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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재발견 7 -[여진정벌,묘청의 난,무신정변]

문수봉(李楨汕) 2018. 2. 1. 15:26

고려사의 재발견 7 -[여진정벌,묘청의 난,무신정변] 

 

 

 

1.  반란과 정변의 불씨 남긴 여진 정벌 책임론

 

 

윤관의 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사적 제323호. 묘역에는 묘와 영당(影堂), 교자총(較子塚), 신도비(神道碑), 재실(齋室) 등이 있다. 조용철 기자

 

부왕 숙종의 상을 마친 예종은 1107년(예종2) 12월 17만의 군사로 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한다. 1104년(숙종9) 1차 여진 정벌이 실패한 지 3년 만이었다. 넉 달 만인 이듬해 3월 정벌지역에 9성(城)을 쌓았다. 사령관 윤관(尹瓘)이 이끈 정벌은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윤관은 휘하의 임언(林彦)을 시켜 9성 중 하나인 영주(英州)성 남쪽 청사에 정벌의 공을 기리는 글을 쓰게 했다.

“『맹자』에, ‘약한 것은 진실로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야 이 말이 진실이란 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은 우리보다 군사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데도 병란을 일으켜 많은 백성을 죽이고 포로로 삼았다… 숙종께서 대로해 군사를 정비해 대의로써 토벌하다가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은 3년상을 마친 뒤,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잇는 것이라는 옛 사람의 말에 따라 어찌 정의의 깃발을 들어 무도한 자를 쳐서 선왕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 (『고려사』 권97 윤관 열전)

윤관은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은 무도한 여진족을 약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이 강한 고려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강약의 논리로 정벌을 정당화했다. 또 자신의 정벌은 숙종과 예종 두 국왕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다. 한 달 뒤인 4월 윤관이 개선하자 예종은 그에게 ‘오랑캐를 평정하고 영토를 넓혀 나라의 근심을 잠재운(平戎拓地鎭國)’ 공신이란 칭호를 주고 2인자인 문하시중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승패를 결정짓는 전쟁은 끝이 아니라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7만 고려 대군과의 전면전을 피해 내륙으로 군사를 후퇴시킨 여진은 고려 주력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대규모 반격을 시작한다. 강약의 논리로 여진을 조롱한 영주 성벽에 내건 현판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윤관척경입비도’는 윤관이 9성을 쌓고 영토를 개척한 그림이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9城 쌓고도 여진 공세로 수많은 희생


여진의 반격을 예상해 9성 수축을 반대한 의견도 있었다. 정벌에 참여한 병마부사 박경작은 윤관에게 ‘무공을 떨쳤으니 군사를 거두어 만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랑캐 땅 깊숙한 곳에 성(*9성)을 쌓는 일은 쉽지만, 지키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윤관은 이를 무시하고 9성을 쌓았다. 그 후유증은 실로 컸다.

“처음 조정에선 병목[甁項] 지역을 빼앗아 방어하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빼앗고 보니 이곳엔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진의 공세에도) 9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진 않았지만 전투에서 아군은 많이 희생되었다.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 적들이 복병을 두어 성과 성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징발하자 온 나라가 소란해졌고, 기근과 역병으로 원망이 일어났다.” (『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여진 지역 깊숙한 곳에 쌓은 9성은 실제로 여진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이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 방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벌에 따른 군사 징발에다 기근·역병까지 겹쳐 온 나라가 소란할 정도로 민심이 동요했다. 여진의 군사는 윤관이 귀환한 직후인 이 해(1108년) 4월부터 한 달간 9성의 하나인 웅주(雄州)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등 전면 공세를 취한다.

 

이 해 5월엔 부사령관 오연총이, 7월엔 사령관 윤관이 다시 출정한다. 많은 역사서가 9성 수축을 여진 정벌의 성과로 기록한 것은 편향적이다. 여진 정벌 후 9성 수축까진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9성을 반환한 이듬해(1109년) 7월까지 1년간 여진의 일방적인 공세에 시달린다. 9성 수축이 패전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9성 반환 직전인 이 해(1109년) 6월부터 사령관 윤관에게 패군(敗軍)의 죄를 묻는 처벌론이 제기된다. 9성 반환론도 동시에 제기된다. 대부분의 관료집단이 처벌론과 반환론에 동의한다.

“김인존은 ‘토지는 백성의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성을 서로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땅을 돌려주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契丹)과 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정벌 지역은 우리 땅이고 백성도 우리 땅이라고 정벌의 이유를 거란에 통보했는데, 거란이 조사해 사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면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북쪽의 거란과 함께 9성 설치로 동쪽의 여진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코 나라에 복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96 김인존 열전)

고위 관료들, 윤관 처벌 요구하며 출근 거부


9성 반환은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해소하고 거란과 여진을 동시에 방어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한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벌을 주도한 예종과 윤관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이 해 7월 재상 등 3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모여 9성 반환 여부를 논의했는데 이들은 모두 반환론에 동의했다. 국왕은 여진에 9성 지역을 반환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처벌 대신 윤관의 지휘권만 박탈한다. 관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처벌을 요구한다. 이듬해(1110년) 5월까지 처벌론은 계속 제기된다.

“왕(*예종)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조회를 했다. 재상(宰相) 최홍사와 김경용이 대간과 함께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묻는 상소를 올렸다. 왕이 듣지 아니하고 곧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최홍사 등이 궁궐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죄를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모두 집으로 간 후 출근하지 않아 관청이 모두 비었다. 왕이 평장사 이오와 중서사인 이덕우 등을 불러 당직에 숙직시켰다. 최홍사 등이 수십 일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고려사』 권13 예종 5년(1110) 5월)

관료들은 처벌론이 관철되지 않자 수십 일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업무를 보지 않은 항의성 시위를 벌인다. 절대권력의 국왕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진 정벌의 후유증은 국왕과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종은 끝까지 윤관을 옹호해 명예를 회복시킨다. 즉 이 해 12월 윤관을 다시 문하시중과 함께 판병부사로 임명해 군사권을 맡긴 것이다. 윤관이 사양하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윤관)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왕(*숙종)의 남기신 뜻과 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서 적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9성을 쌓아 나라의 오랜 치욕을 씻은 공은 실로 크다… 관리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내가 그대의 잘못을 따지지 않은 것은 다시 공을 세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여진 정벌은 이같이 두 국왕의 의지가 담긴 것이며, 그 의지를 몸소 실천한 이가 윤관이었다. 따라서 윤관 처벌론은 단순히 패전 책임을 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숙종·예종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에 반대하는 관료집단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예종은 윤관을 끝까지 옹호했던 것이다.

예종은 처벌론을 잠재우고 윤관을 다시 기용해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윤관은 다시 기용된 지 5개월 후 사망함으로써 이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될 수 없었다. 측근 윤관의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관료집단의 동의를 받지 못한 정책은 절대군주로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던 숙종과 예종의 정치는 9성 반환과 윤관 처벌론을 계기로 분출된 관료집단의 뿌리 깊은 불신과 저항에 부닥쳐 추진력을 잃었다.

숙종과 예종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는 무엇일까. 숙종은 외척 이자의(李資義)가 병약한 헌종 대신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 앉히려 한 이자의를 제거하고 즉위했다. 숙종은 기득권층인 외척과 문벌귀족 중심의 정치를 청산하고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부국강병’이라는 실용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은 적극적인 대외 경략과 과감한 재정 개혁을 통해 개인이나 사문(私門)이 아닌 국가의 부를 확대하려 한 정책이다. 당시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모델로 삼았다. 『고려사』에서도 숙종의 정책을 또한 신법이라 불렀다. 어진 정치(仁政)와 덕을 앞세운 덕치(德治)를 내세운 유가(儒家)적 군주상과 달리 숙종은 법가(法家)적인 군주상을 지닌,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이자겸·묘청의 난과 무신정변으로 번져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구체적으로 수도 천도, 화폐 유통, 여진 정벌의 세 가지다. 예종 전반기까지 추진된 이 정책을 앞장서서 실현한 인물이 윤관이다. 윤관은 숙종의 동생인 승려 의천(義天)과 함께 숙종을 보좌한 최측근이었다.

 

거란과 송나라는 갑작스럽게 헌종의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숙종을 의심했다. 윤관은 두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즉위의 정당성을 알렸다. 그는 화폐를 주조하고 유통시켜 문벌귀족 대신 국가가 유통과 경제권을 장악하는 데 앞장섰다. 문벌귀족의 정치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을 신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숙종 때 여진 정벌에 실패하자 별무반 편성을 건의했고, 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종 때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윤관은 두 국왕이 가장 신뢰한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여진 정벌이 실패하자 관료집단은 이를 빌미로 윤관 처벌론을 제기해 두 국왕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를 부정하려 했다. 이로써 약 15년간 시행된 한국사 초유의 부국강병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파장은 컸다.

