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6.[명품열전螺鈿漆器,金屬活字,佛畵,(高麗船]
6] 나전칠기 - 칠공예·나전기술의 융합 … 불교용품 주로 제작
고려문화의 또 다른 정수를 보여주는 명품은 나전칠기(螺鈿漆器)다. 현재 16점이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점을 빼곤 모두 해외(일본 10점, 미국 3점, 유럽 2점)에 유출돼 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漆工藝)와 나전 기술이 합쳐진, 이른바 기술의 융합에 의해 생산된 명품이다.
나전 기술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에서 건너왔다. 이와 달리 목재제품 등에 옻칠을 입히는 칠공예 기술은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축적돼왔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이 주로 자개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칠공예 기술과 나전기술을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나전칠기가 단일한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세부도. 국화꽃의 붉은색 꽃술과 잎은 채색한 대모, 흰빛 잎과 넝쿨은 나전을 각각 새겨 넣은 것이다. 꽃 주변 테두리는 은과 구리선을 가늘게 꼬아 넣은 것이다. 약 900년 전 만들어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는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사진 일본 당마사(當麻寺)]
대표작은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원 왕실도 옻칠과 匠人 보내달라 요구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枵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 (『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韉極精巧 螺鈿爲鞍)’ (『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거란·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고려지(高麗紙)·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금속활자·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
7] 금속활자 - 유·불교 발달로 책 수요 폭발 … 宋도 고려 서적 부탁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말기의 승려 백운화상이 상하 두 권으로 펴냈다.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고려왕조의 인쇄술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명품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의 한 사람인 최이[崔怡·?∼1249년, 첫 이름은 우(瑀)]다. 그는 최씨 무신정권을 세운 최충헌(崔忠獻·1149∼1219년)의 아들로 국왕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 만큼 절대 권력자였다.
고려 인쇄술을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상정고금예문(詳正古今禮文)』의 편찬을 주도했다. 이규보(1168∼1241년)는 그의 입을 빌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인종 때(1122~1146년) 편찬한 『상정예문』(50권)은 오래되어 빠진 글자가 많아 참고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최충헌)께서 다시 보완해 2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예관(禮官)에게 보내고 또 한 부는 우리 집에 보관했다. 강화도 천도 때 예관이 한 부를 미처 갖고 오지 못했다. 우리 집에 보관된 한 부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선친의 선견지명을 깨달아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여 여러 관청에 보관하게 했다.”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1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진양공(晉陽公·최이)을 대신해 짓다)
1232년(고종19) 강화도 천도 후 최이 주도 아래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다. 최이는 1234년 진양후로 책봉됐고 이규보는 1241년 숨졌다. 이를 볼 때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분묘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국립청주박물관]
몽골 침입기에 금속활자로 책 제작
최이가 직접 쓴 다음 글에 따르면 1239년(고종26) 당시 『상정고금예문』 외에 또 다른 책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사실이 드러난다.
“『남명증도가(南明證道歌)』는 선문(禪門)에서 중요한 책이다. 참선을 하는 후학들은 이 책을 통해 오묘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없애고 전하지 않게 할 수 없다. 이에 기술자를 모아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거듭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重彫鑄字本 以壽其傳焉). 기해년(己亥年:1239)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가 삼가 쓰다.”
책의 정확한 이름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다. 본문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을 거듭 새겼다(重彫鑄字本)”라고 한 것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그대로 뒤집어 목판에 다시 새겼다는 뜻이다.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본으로 인쇄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 책은 현재 목판본으로 전해진다. 1239년은 고려 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다. 천도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금속활자 제작과 인쇄는 천도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현재 전해지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77년(우왕3)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보관돼 있다.
그렇더라도 1440년대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처음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때보다 무려 70년가량 앞선다. 고려왕조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낸 세계 최초의 왕조였다.
활판(금속) 인쇄의 시초는 중국 송나라 인종 때(1041∼1048년 무렵) 필승(畢昇)이란 사람이 ‘교니(膠泥·찰기 있는 점토)’를 이용해 활자를 만든 뒤 불에 구워 활자판에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흙이 쉽게 부스러지는 등 내구성이 약해 실용화에 실패했다. 중국은 명나라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 때(1488~1521년) 비로소 금속활자를 완성한다. 청주 흥덕사의 『직지심체요절』보다 거의 100년이나 늦다.
