림에서 오른손은 비현실적으로 매우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손이 ‘신성한 손’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왜 뒤러는 이렇듯 위대한 창조자로 자신을 그린 것일까? 뒤러가 활동했던 중세 독일에서는 화가를 ‘화공(畵工)’으로 취급하여 사회적으로 천시하였다. 뒤러는 베니스를 여행했을 때 이탈리아에서 화가들이 예술가로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창조적 에너지와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가인 자신을 장인(匠人) 정도로 하대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독일에서 화가는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뒤러는 화가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 실망과 자기비하의 감정을 드러내었다. 이 자화상에서 뒤러는, 바로 신과 같은 창조자이며 신성한 손으로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다름 아닌 화가, 즉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한편 이 그림에는 털옷과 머리카락, 수염 등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그림 2). 자신과 같은 위대한 화가가 아니면 결코 이와 같이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극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화가의 의도는 그림으로 드러난다. 뒤러는 말(언어)로 자신을 ‘신성한 존재’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림의 사연은 시각적 요소를 통하여 밝힐 수 있다.
<검선도> - 세상에 쓰이지 못한 서얼의 비애
그림 3 이인상, <검선도(劍仙圖)>1654년 이후, 종이에 담채, 96.7×6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화가의 의도가 그림 속에 시각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그림으로 조선시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검선도(劒僊圖)>(그림 3)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검선도>는 ‘서얼에 의한, 서얼을 위한, 서얼에 관한’ 그림이다. 서얼 이인상이 선배 서얼인 유후(柳逅, 1690~?)를 위하여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검선도>에는 “중국인이 그린 검선도를 방작(倣作:원작을 재해석하여 그림)한 이 그림을 취설 옹에게 바친다. 종강의 비오는 날에 그리다(倣華人劒僊圖 奉贈醉雪翁 鐘崗雨中作)”라는 이인상의 제발이 적혀 있다. 18세기에 ‘취설(醉雪)’이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은 유후가 유일하다. 유후는 서얼로 1748년 조선통신사행에 서기(書記)로 참여하였으며 안기찰방(安奇察訪) 등 미관말직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서얼시인 집단인 ‘초림팔재사(椒林八才士)’의 일원이었던 남옥(南玉, 1722~1770)의 손자며느리가 유후의 손녀이다. 유후는 당시 서얼들이 존경했던 인물이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유후가 “이미 80여 세의 나이가 되어 수염은 눈처럼 하얗고 붉은 볼을 지니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라고 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또한 원중거(元重擧, 1719~1790)의 말을 빌려 유후를 “걸어 다니는 신선(地行仙)”이라고 불렀다. 성해응, 이덕무, 원중거도 모두 서얼이다. 유후는 서얼이었지만 고결한 삶을 산 인물로 동시대와 후대에 평가되었다. 그러나 서얼이라는 신분적 질곡으로 말미암아 유후 또한 다른 여타의 서얼과 마찬가지로 가난에 시달렸으며 사회적 신분의 한계 속에서 한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림 4 이인상,<검선도>부분. | 그림 5 이인상,<검선도>부분. |
그림 6 <여동빈도(呂洞賓圖)>14세기,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앳킨스 미술관(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소장.
<검선도>는 서얼 이인상이 존경하는 선배 서얼 유후에게 그려준 매우 특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유사한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초상화이다. 거대한 소나무 두 그루 아래에 마치 신선같이 휘날리는 수염과 매서운 눈매로 앉아 있는 유후의 모습이 단연 압도적이다(그림 4). <검선도>는 야외 배경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유후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는 칼이 그려져 있다(그림 5).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칼과 관련된 신선은 팔선(八仙) 중 하나인 여동빈(呂洞賓, 798~?)이다. 여동빈은 원대(元代) 이후 발전한 전진도교(全眞道敎)에서 추앙받은 인물로 ‘비검(飛劒)’을 사용하여 잡귀와 역신(疫神)을 퇴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전하는 여동빈 관련 그림을 보면 모두 칼을 등에 매거나 옷 속에 숨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그림 6). 미술사에서 ‘도상(圖像, icon)’은 문법과 같은 규칙으로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근본적인 시각구조에서는 동일한 모습의 유지를 원칙으로 한다. 도상의 원칙에서 볼 때, 이인상이 방작한 중국의 <검선도>가 여동빈 관련 그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혹 여동빈 관련 그림을 참고했다고 해도, 이인상은 도교화 도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검선도>는 시각적 특징에 있어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그림이다. 동아시아 그림에서 검이 그려진 그림은 전쟁화(戰爭畵)를 제외하면 여동빈 그림, 신년(新年)을 기념해 벽사용(辟邪用) 그림으로 자주 그려졌던 종규(鐘馗: 역귀를 쫓는 도교의 신) 그림, 무인(武人) 초상, 황제 무장상(武裝像), 전설적인 검객(劍客) 및 검무인(劍舞人) 관련 판화 및 그림(주로 소설 삽화에 등장, 그림으로 그려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여 검객이 상당수 존재한다), 골동품으로서 칼을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 그림 중 칼을 옷 속에 숨긴 여동빈의 경우를 제외하고 칼은 언제나 전체 모습으로 그려진다. <검선도>를 다시 보자. 그림 왼쪽 하단에 칼자루와 그 밑부분만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핏 보면 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그림에서 칼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최근 <검선도>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인상은 어릴 적부터 칼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인상에게 칼은 강개(慷慨)한 태도, 협사적(俠士的) 멘털리티, 강렬한 존주양이적(尊周攘夷的) 이념, 청(淸)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의 염원 및 벽사(辟邪) 혹은 호신(護身)ㆍ수신(修身)의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아울러 칼은 이인상의 도선적(道仙的) 취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검선도>에서 이인상은 자신과 유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은일자(隱逸者)의 고고한 기상, 무욕(無慾)의 경지, 불의에 맞서고자 했던 고결하고 올곧은 정신, 세상의 온갖 타락과 오염에 물들지 않으려고 했던 결연한 의지를 그림 속에 투영하고자 했다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견해이다. 조선후기 문학에서 일부 서얼들은 종종 협사(俠士) 또는 검객(劍客)과 같은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가령 성대중(1732~1812)의 경우 “협사(俠士)의 풍모가 있었으며(有俠士風)”, 이명계(李命啓, 1714~?)는 “모습이 꼿꼿하고 수염이 길어 마치 신선, 검객과 같았다(如神人劍客)”고 한다. 따라서 협객의 의미로 칼이 그려졌다고 해도 유후가 서얼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데는 문제가 없다. 실제로 <검선도>에 보이는 유후의 장중한 모습과 칼은 협사, 검객과 같은 분위기를 준다.