 

국왕과 문벌귀족 세력의 극렬한 대립과 갈등을 낳았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물론 끝내는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여진 정벌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은 그 신호탄이었다.

 

 

2. 이자겸과 형제맹약

- 고려, 금나라 ‘신하’로 전락 … 묘청의 난 불씨 되다

 

 

고려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고려 후기 제작. [호암미술관 소장]

 

역사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의 몫이었다. 이상주의자에게 권력은 아침 햇살 앞의 이슬에 불과했다. 현실정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란에게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宋)나라의 왕안석이나 현실정치의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숙종과 윤관이 그런 존재였다.

숙종의 사후 안식처인 ‘천수사(天壽寺) 공사를 중단하라’는 관료집단의 매정한 요구는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진 정벌 한 해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예종은 국정쇄신을 위해 신하들에게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장에 부닥친 문제가 천수사 건립 문제였다.

“짐은 천수사 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선왕(*숙종)께서 공사를 시작했을 땐 반대가 없었는데 승하하신 이후에야 공사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지세의 길흉을 따져 중단을 요구한 것은 하찮은 이유에 불과하다. 천수사를 세우려 한 선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 다만 올봄에 공사를 강행한 것은 잘못이니, 3년 후에 시행할 것이다.” (『고려사』 권12 예종 원년(1106) 7월조)

천수사는 숙종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숙종의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다. 역대 국왕은 모두 원찰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숙종 재위 땐 반대하지 않다가 관료집단이 사후에야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관료들은 선왕의 명복을 빌 장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 속엔 숙종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묵살한다. 3년 뒤 공사를 재개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석 달 뒤인 이해 10월 윤관에게 명령해 공사를 강행한다.

 

 이듬해에는 윤관을 앞세워 여진 정벌을 강행한다. 현실정치를 무시한 예종의 정치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관료집단, 민생 안정 앞세워 개혁 반대


여진 정벌 실패와 윤관의 사망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예종은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 그 돌파구로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이씨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왕(*문종)은 이자연(李子淵)의 딸을 비로 삼고, 그에게 (최고 명예직인) 수태위(*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 (이자연은) 뒷날 문종의 공신으로 문종의 신주와 합사(合祀)되었다. 아들도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의 작위를 받았다. 이정(李頲)은 문하시중(*종1품), 이의(李顗)와 이전(李顓)도 모두 재상(*2품 이상)을 역임했다. 세 딸은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이호(李顥)의 아들이다.” (『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 때 그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인주 이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된다. 아들도 작위를 받거나 재상이 되었다. 문종 이후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까지, 숙종을 뺀 다른 국왕들은 모두 이자연 때부터 손자 이자겸 때까지 3대에 걸쳐 이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맞는다.

 

이 집안과 고려왕실 간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문종의 모후는 안산 김은부(金殷傅)의 딸이다. 고려왕실 초기에 ‘백년 근친혼’의 관행을 깨고 처음 맞이한 이성(異姓) 후비였다. 김은부는 이자연의 조부 이허겸(李許謙)의 사위이다. 이허겸 때부터 인주 이씨는 이미 명문가 반열에 올라섰다. ‘가문의 영광’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예종은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았지만, 부왕 숙종을 위한 정치는 포기해야 했다. 나아가 신법에 반대한 문벌귀족세력이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뒷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실책을 저지른다.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인존·고영신·최계방 등 유교 문신 귀족세력은 당장 숙종과 예종이 시도해온 신법에 반대한다.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모두 갖추어 있는데, 떠들썩하게 (신법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성헌을 지키고, 그것을 잃지 않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고려사』 권97 고영신 열전)

“공은 정사를 처리하면서 조상의 법을 함부로 고치거나, 새로운 법(*新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키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았다.” (「최사추(崔思諏) 묘지명」)

곽상(郭尙)은 윤관이 화폐유통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풍속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반대했다(『고려사』 권97 곽상 열전).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면 될 일이지, 굳이 새로운 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신법으로 불린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화폐 유통과 여러 형태의 조세를 신설해 재정을 확대하고, 확보된 재원으로 이민족 정벌과 같은 대외 팽창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는 외치론(外治論)이었다. 반면 관료집단은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과 민생 안정에 중점을 둔 내치론(內治論)을 내세웠다. 예종은 내치론자와 타협한다.

이자겸, 측근에게 피살 … ‘석 달 천하’ 종지부


예종의 사후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국은 급변한다. 잡은 권력은 쉽게 놓치지 않는 법이다. 이자겸은 예종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비로 들인다. 인종은 모후의 여동생인 두 명의 이모를 비로 맞아들인다.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 고려 최고작위)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국왕 생일에만 붙이는 이름)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1126년(인종4) 2월 인종은 측근 김찬·안보린 등을 시켜 외척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그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거사에 실패한 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거처할 정도로 왕실과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석 달 후 인종은 이자겸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자겸의 ‘석 달 천하’는 막을 내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새로운 사태가 불거진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125년(인종3) 5월 금나라는 고려가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지 않고 황제라 표현한 것을 구실로 삼아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다. 금나라는 형제맹약을 했던 고려에 신하의 예를 취하라고 압박한다. 조정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에게, 당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하라 일컫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어 무릇 화친할 일은 모두 했습니다. 지금 송나라도 거란과 서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여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오랑캐 나라에 굴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 성인은 ‘임시방편(權)으로 도(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고려사』 권97 김부의(金富儀) 열전)

외척 발호와 문벌귀족 失政에 민심 이반


1125년 5월 금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 직후에 김부식의 아우 김부의가 제기한 견해이다. 이에 ‘대신들은 반대하고 금나라 사신을 베어 죽이자고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상들은 이를 비웃고 배척하여 금나라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고려사』 권97 김부의 열전).

 

그러나 김부의의 견해 속엔 군신관계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통해 고려의 안정을 유지하자는 현실론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김부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주장이 당시 조야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고 권력자 이자겸도 김부의와 같은 견해였다.

“금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 갑자기 중흥하여 요와 송을 멸했다. 그들은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형세로 보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야 한다.” (『고려사절요』 권9 인종 4년 3월조)

이자겸은 이듬해(1126년) 3월 마침내 금나라에 칭신(稱臣)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는 거란과 약 100년간의 분쟁을 벌인 끝에 보주(保州)를 금나라의 양해를 받아 1117년(예종10) 고려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신흥강국 금나라와의 마찰은 지배층에게 커다란 부담이 됐을 것이다. 칭신 결정을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급 관료집단과 일반인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에 대한 칭신을 고려왕조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이자겸의 난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평소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런 불만은 묘청의 난으로 폭발한다. 

 

 

 

 

3. 김부식과 묘청의 난 -  학자 김부식, 인종도 쩔쩔매는 냉혹한 권력자 변신

 

 

고려문신이자 유학자인 김부식 선생의 표준 영정. 작은 사진은 삼국사기. [중앙포토]

 

1123년(인종1) 송나라 사신 서긍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커다란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해 글을 잘 짓고 예와 지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을 받기로는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고려도경』 권8 인물조)

한 달가량 고려에 체류한 그가 남긴 평가 속에는 그가 전해들은 고려인의 얘기가 섞여 있어, 당대 고려인의 평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서긍의 눈에 비친 49세의 김부식은 고금(古今)을 꿰뚫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박식하고 총명함)의 기백을 지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지 4년이 지난 1139년(인종17) 김부식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국왕 인종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여러 글을 읽게 하고 그를 칭찬하면서, ‘사마광의 충성스러운 절의가 이렇게 훌륭한데 왜 사람들은 당시 그를 간사하다고 했는가?’ 하고 물었다. 김부식은, ‘왕안석의 무리들과 서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지, 잘못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송나라가 망한 것은 왕안석 때문임이 분명하다’라고 했다.” (『고려사절요』 권10 인종17년 3월)

 

 

왕권에 집착한 국왕 인종의 자충수


김부식은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 한 사마광의 구법(舊法)을 더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4년 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총사령관이었다.

 

왕안석에 빗대어 금나라 정벌과 서경 천도와 같은 변법(變法: 신법)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음을 인종에게 알리려는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인종은 왕안석의 신법이 송나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해 김부식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 대화 속에서 묘청과 손을 잡고 개경 귀족을 억누르고 새 정치를 추구한 인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종 즉위 초에 최고의 학자인 김부식은 약 20년이 지난 이제 국왕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권력자로 변모했다. 왜 이렇게 상황이 급변했을까? 오로지 국왕 인종의 자충수 때문이다.

1126년(인종4) 이자겸은 제거되었지만 ‘개경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갔다. 그 부담은 인종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실추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인종은 새로운 정치를 모색한다.