금속활자는 한번 만들어 놓으면 필요할 때 활자를 집어내 판을 짜 손쉽게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활자를 금속으로 만드는 주조(鑄造)기술, 활자가 흐트러지지 않게 판을 짜는 조판(組版)기술, 금속에 잘 묻는 먹 제조 기술 등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천혜봉, 「세계 초유의 창안인 고려주자(鑄字)인쇄」, 1984).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실용화는 어려웠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기 전에 흥덕사라는 지방 사찰에서도 금속활자로 책을 찍을 정도로 실용화에 성공했다.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술이 밑거름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조상의 뛰어난 지혜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당시 고려의 지식과 기술 수준이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선 기술 차원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인쇄문화 기술이 꾸준히 축적돼 왔다. 나무에 글자를 새겨 책을 찍어내는 목판인쇄술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712∼756년) 시작됐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국보 126호)이다.
통일신라 때 목판인쇄술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증거다. 고려 역시 목판인쇄술로 초조대장경(1011년)과 재조대장경(1236년)을 완성했다.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불교 경전을 모아 목판인쇄로 조판한 거창한 사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와 금속활자로 만든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목판인쇄를 하기 위해선 나무의 결을 삭히고 쪄서 진을 빼고 살충한 다음 충분히 말려 판이 뒤틀리거나 깨어지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새기려는 책의 본문을 반듯한 글씨로 필사해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인 뒤 각수(刻手·돌이나 나무에 조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가 새겨야 한다.
이는 오랜 시일이 걸리고 경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여러 부를 찍어 낼 수 있지만 한 책을 인쇄하는 것으로 목판인쇄의 수명은 다한다. 이러한 단점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려는 노력 속에서 금속활자가 창안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뒤 금속활자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재조대장경을 조판할 정도로 인쇄기술이 발달됐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고려인들의 왕성한 지식욕이 금속활자가 창안된 또 하나의 원인이다. 정도전의 글이 그런 사정을 잘 알려준다.
“무릇 선비로서 학문의 길로 향할 마음이 있으나 서적을 얻지 못하면 또한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서적이 많지 않아 배우는 자가 책을 폭넓게 읽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역시 이를 오래전부터 걱정해왔다. 그래서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활자를 주조해 경·사·자·서(經史子書)와 제가(諸家)의 시문부터 의학·병서·법률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적을 인쇄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이를 모두 얻어 독서해 공부하는 때를 놓쳐 한탄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한다.” (『삼봉집』 권1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
정도전은 지식의 확산을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고 각종 서적을 인쇄해 학자들에게 널리 보급하자고 했다. 금속활자가 창안된 배경에는 고려인의 강한 지적 욕구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 없는 책 공급
고려는 건국 초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전국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에 따라 많은 지속적인 서적의 제작과 유통이 절실했다. 인쇄술이 발달될 토양이 충분했던 것이다.
“서경유수가 보고했다. ‘서경에서 과거 응시자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손으로 많이 베껴 틀린 글자가 많습니다. 비서각에 소장한 『구경(九經)』 『한서(漢書)』 『진서(晋書)』 『당서(唐書)』 『논어』 『효경』 등의 역사서와 경전, 여러 문집, 의(醫)·복(卜)·지리(地理)·율(律)·산(算) 등에 관한 서적을 나누어 주어 여러 학교에 두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관리들에게 각각 1부씩 인쇄해 보내도록 했다.” (『고려사』 권7 문종 10년(1056) 8월)
고려왕조가 많은 서적을 인쇄한 이유는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가 없는 책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개경은 물론 경주·충주·청주·성주·진주·남원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책을 발간했다.
무신정권 때 명종은 유신들에게 『자치통감』의 교정을 보게 한 뒤 여러 군현에서 분담하여 출간하게 했다.(『고려사』 권20 명종 22년(1192) 4월) 고려 때 지방에서 서적을 인쇄했다는 사실은 당시 지식층의 저변이 그만큼 넓었다는 증거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불교경전 수집과 출간이 활발했던 점도 고려의 인쇄술을 발달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선종 2년(1085) 4월 몰래 제자 2인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 왕이 송나라에 의천의 귀국을 요청하자 귀국한 의천은 불교와 유교 서적 1000권을 가져왔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거란과 송나라에서 사온 4000권의 책을 모두 간행했다.” (『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의천 열전)
의천이 당시 4000권의 책을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고려는 유교와 불교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필요해 인쇄술을 장려하게 된 것이다. 고려에서 인쇄술이 발달돼 많은 서적이 출간된 사실을 중국도 알고 있었다. 송나라 황제는 고려 사신에게 127종의 책 목록을 주어 구하려 했다(『고려사』 권10 선종 8년(1091) 6월).