그러나 이인상과 유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 고고한 기상, 불의에 맞서는 결연하고 고결한 정신을 표현하는 소재로 반드시 칼이 사용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면모들은 그림 속에 보이는 두 그루의 장송(長松)만으로도 충분하다. 장송은 높은 도덕성, 절개, 정의로움을 상징하는 전통 소재이다. 아울러 이인상이 칼에 대한 상징성을 그림 속에 부여하고자 했다면 칼을 전체적으로, 아울러 잘 보이도록 그렸어야 한다. 그가 단지 칼자루 주변만을 그린 사실을 이 연구의 논지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아울러 이인상과 같이 유후도 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칼에 부여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검선도>는 유후를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따라서 유후의 입장에서 칼의 의미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초상화에서 초상화 주인공(the sitter) 주변에 있는 물건들은 그의 삶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따라서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유후의 삶을 알려주는 중요한 시각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초상화 전체에서 초상화 주인공과 함께 칼자루와 그 밑부분만을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선도>의 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칼은 서얼들에게 신분적 불평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서얼들은 ‘칼집 속에 든 칼, 즉 갑 속의 칼(匣中劍)’로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였다. 칼은 칼집에서 나와 사용되었을 때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칼집 속의 칼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조선시대에 서얼은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사회적으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능력이 뛰어나도 서얼은 고위 관직에 나갈 수 없었기에 가난 속에 살았으며, 반쪽짜리 양반으로서 사회적 냉대와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글을 배울 때도 서얼들은 나이 어린 양반들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서얼들 중 이인상과 같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거나 시인으로 저명한 인물도 일부 있었지만, 결국 이들도 서얼이었다. 서얼은 모두 세상에 뜻을 잃은 사람들, 즉 ‘실의(失意)’한 인물들이었다. 이인상 자신도 “갑(匣) 속의 칼과 서안(書案)의 책도 불평을 한다(匣劒牀書動不平)”고 하였다. 신분제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갑 속의 칼과 책상 위의 책을 보면서, 이인상은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서얼이 책상에 앉아 책을 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서얼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책상 위에서 불평하는 책은 이인상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검선도>를 보면 매우 일부이기는 하지만 칼이 뽑혀 있는 상태로 그려져 있다. 칼자루 밑부분을 보면 칼이 뽑혀져 칼의 몸체가 일부 드러나 있다. 이인상은 ‘갑 속의 칼’이 아닌 뽑혀져 있는 칼의 극히 일부분만을 그려 넣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갑 속의 칼’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서얼의 신세를 상징한 것이라면 <검선도>에 보이는 뽑혀져 있는 칼은 반대 의미가 된다. 즉, 유후가 사회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왜 이인상은 유후와 관련하여 뽑혀져 있는 칼을 그린 것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검선도>가 제작된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발에 보이는 “종강의 비 오는 날에 그리다”라는 구절을 통해, 이인상이 <검선도>를 그린 때는 설성(雪城, 현재의 장호원 근처)에 은거처인 종강모루(鐘崗茅樓)를 지은 1754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인상이 관직을 그만두고 산속에 들어가 고독한 은거자로 생활할 때다. 이 시절 이인상이 어떤 맥락에서 <검선도>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제작배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유후는 1721년에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매우 늦은 나이인 53세 때(1742) 북부참봉(北部參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검선도>가 그려진 시기, 즉 1754년 이후에 유후는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지냈으며 1757년 안기찰방(安奇察訪)으로 나가 하급 관료로 일했다. 유후가 이렇듯 6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도 하급 관료로 일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가난 때문이었다. 이덕무는 유후가 90 평생을 굶주림 속에 살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가난은 서얼들에게 운명이었다. 그들은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았다. 이인상도 서울에서 집 없이 전전하였다. 이를 불쌍히 여겨 양반들인 신소(申韶, 1715~1755)와 송문흠(宋文欽, 1710~1752)이 이인상을 위해 30냥을 주고 남산에 초가집 한 채를 사줄 정도로 그는 곤궁했다. 이인상을 포함해 하급 관료라도 하지 않으면 굶주림 속에 죽어야 했던 것이 서얼의 삶이었다.
이덕무는 유후가 온후(溫厚)하고 청직(淸直)하여 후생의 표준이 될 만한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고 그의 인생에 대해 평가하였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늙어서까지 하급직을 전전했지만 세상 누구도 그의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지 못했다. 유후는 서얼이 아니었다면 후세의 모범이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얼이었기에 가난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 생을 마쳤다.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바로 이러한 유후의 삶을 알려준다. 칼이 뽑혀져 있지만 극히 일부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유후가 하급 관료로 일했지만 세상에 쓸모 있는 인물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얼이 벼슬을 해도 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연풍현감(延豊縣監)과 안기찰방을 지냈다. 유후가 지낸 벼슬인 안기찰방은 중인 신분인 김홍도도 역임한 지방 말직이었다. 서얼들이 관직을 맡아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는 서얼들이 늘 겪었던 일이다. 세상에 쓰인들 그 누가 서얼의 재능과 인품을 존중해주었겠는가. 현실은 이와 같이 비정했다. <검선도>에 보이는 드러난 칼의 일부는 세상에 쓰였지만, 즉 관직을 맡기는 했지만 어떤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미관말직만을 전전한 서얼들의 불행한 삶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결국 ‘칼집 속의 칼’이나 바깥으로 드러난 칼이나 의미는 마찬가지다. 드러난 칼은 ‘칼집 속의 칼’의 역설적 뒤틂이다. 본래 사회적으로 ‘무용(無用)’한 존재이지만 설혹 세상에 쓰인다 해도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존재가 서얼이기 때문이다. 화가 이인상 역시 유후와 마찬가지로 10년 이상을 서울과 지방의 하급직으로 연명하다가 산속에 은거하였다. 노론 명문가의 서얼이었지만 이인상도 결국은 세상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제대로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선도>에 보이는 칼은 서얼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을 보여준다. 유후에게 보낸 한 시에서 이인상은 “한루(寒樓)의 지창시(紙窓詩)를 그 누가 알아줄까(寒棲誰知紙窓詩)”라고 자조(自嘲)하였다. 여기서 한루(寒樓)는 유후의 지독한 가난을 지칭하며 지창시(紙窓詩)는 유후의 문학적 재능을 의미한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혹독한 가난 속에 범부로 살아야 했던 서얼 유후에 대한 이인상의 울분과 연민을 엿볼 수 있다.