 

정치의 중심 무대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 했고, 그에 화답한 세력이 개경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서경의 묘청,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다. 그들은 1128년(인종6) 8월 인종이 서경을 방문했을 때 서경에 새 궁궐을 짓고 새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한다.

“묘청 등은 말한다.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옮기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습니다. 즉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며, 36국이 모두 (고려의) 신하가 됩니다’라고 했다.

…또 묘청의 무리는 왕이 황제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稱帝建元), 유제(劉齊: 금나라의 지원을 받은 한족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大齊國)의 왕)와 협공해 금나라를 없애자고 했다. 식자(識者)들이 다 불가하다 했으나, 그들은 계속 주장했다.” (『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새 궁궐지는 대화세(大華勢), 즉 나무에서 꽃이 피는 대화세(大花勢)로서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길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금나라는 물론 주변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한다는 것이다.

김부식, 공신 칭호 받고 정계 실력자로


1129년(인종7) 1월 서경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된다. 다음 달 인종은 서경에 간다. 1131년(인종9) 8월 대화궁의 외성(外城)인 임원궁성(林原宮城)이 완성된다. 이자겸이 제거된 게 1126년(인종4)이니 불과 3∼4년 만에 서경이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국왕 인종이 묘청 세력을 끌어안아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서경 천도가 거의 확정될 무렵 개경 귀족세력이 크게 반발한다. 이자겸과 함께 사대정책을 주도한 김부식과 이자겸 대신 외척이 된 정안(定安: 지금의 전남 장흥) 임씨의 임원애(任元敱) 등이 앞장서 반대한다.

“(1133년 8월) 임원애는,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꾀를 부리고 해괴한 말로 민심을 어지럽혔습니다. 몇몇 대신과 근신도 묘청의 말을 따라 국왕을 잘못되게 했습니다. 장차 생각지도 못할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죽여 화의 싹을 끊으십시오’라고 상소했다. 국왕은 답하지 않았다.” (『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묘청을 처벌하자는 임원애의 주장은 개경 문벌귀족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김부식은 1134년(인종12) 인종의 서경 행차에 이렇게 못을 박는다.

“묘청 일당이 국왕을 서경에 오게 하여 역모를 꾀하려 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은 ‘이번 여름 서경 궁전에 벼락이 쳤습니다. 벼락 친 곳으로 재앙을 피하러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가을 곡식을 아직 거두지도 않았는데 행차하면 벼를 짓밟아 농사에 방해가 됩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서경 행차에 반대했다. 왕은 행차를 중단했다.”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2년 9월)

김부식의 제동으로 인종의 서경 행차가 없는 일이 되었다. 서경 천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안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13) 1월 서경에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다.

“묘청은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의 명령을 위조해 서경유수와 관원을 잡아 가두고, 서북면(지금의 평안도 일대) 일대의 군사 지휘자와 서경에 거주하는 개경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잡아 가두었다.

군사를 파견해 서경과 개경으로 오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서북면 일대 여러 성의 군사를 징발했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정부의 관서를 조직하고, 군대 이름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했다. 묘청이 조광 등과 함께 군마(軍馬)를 호령하여 두어 길로 나누어 곧장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사절요』 권10 인종13년 1월조)

난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이해 3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토벌할 사령관에 임명된다. 진압 작전에 나선 그는 약 1년 만인 이듬해 2월 난을 진압한다. 국왕은 그에게 ‘충성을 다해 난을 바로잡아 왕조를 안정시켰다’는 공신 칭호(*輸忠定難靖國功臣)를 준다. 이로써 그는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신라 중심 사관과 유교 통치이념 확립


다섯 임금을 섬겼던 김부식은 곧바로 권력을 휘두른다. 진압사령관 시절 자신의 막료이자 윤관의 아들이기도 한 윤언이(尹彦頤)의 처벌을 국왕에게 건의한다.

“김부식이 말했다. ‘윤언이는 정지상과 결탁하여 서로 죽기로 맹세하고 한 무리가 되어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했습니다. 1132년(인종10) 국왕께서 서경에 행차하셨을 때 독자의 연호와 황제로 칭할 것을 요청하고, 국학의 학생들에게 이 일을 상소케 했습니다.

 

이는 금나라를 격분시키는 일이며, 그 틈을 타서 자기 무리가 아닌 사람을 없애고 반역을 꾀하려 했습니다. 결코 신하로서 할 짓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신법에 부정적이었던 김부식은 숙종·예종 때 신법을 추진한 윤관의 아들 윤언이도 그런 존재로 여기고,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국왕도 어쩔 수 없이 양주(梁州: 지금의 경남 양산)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가, 6년 후 광주(廣州)목사로 임명해 윤언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그제야 윤언이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연호를 제정하자고 건의한 것은 임금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태조와 광종의 전례가 있습니다. 신라와 발해도 그렇게 했으나, 큰 나라(*당나라)가 한 번도 정벌하지 않았습니다. … ‘금나라를 격분시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강한 적국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서 반역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대화궁을 짓자는 논의에 가담하지 않아 정지상과도 다릅니다.” (『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김부식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을 내칠 정도로 냉엄한 권력자로 변모했다. 1142년(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한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인종23) 완성한다.

“지금의 학사대부들은 중국 경전과 역사는 잘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삼국은 일찍 중국과 예로 통해 그들의 역사서 한서(漢書)나 당서(唐書)에 삼국의 사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소략하게 다루어 자세하지 않다. 우리나라 옛 기록은 문장이 졸렬하고 내용이 소략하여 군주의 선악, 신하의 충사(忠邪), 국가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고 또 교훈을 주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 권44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잘 모르고, 내용이 소략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서경 천도운동의 역사의식인 고구려 중심 사관을 수정해 신라 중심의 사관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묘청의 난 이후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까지도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정국은 다시 개경 문벌귀족이 주도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그의 발 밑으로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랑이 밀려오는 조짐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4. 의종과 무신정변 -  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

 

 

경남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둔덕기성. 고려 의종이 왕에서 쫓겨난 뒤 3년간 유폐된 곳이며 폐왕성으로도 불린다. 송봉근 기자

 

고려왕조의 최대 정변인 무신의 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대세다.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무신그룹이 권력 잡고 ‘의종실록’ 편찬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 (『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최세보는 조상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천한 가계에다 글도 몰랐는데, 무신정변 덕에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 실록 편찬의 사관(史官)에는 문신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때 무신이 처음 임명된 것이다. 의종실록은 최세보가 편찬책임자에 임명된 1186년(명종16) 12월 무렵 시작해 그가 사망한 1193년(명종23) 10월 무렵에 편찬이 마무리된다.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의종은 과연 문신을 우대하는 문신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반면에 무신을 천대했을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를 대하며 반면(反面)의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때 역사의 묘미(妙味)가 있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 (『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의종은 1154년(의종8)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한다. 1158년(의종12)에는 ‘백주 토산(兎山)의 반월 언덕(*半月岡)은 왕조 중흥의 땅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를 병합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따라 대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다. 또한 측근인 재상 김영부(金永夫)와 김관의(金寬毅)에게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한다. 1157∼116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김영부는 뒷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부친이다. 태조 왕건 이전 왕실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왕실의 기원을 중국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켰다.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에 입각해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해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와 다른 성격의 역사서다.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신의 평가와 같이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편찬)에 실린 수박희(手搏戱) 모습.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무신에 대한 푸대접이 아니었다.

의종 복위 운동 핑계로 문신들 대량 학살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의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정변을 일으킨 무신 권력집단의 역사왜곡일 뿐이다

 

 

5. 이의민과 신라 부흥운동 - 천민 출신 권력자, 실권 넘어 왕권을 꿈꾸다

 

 

북한 개성 교외에 있는 신종의 능. 인종의 5남인 신종 재위 때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두 차례 무신정변 때 재위한 의종(인종 장남), 명종(인종 3남)의 능은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특이하게도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의종과 명종(무신정변) 이후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權姦]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고 비용을 함부로 사용해 나라 창고가 텅 비었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서문)는 식의 평가가 그렇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무신정권을 혹평한 까닭에는 당시의 권력자 이의민(李義旼·1184∼1196년 집권)도 포함된다. 그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년 고려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국왕과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 체제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1198년(신종1)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도 이의민이 뿌린 씨앗에서 발아한 데 불과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무신의 전형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아버지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 여종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천민이었다.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의 비(婢)였다. 이의민은 8자나 되는 큰 키에다 힘이 세어 두 형들과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다 안렴사(조선의 관찰사 격) 김자양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두 형은 죽었으나 그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그의 완력을 보고 경군(京軍:개경방어 군인)으로 선발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아버지 이선(李善)은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선 아들이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의민은 경군에 선발되어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개경 성문이 닫혀 성 밖 연수사라는 절에서 묵었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궁궐까지 걸려 있어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부자(父子)의 꿈속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경군이 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수박희(手搏戱:태권도의 일종)를 잘해 국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별장(別將: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다.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공을 세워 장군(將軍:정4품)으로 승진한다. 장군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무반의 고위직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 무신정변이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1173년(명종3) 김보당(金甫當)이 주동한 의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김보당의 명령을 받은 장순석 등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그를 구심점으로 무신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복위운동의 거점 지역을 경주로 택한 것은 옛 신라 수도라는 상징성에다 이곳의 반(反)왕조적인 정서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 때 조위총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 의종 복위운동과 신라 부흥운동이 각각 서경과 경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 삼국의 수도였던 두 지역은 고려 건국 후 개경 중심 정치에서 소외받았기 때문이다.