책은 지식을 생산·공급해 인류문명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으면 책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고려 때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인쇄술이 그 뒤 더 이상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자와 한문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서양의 알파벳은 숫자가 적고 글자 구조도 단순한 데 비해 한자는 글자 구조가 복잡한 데다 수천 자를 일일이 주조해야 해 기술상의 어려움이 컸다.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쓸 수 없는 난해한 한자와 한문은 결국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지체시켰다.
인쇄술 역시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제한적인 기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후 지식과 기술의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8] 불화(佛畵) - 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
1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권 34. 고려 1334년, 보물 752호. [사진 호림박물관]
고려불화(佛畵)는 고려청자와 함께 한국 미술을 대표할 정도의 빼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불화 약 160점은 대부분 원(元)나라 간섭기인 14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그중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불화는 흔히 말하는 탱화이다.
붙박이 벽화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실내에 봉안하거나 사찰 바깥의 야외 법회용인 괘불(掛佛)의 두 가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원의 간섭을 받던 무렵 고려엔 새로운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발복(發福)을 위해 불화를 제작해 특정 사찰이나 저택에 원당(願堂)을 지어 이를 안치했다. 불화는 이때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유홍준의 한국미술사2』, 2012).
고려불화의 초기 모습은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서 찾을 수 있다(그림1 참조). 사경(寫經)은 글자 그대로 베껴 쓴 경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불교경전 안에 들어 있는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불화인데, 불교 경전을 쉽게 대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따라서 사경변상도는 ‘읽는 경전’이 아니라 ‘보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불화는 역시 변상도와 같이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린 것이지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변상도와 다르다. <그림1>의 변상도엔 보현보살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 설법을 하는데, 그 앞에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불화 역시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 많아
“착한 남자여, 남방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에 관자재(觀自在)라는 보살이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어떻게 보살의 행동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도리를 닦는지 여쭈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었다. ‘성현들이 사는 바다 위의 산, 보물들로 장식된 지극히 깨끗한 곳, 꽃과 과일나무 숲이 우거진 곳, 샘물과 연못이 넘실대는 곳, 용맹장부 관자재보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산에 있다.
그대는 가서 공덕을 물어라. 그대에게 큰 방향을 알려주리라.’ 그때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이 노래를 듣고 보살의 발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바위 골짜기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에 보드라운 향내 나는 풀이 땅에 깔려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금강보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보살은 ‘깨달음’, 즉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존재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수행자가 보살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가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서 예배를 올리는 장면이 하나의 그림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불화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달이 물에 비친 듯이 흰 천을 걸친 청정(淸淨)한 보살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2 ‘수월관음도’(1310년) 비단채색.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 소장. [중앙포토]
고려 때 제작된 수월관음도 가운데 최고의 명품은 충선왕(1308~1313년 재위)의 비(妃)인 숙비(淑妃)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원래 크기 500cm, 너비 270cm)로 제작돼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크기 자체가 우선 다른 불화를 압도한다. 또한 현존 불화 가운데 최고의 예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 속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그림 2 참조).
그림의 중앙에 아미타불이 붉은 색 대의(*설법용 옷)를 입고서 연꽃으로 장식된 자리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꽃과 구슬로 장식된 얇은 흰 비단천을 머리에서 두 팔을 거쳐 다시 아래로 길게 내려뜨리고, 아미타불은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우측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아래 선재동자가 보살을 올려보면서 서원(誓願)을 빌고 있다. 보살 뒤로 기암괴석을 뚫고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불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왼쪽 상단의 관음보살 머리에서 하단 오른발까지 대각선 구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원만한 얼굴 모습과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형태미를 보여준다.
옷 주름과 흰 사라천의 뚜렷한 선과 붉고 검은 필선이 대조를 이루어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관에 금으로 그려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초문무늬, 사라천 끝단의 굵고 탐스런 금색 당초문 무늬, 연꽃무늬, 꽃무늬 그림은 화려함과 치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문명대, ‘한국 괘불화의 기원문제와 경신사장 금우문필(鏡神社藏 金祐文筆) 수월관음도’, 2009).