<검선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통해 볼 때, 특히 거대한 장송 두 그루의 상징성을 고려해볼 때 1754년 이후 언제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선도>는 유후의 생일 축하용 그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소나무 그림은 ‘장수’를 기원하는 생일 축하용 그림으로 자주 제작되었다. 따라서 이인상은 유후의 생일을 맞이하여 <검선도>를 제작하여 바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상은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이미 은거자로 삶을 마감하게 될 영락한 서얼이었다. 이인상은 참혹한 자신의 처지와 선배 서얼이었지만 노년에도 미관말직을 전전하고 있던 유후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며 <검선도>에 서얼의 슬픔을 상징하는 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 칼에는 이들 모두가 느낀 서얼의 슬픔, 절망, 좌절감, 억울함과 불평의 마음, 자기 연민의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인상은 유후를 제외하고 이러한 초상화를 누구에게도 그려주지 않았다. 자신과 친했던 양반들인 이윤영(李胤永, 1714~1759), 신소, 송문흠에게조차 <검선도>와 같은 특별한 초상화를 그려주지 않았다. <검선도>는 이인상의 서얼 의식이 미묘하게 표출된 흥미로운 ‘서얼화’라고 할 수 있다. 이인상은 서얼화가로서 주목해야 한다.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아들인 화가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은 같은 서얼이지만 자신의 그림에 서얼 의식을 드러낸 적이 없다. 김윤겸과 이인상은 모두 명문 노론 집안의 서얼이다. 이인상만이 서얼 의식을 보여준 유일한 조선시대 서얼화가이다. 동아시아 전체를 통해 봐도 조선에만 존재한 서얼 신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류(內流) 또는 잠류(潛流)하던 자신의 자의식인 서얼 의식을 미묘하게 드러낸 이인상의 작가적 능력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이인상의 그림 속 ‘서얼 의식’은 언제나 은미(隱微: 묻히거나 작아서 알기 어려움)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림은 절대로 함부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림은 오직 그림을 아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설송도>- 혹한 속 늙은 소나무의 최후, 서얼이 맞이한 죽음
이인상의 모든 그림이 서얼화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걸작들 중 대부분은 서얼화라고 할 수 있다. <설송도(雪松圖)>(그림 7)는 이인상이 그린 서얼화의 백미이다. 위로 굳건히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몸통과 옆으로 굽어 휜 늙은 소나무가 교차하는 구도는 <검선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두 그림이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으며 유사한 주제를 담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설송도>는 전체적으로 단순화된 구도를 보여주고 있어 <검선도>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750년대 후반, 즉 이인상이 죽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설송도>의 풍경은 참혹하다. 두 그루 늙은 소나무가 겨울 한파 속에 삶과 죽음을 오가고 있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생명을 보전하고자 애쓰는 두 그루 소나무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이 그림에 보이는 매서운 겨울 풍경은 서얼들이 처한 냉혹한 삶의 조건을 암시한다. 뿌리마저 뽑혀 고사(枯死) 위기에 놓여 있는 소나무는 서얼의 고통과 절망 그 자체이다. 이 그림 속 겨울은 신분제적 질곡(桎梏)을 의미한다.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랑(浮浪)한[좋은 말로 이야기하면 처사(處士)로서 세상과 등지고 산] 서얼들의 삶은 뿌리 뽑힌 소나무, 늘 죽음과 같은 고통에 직면한 고난과 좌절의 삶이었다. 결론적으로 <설송도>는 이인상 자신의 고뇌에 찬 삶을 시각적으로 집약한 자화상이다. 나아가 이 그림의 궁극적인 주제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화가의 성찰이다. 겨울 추위 속에서 늙은 소나무들은 죽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버팀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늙은 소나무들에게 이미 죽음은 임박해 있다. 화가 이인상의 놀라운 능력은 바로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와 같이 극적인 장면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늙은 소나무의 죽음은 곧 화가 이인상 자신의 죽음이다. 동아시아 문인화가 중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이렇듯 처절하게 표현한 화가는 이인상 외에 없다. 혹한, 늙은 소나무의 생존 의지,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비장하고 침울한 세계의 진수를 <설송도>는 보여준다. 결국 이 그림에 보이는 늙은 소나무와 같이 이인상은 쓸쓸하게 산에서 죽었다. 뒤러의 <자화상>에 보이는 ‘거대한 오른손’과 같이 <설송도>에 나타난 처참하게 드러난 늙은 소나무들의 뿌리는 이인상이 지닌 비극적인 삶과 내면 의식을 보여준다.