 

황룡사 구층탑에 올랐다거나, 개경 남문에서 궁궐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갔다는 이의민 부자의 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경주인의 반감이 투영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는 복위운동 진압 사령관으로 경주 출신 이의민을 선택한다. 경주의 반왕조적인 정서를 역이용한 것이다. 그의 의도대로 경주민들은 이의민을 반기면서 반란 주동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의종을 경주 관아에 가두었다.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불러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 그의 척추를 꺾는다. (의종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껄껄 웃기까지 했다. (부관인)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헤엄질을 잘하는 이 절의 승려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버렸다. 시체가 여러 날 동안 물가에 떠올라도 물고기나 새들이 뜯어먹지 않았다. 전 부호장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물가에 묻어 주었다. 이의민은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大將軍:종3품)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의종 허리 꺾어 곤원사 연못에 던져


그러나 의종 시해의 죄과는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1179년(명종9) 정중부를 제거한 무신 경대승(慶大升)은 왕정 체제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면서 국왕을 시해한 이의민을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규정한다.

 

이의민은 1181년 경주로 피신한다. 국왕은 그의 반란을 염려해 벼슬을 주고 귀경을 권유한다. 1184년 경대승이 병사한 것을 계기로 재상이 되어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193년(명종23) 경주 인근 운문사(雲門寺:경북 청도군 소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경남 밀양시)의 효심(孝心)이 봉기하자 사령관 전존걸(全存傑)은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 반적들에게 몰래 정보를 주고 의복과 식량 등을 보냈다.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그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진압군은 이길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사령관 전존걸은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이의민)가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떨쳐 아군이 패배할 것이다. 패배의 죄를 누가 지겠는가?’라고 분하게 여겼다. 마침내 그는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의 단순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의민이 반군과 내통하여 새 왕조를 건국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꾼 후 대망을 품었다. 또한 용의 자손(고려 왕실을 뜻한)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는 옛 예언을 듣고, 십팔자는 이(李)씨를 뜻한 말이란 사실도 알았다.

이로써 그는 왕이 되려는 헛된 야망을 품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명사들을 등용시켜 자신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경주 출신인 그는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몰래 가지고 반적 김사미·효심 등과 내통했다. 반적들도 엄청난 재물을 바쳤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유일한 무신 권력자였다. 국왕과 관료 중심의 왕정체제에 기생하여 경제·군사·인사권을 독점해 달콤한 권력에 안주하려 한 정중부·경대승·최충헌 등의 무신 권력자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후인 1196년(명종26) 4월 이의민은 냉정한 권력자이자 또 다른 야심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된다.

“적신 이의민은 잔인한 성품으로 윗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임금의 자리마저 흔들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재앙이 불꽃처럼 치솟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을 빌려 적신들을 단번에 쓸어 없애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 정치를 펼치기 바랍니다. 오직 태조께서 가르치신 전범(典範:훈요십조)을 준수하여 중흥의 길을 밝게 여시기 바랍니다.” 『고려사』 권129 최충헌 열전)

최충헌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노회한 인물이었다. 새 왕조가 아니라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를 연장시키겠다는 현실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이의민 제거의 명분일 뿐만 아니라 국왕과 관료집단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이의민 실각하자 경주서 신라부흥운동


최충헌의 집안은 부친과 외조부 모두 상장군 출신인 무반 가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의 혜택으로 관료가 되었다. 이의민과는 신분이 달랐다. 무신정변으로 무신이 득세하자 자신의 출세에 유리한 무반으로 관직을 바꾼다.

 

1174년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해 별장(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 후 안동부사(副使)와 안렴사를 거쳐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의민의 미움을 받아 관리생활을 포기하다, 1193년 장군(정4품)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등장한 후 3년 만에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이 제거된 후유증은 1202년(신종5) 11월 경주의 신라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의민 제거 후 최충헌이 경주에 있던 이의민의 삼족(친족·외족·처족)을 살육한 데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주 사람이 신라 부흥운동을 꾀하여 몰래 배원우를 (전라도) 고부군에 유배된 전 장군 석성주에게 보내 ‘고려 왕업은 거의 다 되었다. 신라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대를 왕으로 삼아 사평도(沙平渡:한강)로써 경계를 삼으려 한다’ 하면서 그를 꾀었다.” 『고려사절요』 권14 신종 5년 11월)

최충헌은 1204년 이 난을 진압한다. 새 왕조를 건설하려 한 이의민의 꿈은 이로써 좌절된다. 최충헌은 아들에서 증손자까지 ‘이(怡)-항(沆)-의(竩)’로 이어지는 62년간(1196∼1258년)의 최씨 정권을 열었다. 그 비결은 변혁을 바라지 않은 국왕과 관료집단의 여망을 정확하게 꿰뚫은 현실주의 정치이념이었다. 그는 이의민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6.이규보 와 강화 천도 - 무신정권의 역설 … 정권 지키려 과거 급제자 대폭 증원

 

 

북문에서 바라본 강화산성. 1232년 강화 천도 당시 축조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소재. 조용철 기자

 

고려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는 37세 되던 해(1204년) 재상 최선(崔詵)에게 벼슬자리를 얻으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구차하게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정사에 반영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을 찾고 왕실에 힘을 보태 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생은 백세라지만 칠십을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삼십에 벼슬에 오르더라도 오히려 늦다고 하는데, 제 나이 지금 삼십칠 세입니다. 어릴 때부터 쇠약하고 병이 많아 삼십사 세에 흰 털이 보이더니 뽑아도 다시 나기를 그치지 않아 지금은 반백입니다.” (『동국이상국집』 권26 재상 최선에게 올리는 글)

23세 때(119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14년 동안 백수로 지내다 보니 머리조차 반백(半白)이 되었다는 구차한 얘기도 담겨 있지만,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는 그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에도 이규보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른 재상에게도 같은 취지의 편지를 썼다.

“예전엔 과거에 합격하면 바로 지방관에 임명되고, 늦더라도 3~4년 안에 다 임명되었습니다. 요즈음 문관들이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빨리 진출하는 사람이 많고, 지방관청이 늘지 않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임명되지 못한 채 밀려 30년 혹은 28, 29년이 되도록 임명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국이상국집』 권26 조태위(趙太尉)에게 올리는 글)

이 글에서 이규보는 자기처럼 청탁을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다간 30년을 넘겨도 발령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18년 백수’의 이규보가 왜 이토록 청탁의 편지를 썼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무신정권 당시 과거 합격자들의 일반적인 처지가 이규보와 비슷했음은 다음의 통계 자료가 뒷받침한다.

100년간 합격자, 전체의 33%인 2229명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6735명이다.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는 전체의 33%인 2229명이나 된다. 기간을 감안할 때 산술적으로 20% 정도가 정상일 것이다. 과거와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무신의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하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전체 합격자의 33%가 이때 배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기간에 1회 평균 선발인원은 34.9명(전체 평균 27.7명)이었고, 시험간격은 평균 1.4년(전체 평균 1.7년)으로, 무신정권 때 더 자주 과거를 치르고, 더 많이 뽑았다는 얘기다.

 

합격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관직 대기자 숫자는 1205년(희종1) 452.5명, 1210년(희종6) 461.1명, 1215년(고종2) 525.8명으로 늘어난다(*소수점은 평균사망률 적용 때문). 고려왕조 건국 후 가장 심한 인사 적체 현상이 생긴 셈이다(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1981년).

왜 무신 권력자들은 과거를 자주 치르고, 시험 때마다 합격자 수를 늘렸을까? 그 이유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합격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관리가 되려면 또 다른 관문인 ‘천거’를 거쳐야 했다. 이규보가 요로에 자신을 관리로 추천해 달라는 편지를 쓴 것은 이 때문이다. 요직에 있던 관리들은 정권에 충성을 다할 인물을 이리저리 따져본 다음 최고 권력자에게 천거했다.