당대 최고의 화가 다섯 명이 제작
이 불화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따르면 충선왕의 비인 숙비(淑妃)가 발원하여 화사(畵師) 김우(金祐)와 화직(畵直) 이계(李桂)·임순(林順)·송연색(宋連色)·최승(崔承) 등 다섯 명의 화가가 1310년(충선왕2) 5월에 완성한 것이다. 화가가 소속된 관청은 왕명을 전달하고 왕실의 각종 물품을 관장한 액정국(掖庭局)과, 교서와 각종 문서를 작성한 예문춘추관이다.
한마디로 고려왕실이 주도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제작한 것이다.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비인 숙창원비(淑昌院妃)였으나, 1308년 충렬왕 사후 충선왕비가 되어 숙비(淑妃)로 호칭이 바뀌었다. 숙비 김씨는 몽골군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8년 몽골과 형제맹약을 주도한 명신 김취려(金就礪)의 증손녀였다.
명문가 출신인 김씨는 처음 진사 최문(崔文)과 결혼했다. 사별 후 충선왕의 주선으로 충렬왕 비가 되었다. 충렬왕의 사후 충선왕은 김씨를 간통하고 다시 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세간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충선왕이 부왕(*충렬왕)의 비인 숙창원비를 간통하자 우탁(禹倬)이 흰옷에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비난의 상소를 올렸다. 근신들이 놀라서 왕 앞에서 감히 상소문을 읽지 못했다. 우탁은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그대들은 근신으로 국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죄를 알고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 국왕 좌우의 신하들은 두려워하고, 충선왕도 부끄러워했다.” (『고려사』 권109 우탁 열전)
우탁은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김씨를 간통한 충선왕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했던 것이다. 숙비 김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두 국왕의 사후 모두 그녀의 집에 빈소를 차릴 정도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충선왕은 재위 5년간 줄곧 정비(正妃)인 원나라 출신의 계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국내의 중요한 정사에 숙비 김씨가 깊숙이 관여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가 된 후 세간의 비난이 쏟아져 그의 마음 한 구석엔 번뇌와 우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어떻게 제작했을까? 불화는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불화의 주 색깔인 붉은 색과 녹색·청색은 각각 주사(朱紗)·석록(石綠)·석청(石靑)이라는 광물성 안료를 재료로 한 것이다.
해당 원석을 갈아 가루를 만든 후,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걸러서 입자를 크기별로 분류한다. 큰 입자의 안료는 짙은 색, 작은 입자의 안료는 옅은 색을 내는 데 사용된다. 아교는 동물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인데, 이를 물에 녹여 적당히 농도를 조절한 후 여기에 안료가루를 개어 사용한다.
불화 채색 방법은 바탕천의 뒷면에 색을 칠하는 배채(背彩)법 혹은 복채伏彩)법이다. 뒷면에 색을 칠해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한 후 앞면에서 채색하여 음영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이는 빛깔을 보다 선명하게 하면서 변색을 지연시키며, 두텁게 칠해진 안료가 바탕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채색 때는 얼룩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배채법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랫동안 보존해준 중요한 기법이다(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의 제작기법’, 2010년).
물론 고려불화는 고려 후기에 처음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 중기인 의종(1146∼1170년 재위) 때도 불화를 제작해 사용했다.
“(영의는) 국왕(*의종)에게, ‘만일 장수하시려면 반드시 천제석(天帝釋)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했다. 국왕은 두 부처의 그림(*불화)을 많이 그려 중앙과 지방 사원에 보내 국왕의 장수를 위한 법회를 열게 했다.” (『고려사』 권123 영의(榮儀) 열전)
이 기록은 이미 고려 중기에 불화가 성행했다는 사실과 함께 불화의 용도를 알려준다. 불교에서 신앙의 상징은 불상(佛像)과 불화다. 불화는 불상이 표현하지 못하는 신앙의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기능이 있다.
불상 제작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원의 내용에 알맞은 불상을 안치하기 힘들 경우엔 불화를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불화는 불상 제작에 따른 비용과 노력을 절감해주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려와 원나라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가운데 새로운 지배층 권문세족 사이에서 개인의 원당을 세우는 게 유행하면서 불상 대신 불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불화의 수요가 많아진 것은 이 때문이다
9] 고려선(高麗船) - 뱃전에 짧은 창검 꽂은 ‘과선’ 개발 … 거북선으로 진화
‘황비창천(煌丕昌天:아주 화창한 하늘)’이 새겨진 고려 구리거울. 고려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다. 조선강국의 DNA를 고려의 조선기술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일까. 고려는 당시 독자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기술로 만든 선박을 고려선(高麗船)이라 한다.