그림 8 석도(石濤), <운산도(雲山圖)>1702년,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설송도>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이인상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근원, 즉 서얼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사색과 관련하여 이인상과 비견되는 인물은 중국화가 석도(石濤, 1632~1707)이다. 석도는 명(明) 황실 자손으로 명청(明淸) 교체기에 선승(禪僧)과 도사(道士)로 활동하다가 생의 마지막 단계에 양주(揚州)에 정착하여 직업화가로 삶을 마쳤다. 그는 노병(老病)에 시달리던 1701년 말~1702년 초경부터 자신의 근원인 ‘명 왕손(王孫)’ 의식을 끊임없이 그림 속에서 환기시켰다. 평생을 떠돌이 선승ㆍ도사로 살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석도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이르러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본명인 주약극(朱若極), 보다 정확하게 광서(廣西) 계림(桂林) 지역의 명 왕부(王府)였던 정강왕부(靖江王府)의 후손 주약극을 자신의 그림에 쓰기 시작했다. 그의 말년 그림에는 ‘약극(若極)’, ‘극(極)’, ‘정강후인(靖江後人)’ 등 그의 왕손 의식을 보여주는 관지(款識, signature)와 인장(印章)이 자주 보인다(그림 8). 석도는 인생의 마지막에 명 황실 자손이었기에 만주족 지배하에서 늘 숨죽여 살아야 했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석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인상 또한 노병으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설송도>와 같이 비극적인 산수화를 그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설송도>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림 9 이인상, <설송도> 부분.
‘한림고목도(寒林古木圖)’라는 동아시아 그림의 전통 장르가 있다. ‘한림고목도’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군자의 도덕적 고결함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중국의 어떤 ‘한림고목도’도 <설송도>와 같이 비극적이고 참혹한 풍경을 담고 있지는 않다. <설송도>는 소나무의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다. <설송도>는 극단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견디는 겨울 소나무의 비극적 풍경을 그린 것으로, 동아시아 ‘한림고목도’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얼이 아니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아니 그릴 필요가 있을까? <설송도>에는 뿌리 뽑힌 소나무 하단에 보이는 바위에 이인상의 도장이 하나 찍혀 있어, 이 그림이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그림 9). <설송도>에는 이인상의 제발도 관지도 없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이인상은 몰래 자신의 도장을 찍어 이 그림이 자신의 그림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 세상에서 추방된 외로운 은일자이자 서러운 서얼의 죽음을 예시(豫示)한다. 겨울 산 후미진 계곡의 늙은 소나무가 죽은들 이 세상 누가 거들떠보랴. 설성의 깊은 산속에 혼자 병을 앓고 있는 서얼 한 명이 죽은들 누가 슬퍼하랴. 이인상은 자기 연민으로 소나무들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다. 같은 문인화가였지만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설송도>와 같은 비극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야인(野人)으로 오랜 세월을 정치적인 불운 속에 살았지만 강세황은 양반이었다. 그는 서얼인 이인상과는 신분이 달랐으며 따라서 <설송도>와 같은 비극적이고 처절한 그림을 그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인상과 절친했던 양반 화가 이윤영조차 이러한 참혹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윤영 역시 처사로 자처하면서 살았지만 그는 이인상과 같은 서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 지독한 자기 비애와 연민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인상은 서얼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달랐다. 이들과 비슷한 삶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서얼이라는 신분은 이인상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한 족쇄였다. 따라서 이인상의 그림은 그 누구의 그림과도 달랐던 것이다. 서얼 신분은 이인상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예술세계는 서얼이었기 때문에 빛났다. 서얼화가라는 독특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그는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문인화 전체를 대표하는 명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인상은 서얼화가이고 그의 그림 중 명작은 ‘서얼화’이다. 중국과 일본에는 서얼화가도 서얼화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이인상의 ‘서얼화’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림은 시작된다
그림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언어 바깥의 세계에 자리한다. 중국의 저명한 문인화가들은 자신들의 문집을 남겼으며 방대한 양의 시와 산문을 지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글들은 그들이 남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 그림과 관련한 이야기는 거의 없으며, 있어도 그들의 그림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기이하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언어와 그림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속에 그림의 세계가 있다. 이인상이 남긴 시와 산문들이 그가 그린 그림들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자료가 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이인상은 글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얼의 슬픔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서얼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고, 다른 서얼처럼 대우받기 싫었다. 그러나 이인상은 어쩔 수 없는 서얼이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늘의 형벌이며 고통이었다. 말로 드러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이인상은 말보다 그림의 ‘모호성(ambiguity)’과 ‘암시성(allusion)’을 사용하였다. 그림은 말과 달라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암시와 상징은 그림이 가진 커다란 힘이다. 의미가 드러나는 언어보다 암시로 가득 차 쉽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그림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좋은 매체이다. 중국의 문인화가들이 수많은 글을 남겼음에도 그림을 그려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그림이 가지는 ‘모호성과 암시성의 힘’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의 특성은 문인화가 강세황에게도 적용된다.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들어 있는 강세황의 시문들에서 그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거의 찾을 수 없다. 이인상과 강세황 모두 글로써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그림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인상과 강세황은 뛰어난 화가이자 서예가였지만 명문장가이자 탁월한 시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言錄)]에서 이인상은 <화주록(畵廚錄)>과 <서가록(書家錄)>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강세황도 마찬가지이다. 이규상은 이인상을 고전(古篆)과 그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규상은 세상 사람들이 이인상의 서체인 ‘원령체(元靈體)’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고 심지어는 그의 명망에 경도되어 이인상의 부족한 부분까지 모방하려는 속태(俗態)를 비판하면서 “이인상의 해서(楷書)와 시는 평범하여 다른 사람보다 약간 나을 뿐”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즉, 이규상은 이인상의 해서와 시를 매우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최근 이인상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규상이 이인상의 문학에 가한 논평을 고려해볼 때 매우 아이러니한 느낌이 든다. 이인상의 글만을 추적해 이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이인상을 이해하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이인상은, 이규상조차 “꼿꼿한 자태와 파리하면서도 강단 있는 정신으로 화가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극찬할 정도로 철저하게 화가였다. 이인상의 시와 그림에 대한 이규상의 평가는 이와 같이 달랐다. 물론 이인상이 남긴 글들이 그를 이해하는 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규상의 평가는 거의 동시대인의 평가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인상의 글을 통해 이인상에 대한 위인열전(偉人列傳)을 쓰는 것으로 연구가 경도될 위험이 있다.