 

과거제 위에 천거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은 천거를 통해 정권에 철저하게 충성하는 자를 가려내었다.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 바로 무신 권력자가 바라는 관료상이었다. 그래서 천거야말로 관리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천거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최충헌은 이규보를 세 번이나 만나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

첫 번째는 1199년(신종2) 5월이다. 이때 최충헌은 집 마당에 석류꽃이 활짝 피자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인로(李仁老)·함순(咸淳)과 함께 이규보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그의 시재(詩才)를 눈여겨본 후 다음 달 전주목사를 보좌하는 속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규보는 1년 만에 목사와의 불화로 그만둔다.

1202년(신종5) 12월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각종 문서를 작성할 관원을 모집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규보가 자원해 진압군의 일원으로 주요 산천에서 반란을 진압할 제문(祭文) 작성을 전담했다.

 

1204년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했으나 그는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천거가 없이는 험한 싸움터를 아무리 누벼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이냐, 지금도 지휘한 사람은 기억조차 않는다네” (『동국이상국집』 연보)라며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207년(희종3) 최충헌은 당대 문사인 이인로 등과 함께 이규보를 초대하여 그가 새로 지은 모정(茅亭ㆍ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게 했다. 이때 이규보는 1등으로 뽑힌다.

 

최충헌은 이규보를 임시직인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했다가 이듬해 비로소 정식 관원으로 임명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는 곧 뛰어난 문재(文才)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ㆍ1219∼1249년 집권)의 눈에 들었다.

세 번째 기회는 최이가 마련한다. 1213년(강종2) 이규보의 나이 46세 때 최이는 다시 최충헌에게 그를 천거한다. 최충헌은 그의 집 마당에 노니는 공작에 대해 시를 짓게 했다. 이규보의 시를 보고 최충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단숨에 7품으로 승진한다. 비로소 최씨 정권 최고의 문사로 활약할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강화 천도 후 축조된 고려 궁궐 터(북문 아래 소재). 조용철 기자

 

동기생 유승단, 천도 반대하다 의문사

고구려의 주몽을 노래한 유명한 서사시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과거에 합격한 지 3년이 지난 1193년에 지었다. 26세 때이다. 이규보는 과거에 합격한 20대 시절 이미 개경에서 문재(文才)를 떨쳤다. 그렇지만 쉽게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최고 권력자의 천거를 얻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발탁된 그가 최씨 정권에 충성을 바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231년 8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한다. 최고 권력자 최이는 1232년(고종19) 6월 마침내 2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에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선봉에 선 이가 유승단(兪升旦ㆍ?∼1232년)이다.

 

그는 이규보와 함께 1190년(명종20) 과거에 합격한 동기생이다. 두 사람은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유명한 고려가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품평한 기록이 있다.

 

 ‘고문(古文)은 유승단, 빨리 글을 짓는 주필(走筆)은 이규보가 각각 최고’라 했다. 이규보는 자신이 지은 시 뭉치를 유승단에게 보내 윤문을 부탁할 정도로 둘 사이는 절친한 문우(文友)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승단은 강화도 천도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은 무슨 명분으로 매양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버리고 종묘와 사직을 돌보지 않은 채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을 끄는 동안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은 적의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은 노예와 포로가 될 것이니, 천도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고려사』 권102 유승단 열전)

유승단이 천도에 반대한 것은 태자 때부터 모셔온 고종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고종은 천도 후 한 달이 지나 강화도에 갈 정도로 천도에 미온적이었다. 그가 일찍 재상이 된 것도 고종의 후광이었다. 천도 두 달 후인 8월 유승단은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 역시 예사롭지 않다. 민심도 천도에 대해 냉담했다. 당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지금 개경은 10만 호나 되었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18 고종 19년 6월조)

천거제 활용해 무신정권 100년간 유지

이규보는 천도를 강행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 최이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도에 찬성하는 글을 올린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일세.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물결, 그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 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 (『동국이상국집』 권18)

이규보는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천도를 옹호했다. 천도에 대한 이규보의 진심은 알 길이 없지만, 최이의 천거로 최씨 정권의 문객이 된 그로서는 천도 반대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규보는 천도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된다. 초고속 승진이다. 이후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몽골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할 정도로 최씨 정권의 철저한 이데올로그가 된다.

 

왜 무신권력자가 천거제를 통해 관료를 충원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무신정권이 100년이나 유지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7.  전쟁과 민초(民草) - 몽골군 포로 된 백성 한 해 20만 … 사망자는 그 이상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4년)에 실린 ‘김천이 어머니 몸값을 치르다’의 그림과 글. 그림은 포로(오른쪽 하단), 상봉(오른쪽 중단), 몸값 치르기(맨 위), 장례(왼쪽 중단)로 돼 있다.

 

1231년 1차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구주(龜州)성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 전투의 고려군 지휘자는 서북면[평안도]병마사 박서(朴犀)였다. 그는 한 달간 계속된 전투에서 몽골군의 구주성 점령을 저지해 영웅이 된다. 당시 생생한 전투 장면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몽골군이 쇠가죽으로 감싼 사다리 수레 속에 군사를 감춰 성 밑으로 접근해 굴을 판 다음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박서는 굴 속으로 쇳물을 부어 몽골군을 막고,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몽골군의 수레를 불태워 쫓아냈다.

몽골군이 사람 기름에 불을 붙여 공격하자 박서는 진흙에 물을 부어 불길을 잠재웠다. 몽골군이 다시 건초에 불을 붙여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물을 부어 불길을 잡았다. 점령에 실패한 몽골군은 구주성을 우회해 개경을 공격하고 고려 왕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몽골의 압력을 받아 고려 왕조는 사신을 구주성에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는 응하지 않았다. 국왕이 나서 항복을 권유하자 박서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몽골은 다시 박서의 처단을 요구했다. 무신 권력가 최이(崔怡)는 박서를 고향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 전투에 참여한 70여 세의 몽골군 노(老)장수는 “내가 20세부터 천하의 수많은 성을 공격했으나 이같이 오래 버티며 항복하지 않은 장수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려사』 권103 박서 열전). 박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영웅이 된다.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 희생과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새로운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전쟁을 통해 화려하게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고통받은 수많은 민초들이 그 무대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전쟁의 고통을 겪은 민초들의 얘기 역시 전쟁을 막고 평화를 누리기 위한 역사 서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려 후기에는 삼국부흥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하층민의 봉기, 삼별초 항쟁, 몽골군과의 전투 등 수많은 내란과 전쟁을 겪었지만, 그에 관해 전해지는 민초들의 얘기는 다음의 두 개 기록에 불과할 정도로 간략하다.

 

 

권금성(權金城속초의 외설악 소재).1353년 몽골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원나라 끌려가 종살이하던 모친 구한 김천


명주(溟州:강릉) 호장(戶長:향리 우두머리)인 김천(金遷)의 어머니와 동생 덕린(德麟)은 몽골군의 포로가 돼 만주 요양(遼陽:지금 심양)으로 끌려가 각각 몽골 군졸인 요좌(要左)와 천노(天老)의 종이 된다. 김천의 나이 15세 때이다.

14년 후 원나라에서 돌아온 백호(百戶:당시 하급 장교) 습성(習成)이란 자로부터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듣는다. ‘나는 살아 있고, 원나라에서 종이 되어 있다.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한 채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는 등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세상을 떠난 줄 알고 제사를 지내오던 김천은 빚을 내어 몸값을 치를 은(銀)을 마련한다. 개경에 가서 국왕이 원나라로 가는 편에 따라가기를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한다. 그는 6년 동안 개경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알던 승려를 만나 군인인 그의 동생이 만주 요양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겨우 허락을 받아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 군졸 요좌의 집에 이르자 한 할머니가 절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명주 호장 김자릉의 딸이다. 형제인 김용문은 과거에 급제했고, 나는 호장 김종연에게 시집가서 해장(海莊:김천)과 덕린(德麟)이란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이미 19년이 되었고, 둘째 아들도 이웃의 종으로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20년 만에야 찾은 것이다. 주인 요좌에게 애걸하여 은 55냥으로 어머니의 몸값을 치렀다. 돈이 부족해 동생은 바로 데려올 수 없었다. 홀로 남은 동생은 ‘만일 하늘이 복을 내리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어머니와 형을 전송했다.

 

모자는 서로 안고 울었다. 그때 고려 재상 김방경(金方慶)이 귀국길에 이 소식을 듣고 모자에게 증명서를 만들어줘 공로(公路)를 통해 귀국하게 했다. 6년 뒤 김천은 86냥의 몸값을 치르고 동생도 데려왔다(이상 『고려사』 권121 김천 열전).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은 고종(1214∼1259년 재위) 말년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253년(고종40) 10월 몽골군이 양주(襄州:강원도 양양)를 함락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인근의 명주(강릉)도 이때 공격을 받아 김천의 어머니 등도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 김천의 어머니가 포로가 될 당시 고려는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은 해가 1254년(고종41)이다. 이 해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약 20만7000명이나 된다. 사망자는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고려 인구는 5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원나라는 고려인 포로들을 통치하기 위해 1296년(충렬왕22) 심양에 고려군민총관부(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한다. 당시 심양왕(瀋陽王)이란 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고려 국왕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만주의 심양 지역에는 그만큼 고려인이 많이 거주했다.