“1274년(원종15) 원나라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홍다구(洪茶丘)에게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데 만약 만양(蠻樣·蠻은 남중국, 즉 남송) 식으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제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전라도에 있던 김방경은 이에 고려의 조선기술(本國造船樣式)로 배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 열전)
남송(南宋)식보다는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단기간에 전함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다른 조선기술을 고려가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김방경은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했다. 그런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장군 나유(羅裕)가 원나라에 보고하기를, ‘금년(1274년) 정월 3일 대선(大船) 삼백 척을 건조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공(許珙)을 전주 변산(邊山)에, 홍록주(洪祿遒)를 나주 천관산(天冠山·장흥)에 각각 보내 재목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시중 김방경을 도독(都督)으로 삼아 정월 15일 함께 모여 16일에 시작해 5월 그믐에 크고 작은 배 구백 척을 완성했습니다. 지금 배들은 금주(金州·김해)로 출발했습니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27 원종 15년(1274) 6월조)
원나라 황제의 명령대로 이해(1274년) 정월에서 5월까지 모두 900척의 전함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만양식, 즉 남송의 기술이 아니라 고려 독자의 조선기술로 불과 다섯 달 사이에 건조했다. 이렇게 만든 900척의 전함으로 이해 10월 고려는 몽골군과 함께 제1차 일본 정벌에 나선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간행한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표지의 고려선 조감도.
日 정벌 당시 中 전함보다 실전에 유용
1281년 원나라는 고려군 외에 원나라에 복속된 남송 출신의 군사까지 징발해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으나 역시 정벌에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자(충선왕)가 황제를 뵈었을 때… 정우승(丁右丞)이란 자가 아뢰기를, ‘(2차 정벌 때) 강남(江南·남송)의 전선(戰船)은 크기는 하지만 부딪치면 깨어졌습니다. 정벌에 실패한 원인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다시 배를 만들게 해 일본을 치면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1292) 8월)
선체는 크지만 쉽게 파손된 남송 전선의 취약점을 언급하면서, 정벌에 성공하기 위해선 고려에서 배를 만들 것을 주문한 내용이다. 즉 고려의 전함이 작기는 하나 매우 튼튼해 실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얘기다. 당시 중국인도 일본 정벌 당시 ‘크고 작은 전함이 파도에 휩쓸려 많이 부셔졌으나 오직 고려의 전함은 튼튼해 온전하였다’고 증언한 사실(『秋澗先生大全文集』 권40 汎海小錄)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고려는 값싼 비용으로 빠르게 배를 만들면서도 중국 전선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독특한 선체 구조를 가진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선의 모습과 제작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고려) 관선(官船)의 만듦새는 위는 띠를 이었고 아래는 문을 내었다.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배의 좌우를) 가로지른 나무(橫木:혹은 駕木·멍에)를 서로 꿰어 치켜올려서 포판(鋪板·누각)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선박 몸체는 판책(板簀·판자)을 쓰지 않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기만 했다.” (『고려도경』 권33 주즙(舟楫) 관선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선의 모습과 제조 기술이다. 고려선은 전체적으로 판자를 쓰지 않고 통나무 형태를 그대로 가공해 제작했다. 자연히 두꺼운 외판(배 옆면)과 무거운 저판(배 밑면)으로 제작돼 외형이 둔중하고 속도가 느려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선체가 무거워 바람이나 파도에 쉽게 전복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선은 전함이나 물자·식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적합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선은 대부분 목질이 강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재료로 해 제작되었다(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의 연구와 교재화』, 2012년).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 원정용 전함 제작을 위해 그 재료를 변산반도와 장흥 천관산에서 구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선박용 소나무 제작을 위한 산(封山)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소나무가 풍부했다.
배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 구조가 강점
고려선의 건조 기술은 다음과 같다. <그림 참고> 소나무와 같은 원목을 여러 개 결합해 평탄한 저판(배 바닥)을 만들고, 거기에다 미리 조립한 선수재(船首材이물비우)와 선미재(船尾材고물비우) 등을 고착시켰다. 굵은 가룡목(駕木)을 배의 외판, 즉 배의 좌우 바깥으로 뚫고 나오게 한다.