이인상에 대한 연구가 글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의 삶과 예술이 지닌 역사적 성격이 축소 또는 과장되고 왜곡될 수 있다. 이인상이 동시대 및 사후에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었던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이인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는 불우한 서얼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비범하고 독특하며 그 속에는 미묘한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그가 서얼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빛난다. 서얼의 아픔과 상처가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인상의 경우를 통해 볼 때 그림은 결코 함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림 속에 내재된 ‘화가의 흔적’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흔적은 ‘그림 속에’ 존재한다. 이인상의 흔적을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 이인상 연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인상이 남긴 글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국학이 그림과 만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출처] : 장진성 서울대학교 교수:< 이인상의 서얼화(庶孼畵) [李麟祥]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21. 조선후기 문화의 창, 북경 유리창 - 새로운 세계가 황홀경처럼 펼쳐지는 곳
그림 1 〈유리창 시의도(琉璃廠示意圖)〉.뇌몽수(雷夢水) 등이 손전기(孫殿起, 1894~1958)의 [유리창 소지(琉璃廠小志)]를 출간하면서 그려 넣은 유리창의 약도. 청 건륭 연간에 제작된 북경성 지도를 기반으로 그린 것이다.
옛 북경 내성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에서 서남쪽으로 5리쯤 걸어가면 유리창(琉璃廠) 거리(그림 1)가 나온다. 이곳은 지금은 쇠락했지만 조선후기 때만 해도 모두 합해 27만 칸이나 되는 수많은 상점이 동서로 5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북경 제1의 시장이었다. 특히 수만 권의 장서를 구비한 서점들이 즐비하고 기윤(紀昀, 1724~1805)과 나빙(羅聘, 1733~1799) 등 청조(淸朝)의 문인 학사들이 이 주변에 살거나 자주 드나들어, 북경에 도착한 사신들이 몇 번이고 꼭 들렀던 곳이다. 연행사(燕行使)들은 이곳에서 청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새로운 세계와 주체에 눈을 뜨게 된다.
유리창, 황홀경에 빠지다
유리창은 북경 최고의 시장으로 중국뿐 아니라 서양의 다양한 물품들까지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진, 말 그대로 페르시아 시장 같은 곳이었다. 비단 가게, 서점, 그림 가게, 종이 가게, 찻집, 약국, 포목점, 은전포, 인삼 가게, 문방구점, 장난감 가게 등 수많은 상점이 동서로 이어진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온갖 물건을 팔았다. 요지경과 오르골, 벼루와 벼루갑, 이쑤시개와 치아통, 면빗과 참빗, 바늘통에 골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또 중간중간 들어선 술집에서는 소흥춘(紹興春), 죽엽청(竹葉靑) 같은 향긋한 술을 팔아 거리의 흥취를 더하였다. ‘병장기는 받지 않습니다(軍器不儅)’라고 크게 써 붙인 전당포에는 물건을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삼삼오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 무리와 부딪칠 듯 비껴가는 거마들로 귀뿌리가 울릴 지경이었고, 장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지나가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가게는 단청이 몹시 화려하다. 심한 경우 전부 금빛을 써서 황금 옥을 이룬 것도 있다. 가게 주인은 비단 옷에 담비 갖옷을 입고 앉아서 장사의 저울질을 맡아 천하의 이익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한다.
<em><strong>- 서유소(徐有素), 〈시사(市肆)〉, [연행록(燕行綠)], 연행록전집 79</strong></em>
온갖 물건을 진열해 둔 유리창의 상점들은 외관도 매우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다락에다 난간을 두고 사치를 부렸으며, 붉고 푸른 빛이 도는 유리기와를 올려 멋을 더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햇살이 비칠 때 유리창은 유리세계마냥 반짝거려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았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증언에 따르면, 가게를 새로 열 때 그 바깥 설비에만 수천만 금을 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상점의 주인들도 이에 걸맞게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손가락에는 소뿔로 만든 가짜 손톱(指甲)을 붙인 채 손님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들어오면 준비된 의자에 앉히고 차를 권했다. 이렇게 권하는 차를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노가재 김창업(金昌業, 1658∼1721)처럼 열다섯 잔 이상을 마시기도 했다.
그림 2 〈유리창(琉璃廠)〉, [연행도(燕行圖)] 중 제13폭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1780년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유리창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유리창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그림 한 폭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燕行圖)]에 실려 있다(그림 2). 아직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유리창 풍경을 그린 것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단 위에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건물 뒤편에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중국 전통 양식의 건물 외관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높은 패루와 붉은 당간, 전각 앞의 넓은 테라스에서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실제보다 과장된 넓은 거리에는 거마들이 분주히 오가고, 조선 사신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던 낙타 두 마리도 보인다. 건물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쉽지만, 그때의 모습이 화려하게 되살아나 있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재화와 서양에서 수입된 기물까지 다 갖추어진 유리창 시전(市廛: 시장 거리의 가게)은, 페르시아 시장처럼 조선의 사신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리창은 조선 사신들이 파악한 당대 최고의 번화가로, 청나라의 발달된 상업문화와 도시문화를 대표한 곳이다. 물론 홍대용과 박지원 등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사치 너머의 것이 사유되고 비실용과 자본의 폐해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유리창은 청과 서양의 문화를 엿보는 창으로 기능했다. 이곳 유리창에서 매매된 수많은 상품은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의 문화 변화를 추동(推動)한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서화와 골동 취미를 야기한 진원지가 바로 유리창이었고, 벼루를 비롯한 문방구는 연행사의 주요 구매 품목 중 하나였다. 기완포(器玩鋪)에서 주로 팔던 서양 기물 중 안경과 망원경, 자명종과 양금 등도 대거 조선에 유입되어 사대부의 삶과 인식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서점, 지식을 구매하다
유리창 거리는 수많은 상점이 채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대표할 만한 상점은 바로 서점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연행 관련 기록 중에서 1732년 연행길에 올랐던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임자 연행 잡지(壬子燕行雜識)]에 처음으로 유리창이 등장하고, 마지막 기록은 1894년 연행길에 올랐던 김동호(金東浩)의 [갑오연행록(甲午燕行錄)]이다. 이 책들에는 서점과 관련된 기록이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행사들은 이곳 유리창 서점을 탐방한 뒤 서점의 구조와 현황, 서적 판매 방식과 구비 도서 목록, 서점 주인의 면모와 서점을 통한 인적 교류, 청조(淸朝)의 인쇄와 출판 문화 현황 등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유리창 서점의 역사는 조선의 연행기록뿐 아니라 이문조(李文藻)의 〈유리창 서사기(琉璃廠書肆記)〉, 무전손(繆荃孫)의 〈유리창 서사 후기(琉璃廠書肆後記)〉, 손전기(孫殿起)의 〈유리창 서사 삼기(琉璃廠書肆三記)〉를 통해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리창을 거점으로 명멸해간 서점의 정보가 이들 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특히 1769년에 지은 이문조의 〈유리창 서사기〉는 연암 그룹의 연행 기록과 겹쳐져 새로운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1765년에 홍대용의 연행이 있었고, 1778년에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의 연행이 있었으며, 1780년에 박지원의 연행이 있었고, 1790년에 유득공과 박제가의 연행이 있었다. 이들은 연행 당시 여러 서점을 탐방하는데 오류거(五柳居), 문수당(文粹堂), 선월루(先月樓), 명성당(鳴盛堂), 취영당(聚瀛堂), 숭수당(嵩秀堂), 성경당(聖經堂), 문성당(文盛堂), 대초당(帶草堂), 문환재(文煥齋) 등이 바로 그곳이다. 신서와 구서를 판매하는 거대 상점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유리창 서사기〉에 보이지 않는 서점들도 일부 확인된다.