김천의 집안은 대대로 강릉의 지방행정을 맡아 온 토착 향리 출신이다. 김천의 부친과 외조부는 모두 향리의 최상층인 호장이었고 삼촌은 과거에 합격한 진사였다. 호장층은 세습 계층이다. 따라서 김천의 집안은 강릉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 계층이었다.

 

또한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 모친과 동생의 몸값을 치르고 귀국시킬 수 있었다. 포로 중엔 그렇지 못한 민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포로로 이국으로 끌려가 노비로서 비참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20년 동안 종살이를 했지만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이 귀국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전란에 친부와 시부·남편까지 잃은 조씨


고려 말 유학자 이곡(李穀:1298∼1351년)은 1341년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傳)’(『가정집』 권1)이란 전기를 지었다. 그는 전쟁고아와 미망인인 조씨의 삶을 ‘곧게 살아온 여인[節婦]’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곡은 조씨의 집을 구입했는데, 조씨의 손녀사위가 자신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同年)이라는 인연으로 이후 조씨와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기구한 삶을 기록할 수 있었다. 조씨의 삶 속에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사회가 겪은 여러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다.

1270년(원종11) 6월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반기를 든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6세인 조씨는 군인인 아버지 조자비(曺子丕)와 함께 삼별초군에 체포되어 삼별초군을 따라 진도로 남하한다.

 

남하 도중 아버지 조자비는 딸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경으로 귀환한다. 조자비는 다시 고려군에 편성되어 1271년(원종13) 겨울 삼별초군을 정벌하러 탐라(제주도)에 갔다가 전사한다.

아버지를 잃은 조씨는 13세 되던 해(1278년) 대위(隊尉:정9품) 벼슬의 군인 한보(韓甫)에게 출가했다. 조씨의 시아버지도 군인이었다. 결혼 3년 만인 1281년(충렬왕7) 여름 조씨의 시아버지는 몽골·고려 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1290년(충렬왕16) 12월 원나라 사람 내안(乃顔)이 만주에서 세조 쿠빌라이에 반란을 일으킨다. 내안의 휘하 장수 합단(哈丹)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다. 충렬왕이 강화도로 피란을 갈 정도로 상황은 위급했다.

 

원나라는 군사 1만3000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합단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소탕한다. 조씨의 남편 한보는 1291년(충렬왕17) 여름 합단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다. 조씨가 27세 되던 해이다. 조씨는 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어 고아가 되었고, 출가 후 전쟁터에서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잃었다. 이후 77세까지 50년간 과부로서 홀로 지낸다.

과부가 된 조씨는 언니의 집에서 기숙한다. 그러다 자신의 딸이 출가하자 딸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그런데 1남1녀를 낳은 딸마저 일찍 죽어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곡은 조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씨는 50년을 과부로 지내면서 밤낮으로 길쌈과 바느질 같은 부녀자의 일을 열심히 했다. 그 덕에 딸과 손자·손녀를 먹이고 입히며 살아갈 터전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상례와 제례의 비용을 손수 마련하였다.

 

지금 7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적에게 사로잡힐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근래 정치의 잘잘못이라든가 사대부 집안의 내력 등을 이야기할 땐 하나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곡은 50년 동안 ‘부절’을 지키면서 꿋꿋한 삶을 살아온 조씨를 기리려고 이 전기를 지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전쟁으로 아버지와 시아버지·남편을 차례로 잃은 후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고단한 삶을 살아온 민초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수많은 내란과 전쟁으로 얼룩진 고려 후기사회를 살았던 민초들의 얘기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은 유감이다.

 

 

 8. 원나라 간섭기와 민초(民草) - 하층민들 신분 상승 봇물 … 재상 반열 오르기도

 

 

충남 천안의 광덕사 앞에 있는 호두(胡桃) 시식비(始植碑오른쪽 아래)와 400여 년 된 호두나무. 유청신의 경제적 기반이 천안이어서 이곳에 처음 호두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역사가 안확(安廓)은 『조선문명사』(1923년)에서 고려의 ‘귀족정치시대’를 움직인 세 집단은 승려, 무신, 폐신(嬖臣)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폐신이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이며, 폐행(嬖倖)이라 부른다. 이들의 행적을 따로 기록한 것이 『고려사』 폐행 열전(권123)이다.

폐행 열전엔 주로 원 간섭기에 활동한 55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출신이 밝혀진 인물 가운데 문·무반 출신 관료는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하면 평민(15명), 천민(10명), 상인(2명), 승려(3명), 외국인(7명) 등 미천한 신분이 많다.

사회 밑바닥의 민초(民草)들이 원 간섭기에 국왕 측근이 되거나 지배층으로 진출한 사실은 신분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원 간섭기를 우리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의 하나로 여긴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90년 전에 민초들의 지배층 진출에 주목한 역사가 안확의 안목은 실로 신선하고 놀랍다.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 간섭기는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다.

고려 건국 때 반기 든 지역 주민 차별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이다. 이들은 신분상 양인이지만 군현(郡縣)에 거주한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아 사실상 노비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마디로 신분과 현실의 처지에서 양인과 천인의 두 경계를 넘나든 ‘경계인(境界人)’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각종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극복하고 지배층으로 편입된 사실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박구(朴球)는 울주(蔚州:울산) 소속의 부곡인이다. 조상은 부자 상인[富商]이었다. 그 역시 큰 부자[요재(饒財)]로 알려졌다. 원종(元宗) 때 상장군(무반 최고직:정3품)이 되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사령관 김방경과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상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어 합포(지금의 마산)를 지켰다. 찬성사(贊成事:정2품)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박구는 다른 기능은 없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하게 되었다.” (『고려사』 권104 박구 열전)

박구(?∼1289년)가 원종(1259∼1274년 재위) 때 무반 최고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고종(高宗:1214∼1259년 재위) 때 처음 군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1274년(충렬왕 즉위연도) 원나라 출신 공주(충렬왕비)가 고려로 올 때 그는 공주의 호위 군사를 맡을 정도로 충렬왕의 측근이었다. 1281년 5월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제2차 일본 정벌에 참전했다. 부곡인이 재상 자리까지 오른 것은 박구가 처음이다.

부곡인은 향(鄕), 부곡(部曲), 소(所), 장(莊),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던 주민이다. 이 중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 때 처음 생겨난 행정구역이다. 인구·토지 규모가 작아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한 지역을 주변의 군·현에 소속시킨 소규모 행정구역이다.

“지난 왕조(고려) 때 5도와 양계(함경도·평안도)에 있던 역과 진에서 역을 부담한 사람[驛子와 津尺]과 부곡인은 모두 태조 때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고려 왕조는 이들에게 천하고 힘든 일(賤役)을 맡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己巳일 조)

위 기록과 같이 고려 정부는 후삼국 통합전쟁 때 왕조에 반기를 든 주민을 향·부곡 지역에 소속시키거나, 소(所)·장(莊)·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만들어 일반 농민들과 차별하고 특별한 역(役)을 지게 했다. 향·부곡의 주민은 국가 토지 경작, 소 주민은 수공업 생산, 장·처 주민은 왕실·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역을 각각 부담했다.

부곡인은 일반 조세 외에 이런 역을 추가로 부담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으며, 대대로 특정의 역을 세습해야 했다. 그들은 관리가 되더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부곡인이 이런 규제와 제약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무신정권 때다. 무신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지나치게 많이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저항운동을 주도한 계층이 부곡인이다.

 

최씨 정권의 권력자 최의(崔竩)가 1258년 피살되고, 이듬해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는다. 몽골의 압력으로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했지만, 그에 반발한 삼별초의 난은 1273년에야 진압됐다. 이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런 현실은 부곡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 임명권을 장악해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 국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국왕이 되었다.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책봉된 국왕은 국내 정치 기반이 취약해,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측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의 궁중정치가 유행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지배층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을 통해 무공을 세운 사람, 원나라 말에 능통한 역관(譯官), 원나라 왕실의 환관(宦官)이나 공주 집안 사람 등 대체로 4가지 경로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 주류였다.

원 간섭기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편승해 앞에서 말한 부곡인 박구도 충렬왕의 측근이자 재상이 되었다.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출세한 부곡인도 있었다.