그 위에 나간을 세우거나 갑판을 깔았다. 이렇게 설치된 여러 개의 가룡목이 선체 내부의 칸막이 구실을 했다. 칸막이를 중국과 같이 판자나 삿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룡목을 뱃전 밖으로 연장해 그곳을 잘 이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박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배의 모양은 배의 옆 부분이 좀 부른 장방형의 상자 모양이었다. 이러한 선박 구조는 배의 밑바닥이 좁은 첨저선형(尖底線型)의 배에는 사용할 수 없다. 실제 고려선은 배의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형(平底船型)을 특징으로 한다.(김재근, 『한국 선박사연구』, 1984년) 이러한 선박 제조 기술은 이미 고려 초기에 나타난다.
고려의 군선(軍船) 역시 이러한 선박 구조를 갖고 있다. 궁예 정권 때 왕건은 개성 해상(海商·바다상인) 세력의 후예답게 직접 군선을 제작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914년 궁예는) 왕건에게 배 백여 척을 더 만들게 했다.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步)이며 위에 망루를 만들고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 삼천여 명과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 (『고려사』 권1 태조총서)
후백제 근거지인 나주를 공격하기 위해 태조 왕건은 16보(96자, 1보는 6자), 즉 길이 약 30m나 되는 큰 선박을 제조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중국의 전선이 평균 15m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형 선박을 제조할 능력을 보유했다.
9세기 후반 이래 장보고의 활약과 개성의 왕건 집안 등 해상 세력이 대두하고, 이들은 대내외 해상무역을 위해 선박을 제조하면서 고려 초기에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근래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의 일부다. 1018년(현종10) 4월 고려는 진명 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함경도 덕원 소재)에서 여진의 해적선 8척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잡혀 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일본에 돌려보낸 사실이 있다. (『고려사』 권4)
이때 귀국한 일본인이 당시 전투에 사용된 고려 병선(兵船)을 목격한 기록이다. 현종(1009~1031년 재위) 당시 고려 병선의 특징이 잘 묘사돼 있다.
여진족 해적 퇴치와 조운·무역에 활용
“고려국의 병선 수백 척이 쳐들어가 적(여진)을 치자, 적들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고려군의 사나운 기세 앞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려의 병선은 선체가 높고 크다. 무기가 많이 있어 배를 뒤집고 사람을 죽이자, 적들이 고려군의 용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려선에 들어가 보니 이같이 넓고 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층으로 만들어져 상층에는 노가 좌우에 각각 4개가 있으며 노를 다루는 자가 4∼5명 정도 있었다. 병사 20여 명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층에는 좌우에 각각 7∼8개의 노가 있다. 뱃머리는 적선과 충돌하여 깨부수기 위해 선체 바깥에 쇠로 만든 뿔이 있다. 선내에는 철갑옷과 크고 작은 칼과 갈퀴 등의 무기가 준비돼 있다. 적선에 던져 배를 깨부수기 위한 큰 돌(大石)들도 준비돼 있다.” (『小右記』(寬仁3년-1019년 8월)
뱃사공을 제외한 약 80명의 병사가 고려의 병선에 탄 모습이 실감나게 기록돼 있다. 참고로 1374년(공민왕23)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거느린 부대가 배 315척에 2만5605명이라 한다. 척당 약 80명이 탄 셈이다. 조선 초기에 대형 전함의 정원 역시 80명이었다. 요컨대 고려 전기부터 이런 대형 전함을 제조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술이 발달한 배경은 뭘까. 고려왕조에선 개방정책 덕에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해와 서해 항로와 한강 등 내륙 수운(水運)을 통해 전국의 조세를 수도 개경으로 거두어들이는 조운(漕運)제도를 실시한다.
또 동해안 지역은 해로를 이용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막기 위해 연해안 거점도시에 해상 방어관청인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한다. 이 과정에서 조운선과 전선 같은 선박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선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선 기술은 조선왕조로 계승돼 우리나라 전통 선박 한선(韓船)의 기원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의 군선(軍船)이 주목된다. 군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과선(戈船)이라 부른 이유다.
이런 형태의 고려 전기 과선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사이에 검선(劒船)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엔 구선(龜船·거북선) 제작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고려선 제작 기술은 이렇게 조선시대 중반까지 계승됐다.
[출처] 고려사의 재발견 6.[명품열전螺鈿漆器,金屬活字,佛畵,(高麗船]|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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