책방은 정양문 밖에 있는데 한 곳에 그치지 않았다. 그 책을 쌓는 법은 이렇다. 집에 30여 칸을 만들고 각 칸의 네 벽에 선반을 설치하여, 층층마다 질서정연하게 배열하여 쌓아두고는 벌마다 ‘아무 책’이라는 찌를 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용마루에 차고 집에 넘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문 앞에 하나의 큰 탁자를 두고 탁자 위에 10여 권의 책갑을 놓았는데 곧 책 이름 목록이었다.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서 아무 책을 사려고 하면 한번 손을 들어 뽑아주고 꽂는 것이 매우 편하고 쉬웠다.
<em><strong>- 박사호(朴思浩), 〈책사기(冊肆記)〉, [심전고(心田稿)], 연행록전집 86</strong></em>
서점의 내부 풍경은 대체로 비슷했던 듯하다. 네 벽면에 높다랗게 서가를 세우고, 칸칸마다 상아 찌에 비단 책갑을 입힌 서책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해두었으며, 소장한 도서 목록을 따로 정리하여 손쉽게 책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각 서점마다 쌓아놓은 수만 권의 서적에 조선의 연행사들은 압도되어 눈 둘 곳을 찾지 못했고, 일일이 찌를 붙여 책 이름을 적고 서목을 따로 갖춰 필요한 책을 신속하게 찾아주는 체계적인 시스템에 감탄했다. 이곳 서점에서 연행사들은 수많은 책을 구매했고, 빌려 보기도 했으며, 희귀본과 조선에 없는 책 목록을 베껴 오기도 했다. 청조에서 금했던 많은 서적들도 유리창 서점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책 거간꾼 역할을 도맡은 서반(序班)도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림 3 유리창의 거리 판매 풍경<출전: 진강(陳剛) 주편, [유리창(琉璃廠)](북경출판사, 2005), 33면>.
그런데 유리창에서의 서적 거래는 대형 서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묘(祠廟)의 간이 좌판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그림 3). 유리창 주변에는 연수사(延壽寺), 화신묘(花神廟), 여조사(呂祖祠) 등 여러 사묘가 있었는데, 이 사묘들에서 묘회가 열리면 다양한 물품을 파는 임시 시장이 성대하게 차려졌다. 금은보패와 서화, 필연과 과일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작은 책 좌판도 함께 열려 물건과 책을 흥정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 좌판에 많은 책이 구비되지도 희귀본이 갖춰 있지도 않았지만, 도서 거래의 한 창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거래 규모나 파급력은 거대 서점만 못했어도 도서 거래 공간으로써 유리창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더하여 유리창에서는 열흘마다 7, 8, 9일 연이어 3일간 시장이 열렸는데, 유리창에 장이 서는 날이면 유리창 바깥에서 온 서적상과 화거(貨車)들이 대거 모여들어 새벽부터 다양한 책이 땅에 진열된 채 흥정이 이루어졌다. 서점보다 싸게 판매되는 데다 강남에서 올라온 희귀본들이 거래되어 청조의 많은 문인 학사들이 이곳에서 책을 구매했다. 〈유리창 서사 후기〉를 쓴 무전손은 이곳에서 송나라 때의 판본인 [범문정집(范文正集)], 원나라 때의 판본인 [유도전집(柳道傳集)], 정통본인 [소평중집(蘇平仲集)]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의 벗 중 한 사람인 성백희(盛伯希)는 때때로 보자기와 이불을 챙겨 가서 묶어 올 정도였는데, 그 또한 송나라 때의 판본인 [예기 주소(禮記注疏)] 70권과 [두시 황학주(杜詩黃鶴注)] 및 [구초 유학경오(舊鈔儒學警悟)]를 얻었다고 했다.
서점가로 성시를 이룬 유리창에서 조선의 연행사들은 청조의 학술과 문학, 출판문화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 확인한 바를 조선으로 적극 끌어들인다. 그 결과 유리창 서점에서 수입된 각종 서적은 조선의 학문과 문학과 예술뿐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추동하게 된다. 조선후기 학문에서 나타나는 고증학 열풍, 문학에서 보이는 소품문 유행, 일상에서 드러난 기벽(奇癖: 기이한 취미) 추구 등은 유리창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유리창 서점과 그곳에서 수입된 서적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북경 유리창은 말하자면 지식 구매 창고였다.
연희, 놀이에 빠지다
그림 4 사담자(耍罈子)의 공연 모습.19세기 청나라의 풍속화다.