 

“유청신(柳淸臣)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高伊)부곡 출신이다.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비록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에겐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高興)현으로 승격했다.”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1329년)은 일본 원정과 원나라 내안(乃顔)의 반란 때 양국 사이의 통역 업무를 잘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1287년(충렬왕 13) 8월 규정에 없는 대장군(종3품)으로 승진한다. 1297년(충렬왕 23)엔 재상 자리에 오를뿐더러 충선왕의 측근이 돼 원에 있던 충선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전담한다.


縣 승격으로 부곡집단 해체 가속화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 (『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옹주·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인 유청신의 공적을 기린 비

“유청신(柳淸臣)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高伊)부곡 출신이다.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비록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에겐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高興)현으로 승격했다.”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1329년)은 일본 원정과 원나라 내안(乃顔)의 반란 때 양국 사이의 통역 업무를 잘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1287년(충렬왕 13) 8월 규정에 없는 대장군(종3품)으로 승진한다. 1297년(충렬왕 23)엔 재상 자리에 오를뿐더러 충선왕의 측근이 돼 원에 있던 충선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전담한다.

縣 승격으로 부곡집단 해체 가속화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옹주·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9.元 간섭기의 역사서술 - “몽골, 시기심 많고 잔인” → “몽골과 형제맹약 뒤 안정”

 

 

김취려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소재. 14세기 원과의 관계가 호전되자 김취려는 사후 백 년 만에 재평가를 받는다. 조용철 기자

 

원나라 간섭기에 역사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1325년)에서 김취려(金就礪·1172∼1234)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국가의 덕이 쇠하지 않았는데 전란이 있으면 반드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가 나타나 국왕의 쓰임을 받아 시대의 어려움을 구하게 된다.…공(公:김취려)은 멀리 있는 몽골 군사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적 거란을 공격했다. 몽골과 (형제) 맹약을 맺어 나라의 근본을 순식간에 안정시켰다. 우리 사직의 신령이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를 뒤에서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김공행군기’)

1218년 몽골군과 연합해 몽골과 형제 맹약을 체결한 주역 김취려를 높이 평가한 글이다. 이 책에는 1216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물리친 김취려의 행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은 형제맹약을 ‘(전란의 피해를 줄여) 고려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세운 커다란 공적’(『고려사』 권21 충숙왕 10년 1월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즉 형제맹약은 두 나라 관계의 시작이자, 당시 백 년간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 속엔 몽골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나아가 몽골전쟁 중 사망해 가리워졌던 김취려 역시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형제맹약과 몽골 전쟁을 직접 체험한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이규보(1168∼1241)의 생각은 이제현과 달랐다.

 

원 간섭기 역사학자 이제현의 표준영정

 

“몽골은 시기심과 잔인함이 막심해 비록 화친을 하더라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들과 좋게 지내는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지난 기묘년(1219:고종6) 강동성(江東城:평양 부근)의 형제맹약은 형세가 어쩔 수 없어서 맺은 것입니다.” (『동국이상국집』 권28 동진국에 보낸 편지)

이규보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몽골과의 형제맹약을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심하도다, 달단(몽골을 지칭)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엉큼함은 금수(禽獸)보다 심하다’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 기고문(祈告文)’)라고 표현했다. 백 년 사이에 몽골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고려, 몽골제국 중 유일하게 국가 유지


1259년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전쟁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3년 두 나라는 삼별초의 반란을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새로운 관계의 전개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쿠빌라이 사후 즉위한 원나라 성종은 두 나라가 처음 관계를 맺은 시기를 고려에 묻는다. 고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금나라 치하의 거란 출신) 금산(金山) 왕자가 태조 황제(칭기즈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국호를 ‘대요(大遼)’라 칭하고 자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고려로 침입했다 쫓겨 강동성에 진을 쳤습니다. 조정(몽골)에서 합진(哈眞)과 찰자(札刺)를 보내 토벌했는데, 눈이 쌓이고 길이 험해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고왕(高王:고종)이 이를 듣고 조충(趙冲)과 김취려를 보내 군사와 식량을 공급하고, 그들을 함께 섬멸했습니다. 이제 76년이 되었습니다.” (『고려사』 권31 충렬왕 20년(1294) 5월)

고려는 거란족을 섬멸한 1218년(고종5)을 두 나라 관계가 시작된 원년으로 보았다. 원나라 무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국가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삼한이) 선대(태조 칭기즈칸)에 귀부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었다. 아비가 땅을 일구었고, 자식이 기꺼이 다시 파종을 했다.” (『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조)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몽골제국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는 백성과 사직을 유지한 국가라고 했다. 형제맹약은 두 나라가 천자-제후 관계를 맺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백 년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4세기 초 두 나라 지배층이 공유한 역사 인식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실제로 어느 때보다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럴 경우 형제맹약의 효력을 무력화시킨 1232년 이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의미 없는 역사가 된다.

원나라의 제후국을 자청한 충선왕


충선왕(忠宣王:1308∼1313년 재위)은 1309년(충선왕1) 7월 죽은 부왕(父王)의 시호(諡號)를 원나라에 요청한다. 이때 부왕 외에 이미 시호를 받은 증조왕(曾祖王) 고종과 조왕(祖王) 원종의 시호까지 이례적으로 요청한다.

1310년(충선2) 7월 원나라는 부왕에게 충렬왕, 고종에게 충헌왕(忠憲王), 원종에게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고려에 통보한다. 원나라는 고려를 제후국으로 여겨 이렇게 ‘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덧붙여 원나라에 충성을 하라는 뜻에서 칭호에 ‘충(忠)’자까지 붙였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그만큼 철저하고 강했다는 증거이다.

당시 원나라에 시호를 요청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 한다.
“이전에 고려가 송·거란·금의 연호는 사용했지만 역대 국왕의 시호는 모두 종(宗)으로 스스로 칭했다. 원나라를 섬기면서 (천자-제후의) 명분이 더욱 엄했다. 옛날 한(漢)나라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그 까닭에 국왕(충선왕)은 죽은 전왕(충렬왕)의 존호(尊號)를 요청하고, 고종과 원종의 시호까지 추가로 요청했다. 이에 원나라가 조서를 내려 고려의 요구에 따랐다.” (『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 7월조)

국왕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것은 한나라의 관례를 따른 것이라 했다. 즉 충선왕은 천자국 원나라에 대해 제후국으로서 국왕 시호를 요청한 것이다. 시호 요청은 두 나라를 각각 천자-제후국의 공식적인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제현이 저술한 또 다른 역사서 『충헌왕(忠憲王)세가』(1342년)에는 1309년 당시 세 국왕이 시호를 받아야 할 공적이 실려 있다. 고종은 몽골과의 형제맹약, 원종은 1259년 세자로서 몽골 쿠빌라이에게 직접 찾아가 강화(講和)를 맺은 사실, 충렬왕은 1274년 몽골 출신 공주와의 혼인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을 수행한 공적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천자-제후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면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인식, 즉 형제맹약 이후 백 년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대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현이 저술한 『충헌왕세가』와 『김공행군기』는 그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를 대변한 상징적인 역사서이다.

두 책은 모두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백 년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한편으로 이제현이 살던 당시 백 년의 역사서이다. 그야말로 ‘고려판 현대사’라 할 수 있는 당대사(當代史) 역사서이다.

 

김부식이 삼국시대 역사인 『삼국사기』(1145년)를, 1451년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찬한 것처럼 전(前)근대 역사는 지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제현이 현실적인 영향력이 큰 당대사를 편찬한 사실은 주목된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 경향으로 대두한 것이다. 형제맹약을 관계의 시작으로 볼 때 가장 큰 걸림돌은 1232년부터 1258년까지의 30년 전쟁에 관한 서술이다.

당대를 살았던 이규보의 생각에서 드러나듯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에 대한 수정이 필요했다. 문제가 된 것은 30년 전쟁 당시 재위한 국왕의 역사 『고종실록』이다. 1277년(충렬왕3) 완성된 이 책은 고종의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시점인 1309년에 다시 편찬된다. 수정의 초점은 당시 전쟁에 대한 평가문제일 것이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로 대두


민지(閔漬)는 충렬왕 재위(1274∼1308) 말년 『세대편년절요』를 편찬하는데, 태조부터 고종·원종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서술의 초점은 고종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 관한 새로운 서술일 것이다.

이제현은 민지의 저술을 토대로 『충헌왕세가』를 저술했으며, 민지의 역사서는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 원나라에 보내진다. 이로 볼 때 이들 저서는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을 수정한 것이 분명하다.

원나라 역시 전쟁을 전후한 고려의 역사 서술에 관심을 가졌다. 1325년(충숙왕12) 원나라는 칭기즈칸 이래 원나라에 공을 세운 고려 인물에 대한 역사 편찬을 고려에 요구한다. 몽골군과 함께 거란족을 물리치고 형제맹약을 체결한 김취려의 행적을 적은 이제현의 『김공행군기』는 이때 저술된 것이다.