각종 재화와 무수한 사람으로 넘쳐난 유리창 거리는 연행사들의 주요 소비 공간인 동시에 청나라의 민간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둥근 통 두 개를 메고 다니며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사람을 보고 ‘중국의 살림이 힘들어졌다’는 억측을 하기도 하고, 춘화도를 붙여놓고 돈을 받는 화장실에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언어와 행동에서부터 복식과 음식 등 다양한 민간 풍속의 정보가 이곳 유리창을 통해 기록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유리창은 당대에 발달한 다양한 민간 잡기 공연이 지속적으로 펼쳐진 공간이기도 했다. 잡기 공연은 유리창 빈 공터에서 가림막 없이 소규모로 진행되기도 하고, 김정중(金正中)이 증언한 것처럼 천막이 쳐진 임시 가설무대에서 제법 크게 다양한 레퍼토리로 공연되기도 했다. 김정중은 1792년 1월 8일 유리창 임시 무대에서 펼쳐진 잡기 공연을 관람하였다. 5푼의 입장료를 내고 의자에 앉아 보았는데, 손재주형 잡기와 각종 동물 놀음이었다. 김정중이 처음 본 것은 바로 사담자(耍罈子)란 손재주형 잡기다(그림 4). 사담자는 청대에 유행한 대표 잡기 중 하나로, 단지를 공중에 던졌다가 머리로 받거나 혹은 어깨, 팔 등을 이용해 다양하게 놀리는 기예를 말한다. 사담(耍罈) 혹은 담기(罈技)라고도 불렀는데, 그 손재주가 매우 경쾌하고 날렵하여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 곰, 범, 원숭이를 길들이는 자가 있는데, 전부 철사로 목을 묶었다. 범은 발톱과 어금니를 잘랐으나, 혹 눈을 번뜩이고 입을 벌리면 맹렬한 기에 바람이 일었다. 되놈 아이가 마하라(麻霞羅)를 벗고 빤질빤질 대머리를 범의 입안으로 바로 들이밀자 범은 그 머리를 피해 물러서서 움켜쥐고 씹어 먹으려는 뜻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등 위에 올라가 꺾어 돌며 춤추고 뛰는 것이 하나하나 절도에 맞았다. 곰은 거꾸로 잠깐 사이 세 번 뛰어오르는 것이 광대의 모양 같았다. 원숭이는 높은 막대 끝에 올라가 혹 춤을 추고 혹 눕기도 하는데 평지처럼 쉽게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em><strong>- 김정중(金正中), [연행록(燕行錄)], 연행록전집 75</strong></em>
그림 5 원숭이 놀음인 후희(猴戱)의 공연 모습.1923년 무렵 중국에서 출간된 [대아루 화보(大雅樓畵寶)]에 실린 삽화이다.
사담자 공연이 끝난 다음에 김정중은 세 가지 동물 놀음을 더 보았다. 곰을 데리고 노는 웅희(熊戱)와 호랑이를 놀리는 호희(虎戱), 그리고 원숭이 놀음인 후희(猴戱)(그림 5)였다. 만주족 아이가 호랑이를 타고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변발한 머리를 호랑이의 아가리에 집어넣기도 했다. 호랑이의 어금니와 발톱이 잘렸다고는 하나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웅희의 경우, 곰이 광대처럼 거꾸로 잠깐 사이에 세 번 뛰어오르는 기술을 선보였고, 후희에서는 원숭이가 높은 막대기 끝에 올라 다양한 몸짓을 연출하였다. 이외에도 한 노인이 공작을 타는 놀음과 두 여인이 배를 모는(行船) 놀음도 보았다.
연행사들은 유리창과 그 주변 극장에서 희곡과 잡기 등 여러 민간 공연예술을 감상했고, 이를 통해 그 시대와 역사와 문화를 사유하려 하였다. 유리창과 관소에서 여러 잡기 공연을 관람한 홍대용은 “인간의 기교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라고 탄식하였고, 손용주(孫蓉洲)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잡기 공연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더하여 연극의 경우 그 공연이 사치스럽고 내용이 음탕하여 왕도 정치에 맞지 않음을 극력 피력하면서도, 그 의복 속에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유리창 주변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한 김경선(金景善)과 유리창 거리에서 희자(戱子)를 본 홍석모(洪錫謨, 1781~1857)도 연극에서 중화 문명의 흔적들을 찾고 이를 통해 비분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변치 않은 대청(對淸) 의식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유리창 임시 희대에서 곰과 호랑이와 원숭이 놀음을 관람한 김정중은 끝내 슬픔을 느끼고 이렇게 토로한다. “세력을 잃어버리면 먹을 것을 찾아 이웃에 구걸하는 처지가 되어 평범한 아비가 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세 마리와 비교해 뭐가 다르겠는가? 이와 같아 저들을 슬프게 여기는 바다.” 야성을 잃고 순한 양처럼 공연하는 세 짐승을 통해 같은 처지의 인간을 떠올린 것인데, 형가(荊軻, ?~BC227, 전국시대 연나라의 자객)의 호기를 잃고 청조에 기대어 살아가는 당대의 한족 지식인들에 대한 탄식을 겹쳐두었다.
반면에 북학파의 일원이었던 이희경은 유리창에서 호랑이 놀음을 보고 난 뒤에 오히려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에 생각이 미치는데, 호랑이를 길들이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가정과 논증은 실학적 관심의 확장과 학적 태도로 이해된다. 그가 지은 [설수외사(雪岫外史)]에는 벽돌, 수차, 가마, 농기구 등 조선의 이용후생에 도움 되는 청조 문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에 바로 호랑이 놀음과 호랑이 길들이기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실학적 관심이 이러한 분석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북경 유리창은 오랜 기간 청조 민간 연희의 대표적 연행 공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제 기능을 발휘해왔다. 이곳에 자주 들른 홍대용을 위시한 여러 연행사는 연극과 잡기 등 청대에 유행한 다양한 공연예술들을 직접 보았고, 그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더하여 그 속에 민간 연희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청조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겹쳐둠으로써 공연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냈다.
우정, 천고의 벗을 사귀다
그림 6 엄성(嚴誠), 〈홍대용 초상화〉.항주 출신 문사 엄성이 건정호동에서 홍대용을 만난 뒤에 그린 것으로 엄성의 문집인 [철교전집(鐵橋全集)]에 실려 있다.
유리창은 조선과 청나라 문사들의 우연하고 사적인 만남이 수시로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유리창과 그 주변에는 청조의 문인 학사들이 대거 거주한 데다가 사고전서 편찬에 참여한 학사들이 유리창을 자주 찾게 되면서 조선후기 한중 문화교류사에서 주목할 만한 만남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유리창 남쪽에 위치한 건정호동에서 이루어진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강남 문사인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均)과의 만남(그림 6)과 유리창 동변 초입에 위치한 관음각(觀音閣)에서 이루어진 박제가(朴齊家, 1750~1805)와 양주화파의 거장 나빙(羅聘, 1733~1799)과의 만남(그림 7, 8)이 특히 유명하다. 이 만남은 비록 짧았지만 당대 조청 문인들은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조청 문화 교류의 한 전형을 형성했다.
유리창의 육일재에서 황포 유세기를 처음 만났는데 자가 식한(式韓)이었다. 눈이 맑고 눈썹이 수려한 것이 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축덕린(祝德麟),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 듯했다. 이 사람들은 앞서 나보다 교유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이나 얼굴의 모습이 마치 수염과 눈썹을 헤아릴 수 있을 듯 눈에 선하였다.
<em><strong>- 박지원(朴趾源), 〈피서록(避暑錄)〉, [열하일기(熱河日記)]</strong></em>
특히 청조 문사들의 살롱 역할을 한 서점은 조청 문인 지식인들의 중요한 만남의 장으로 거듭난다. 1780년 8월 3일 박지원은 유리창 선월루(先月樓) 남쪽에 있던 사천신회관(四川新會館)으로 원항(鴛港) 당낙우(唐樂宇)를 만나러 간다. 당낙우는 박제가, 이덕무 등과 이른 인연이 있었고, 이덕무의 소개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때 유리창 동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위치한 육일재(六一齋)에 들러 유세기(兪世琦), 서황(徐璜), 진정훈(陳庭訓) 등을 만나 필담을 나눈다.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뒤에도 이들과 일곱 번을 만났고, 거인(擧人) 능야(凌野), 태사(太史) 고역생(高棫生), 한림(翰林) 초팽령(初彭齡), 한림(翰林) 왕성(王晟), 거인(擧人) 풍성건(馮乘健) 등을 소개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박지원의 〈양매시화(楊梅詩話)〉가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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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 7 나빙의 자화상인 〈양봉도인 사립도(兩峰道人簑笠圖)〉의 부분.1780년, 종이에 채색, 59.8×56cm,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2 그림 8 나빙, 〈박제가 초상화〉(1790년 사진).나빙이 이별의 증표로 박제가에게 그려준 초상화로, 원작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
이외에도 서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남은 아주 많다. 1766년 1월 26일 홍대용은 미경재(味經齋)에서 감생(監生)인 주응문(周應文)과 장광려(彭光廬)를 만나 필담을 나누었고, 1792년 1월 10일 김정중은 취호재(聚好齋)에서 정소백(程少伯)을 만나 우의를 다졌다. 1801년 연행 당시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은 취영당과 오류거 등에서 조강(曹江), 전동원(錢東垣), 진전(陳鱣) 등 여러 인사를 만나 정을 토로했고, 1804년 1월 7일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유리창 서루(書樓)에서 한림(翰林) 동이공(佟貽恭)을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1855년 12월 5일 서경순(徐慶淳)은 문화당(文華堂)에서 방소동(方小東)을 만나 학문 논쟁을 기약했고, 1863년 1월 17일 이항억(李恒億)은 유리창 서남쪽의 보문당(寶文堂) 서점에서 한림(翰林) 황상운(黃翔雲), 서자잠(徐子潛) 등을 만나 종일 술을 마셨다. 보리떡 두 쟁반, 익힌 거위 한 쟁반, 찜닭 세 마리, 삶은 돼지 한 마리, 양 내장국 한 그릇, 햇과일 두 쟁반, 임안주 한 병, 계주주 한 병, 남변주 두 병, 잉어 한 마리, 채소 두 쟁반, 금고병 한 큰 그릇, 포도 한 쟁반, 설리 한 쟁반, 땅콩 한 그릇, 귤병 한 쟁반, 오화당 한 큰 그릇은 그들이 마신 술과 먹은 안주의 대략이다.
그 밖에도 많은 만남이 실재했고, 유리창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그 만남은 더 다채롭다. 홍대용이 유리창의 거문고 가게에서 주인 유생(劉生)을 만나 거문고 연주 방법에 대해 토론하고 새로운 연주법을 배우려 했던 것도,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경학가로 서예에 능한 설산(雪山) 저유인(褚裕人)과 문인 오사권(吳思權)을 만나 시와 그림을 주고받은 것도 좋은 예가 될 터이다. 물론 문사들의 역량이나 만남의 깊이 등이 제각각이라 교유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리창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조청(朝淸) 문사들의 만남은 한중 문화 교류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초여름의 날씨가 무더웠다. 나는 매일 수레를 빌려 취영당에 가서 답답함을 풀었다. 갓을 풀고 의자에 기대 앉아 마음대로 책을 뽑아 보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다. 때때로 오류거로 가 도생과 이야기했다. 과거 보는 해라서 각 성에서 거인(擧人)들이 도성 문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유리창에서 많이 노닐었기에, 그들과 말하다가 종종 마음이 맞는 자를 만나기도 했다.
<em><strong>- 유득공(柳得恭),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연행록전집 60</strong></em>
유득공이 잘 증언해주고 있는 것처럼, 연행사들에게 유리창 서점은 단순히 책만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 연행사들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공간이자 식견 있는 서점 주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청조 문사들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약속 장소가 되기도 했고,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으며, 술집마냥 거나하게 취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때로는 서양의 살롱처럼, 때로는 우리네 사랑방처럼, 새롭고 다채로운 만남이 가능한 곳이 바로 유리창이었다.
[출처] : 이홍식 한양대학교 교수: < 조선후기 문화의 창, 북경 유리창>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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