14세기 고려 왕조는 원나라와 수립된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몽골과의 30년 전쟁에 대한 재서술 등 가까운 백 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이른바 ‘고려판 현대사’인 당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 서술이 현재 전해오는 『고려사』 가운데 원 간섭기 역사 기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이 책은 이제현의 역사서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역사는 고려와 원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 관한 서술이 풍부하지 않다.

살아 있는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과거의 다양한 역사를 오도 또는 말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한 역사의 교훈이다

 

 

10. 기 황후와 원나라 순제 -  기 황후가 元 패망 촉발? 궁정 실권자였다는 방증

 

 

경천사 10층 석탑. 개풍군 광덕면 광수리에 있었다. 개항기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가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중앙포토]

 

고려인 출신 기(奇) 황후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1333∼68년 재위)의 제2비(1340년)를 거쳐 정후(正后:1365년)가 된다.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은 황태자(1353년)로 책봉된다. 기 황후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는 제후인 영안왕(榮安王)에 봉해진다.

그녀의 일족이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 된 것은 기 황후가 힘을 쏟은 궁중정치의 결실이다.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과 결합해 원나라와 대(對)고려 외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 여인(※기 황후)이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황실 법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식자(識者)들은 천하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 (『庚申外史』)

“감찰어사 이필이 상소했다. ‘기씨가 황후가 된 후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하천이 범람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도적이 번성했다. 음(陰:기 황후)이 성하고 양(陽:순제)이 쇠미한 현상입니다. 기씨를 황후에서 비(妃)로 낮추어야 재변이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 (『원사』 본기)

기씨가 정후로 된 지 수년 만에 원나라가 망한다. 이 때문에 위 기록과 같이 그녀는 원나라 쇠망의 책임까지 뒤집어쓴다. 오히려 위 기록은 기 황후가 당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원나라 쇠망의 잘못을 뒤집어 쓴 기 황후


기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기 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貢女) 출신이다. 고려 처녀들이 강제로 징발되는 처참한 모습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사방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여 여자를 숨기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했다.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수백 집을 뒤진다. 이러기를 한 해에 한두 번 혹은 2년에 한 번씩 하며, 한 번에 많을 경우 40, 50명을 뽑는다. 뽑힌 여자의 부모와 종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기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었다.” (『고려사』 권109 이곡 열전)

원나라에 처녀를 바치기 위해 처녀들의 국내 혼인을 금지한 1275년(충렬왕 1)의 기록이 공녀(貢女)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후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가장 많은 숫자를 보낸 때는 동녀(童女:처녀) 53명과 화자(火者:거세된 환관) 23명을 보낸 1320년(충숙왕 7)이다.

명문가의 처녀를 요구했고, 딸을 숨기거나 바치지 않은 관리들은 유배 같은 처벌을 받았다. 기 황후의 고조부는 최충헌 정권 때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음서로 관료가 되어 수령을 지냈다. 그녀 역시 공녀의 조건에 들어맞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2) 6월 즉위한 순제는 이해 9월 권력자 연철목아(燕鐵木兒)의 딸 답납실리(答納失里)를 정후(正后)로 맞이한다. 기 황후는 이해 12월 고려 출신 환관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된다. 이후 곧 순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는다. 이 때문에 정후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다.

“기씨(祁氏:기황후·祁는 奇와 同音)는 성품이 지혜롭고 영리해(慧黠) 황제(※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는 권신(權臣)의 딸이라 교만했고 나이 어린 황제를 얕보았다.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불평하여 하루 저녁도 거르지 않고 매일 회초리로 그녀를 때렸다. 또 무릎을 꿇게 해 죄를 추궁하고, 그녀의 몸을 불로 지지기도 했다.” (『庚申外史』)

문종(文宗:순제의 삼촌)이 죽자 연철목아는 문종의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의 반대로 순제의 배다른 동생 영종(寧宗)이 즉위했으나 2개월 만에 죽는다. 연철목아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는 즉위한다. 그러나 순제는 원하지 않은 혼인에다 자신을 얕보는 황후 대신 기 황후에게 더 마음을 쏟았다.

1335년 6월 순제 폐위 역모사건을 주도한 연철목아와 그 아들 당기세 형제가 살해되고, 답납실리 황후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기 황후에겐 좋은 기회였다

 

. 기 황후를 정후로 맞이하려 한 순제의 뜻과 달리 1338년 3월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해 온 홍길자(弘吉刺) 가문의 백안홀도(伯顔忽都)를 정후로 받아들인다. 대신 1340년 3월 기 황후는 제2 황후로 책봉된다. 그러나 정후 백안홀도는 명목상의 제1 황후에 불과했다.

제2 황후 된 1340년 이후 정국을 요리


기 황후는 이때부터 권력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1346년(충목왕 2) 8월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순제의 숙모)가 순제를 폐하고 아들 연첩고사(燕帖古思)를 즉위시키려고 모의했다는 이유로 모자는 축출된다. 당시 비난의 화살은 기 황후와 그 세력, 즉 기당(祁黨)을 겨냥하고 있었다.

“(祁黨은) 상을 주어야 할 곳에 상을 주지 않고 형벌을 주어야 할 곳에 형을 주지 않아 상벌이 균형을 잃어 기강이 이때부터 크게 무너졌다. 중원의 도적은 이때부터 일어났다.” (『草木子』 권3의 상)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실권을 행사한 1340년부터 중국 대륙에선 한족(漢族)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원나라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기록은 반란의 원인을 기 황후 일당이 상벌의 원칙을 무너뜨린 문란한 정치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1340년대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당시 원나라 궁정의 실권자임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1353년 6월 기 황후의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猶識理達獵)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정후(正后)의 아들이 있는데도 기 황후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기 황후는 마음대로 정치를 요리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찾을 만한 것이 없었다.

1365년 7월 기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하고 정후 백안홀도의 아들을 태자로 앉히려는 발라첩목아(孛羅帖木兒)의 반란이 진압된다. 이어 정후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해 12월 기 황후는 제1 황후가 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원나라 멸망 3년 전이었다. 기 황후의 품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기황후는) 일이 없으면 여효(女孝:孝經의 일종?), 경전 및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고 역대 황후 가운데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보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신을 시켜 태묘에 보내 먼저 제사를 올린 후에야 그것을 먹었다.” (『원사』 열전)

기록에 따르면 기 황후는 미모뿐 아니라 교양이 풍부하고 지적으로 세련된 여인이었다. 순제가 그녀에게 혹할 만했다. 순제는 술을 마시거나 연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와 천문 관측을 잘했으며 장편 시를 남길 정도로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표현력의 소유자였다.

순제는 유약한 호문(好文)의 군주에다 권력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기 황후는 순제의 이런 점을 이용해 궁중에서 권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장안사. 기 황후의 원찰. 6·25전쟁 때 소실됐다. [사진 간송미술관]

 

자정원, 궁중정치의 핵심 기구


1340년 12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자 원나라는 황후의 각종 비용을 전담하는 재정기구로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한다. 자정원은 3개 현(縣)과 2개 주(州)의 21만4538호가 소속되어, 그곳에서 거둔 조세로 운영되었을 정도로 재정규모가 상당히 큰 기구였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정국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기 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기용해 자정원을 운영했다. 최고책임자인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전주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기용했다. 기 황후의 고향인 행주(幸州) 출신의 환관 박불화(朴不化)도 자정원 소속이었다.

둘은 자정원을 관리하면서 황후의 명령을 받아 각종 정치에도 관여했다. 또한 황제의 원찰 해주 신광사(神光寺)와 기 황후의 원찰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와 개경 경천사(敬天寺)에 대신 불공을 드리려고 고려에 자주 왔다.

 

그들은 고려에 머물면서 고려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고용보는 개경 경천사에 10층 석탑을 제작했다. 이 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처녀를 데려다 양육시켜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기 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서울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 (『庚申外史』)

1341년 이후의 시기는 기 황후가 제2 황후로 있을 때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많은 고려 여인을 길러 원나라 고위 관료에게 첩으로 보냈다. 고려 여인을 첩으로 두어야 명문가로 행세할 수 있고, 황실의 시중 드는 여인의 태반이 고려 여인이라는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기 황후는 그 지위 때문에 정국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 환관에 의존한 궁중정치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훗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나라 쇠망기에 정국을 주도하다 보니 그녀가 망국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자신과 일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도 그런 비난을 증폭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고려의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1.[끝] 기 황후와 공민왕 - 3수 끝에 즉위한 공민왕, 원 쇠망 타고 反元 개혁

 

 

공민왕 신당.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 귀퉁이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용철 기자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鑠)을 반역을 꾀했다는 죄로 처단한다. 기철은 기 황후의 오빠이다. 권겸은 원나라 황태자(기 황후 아들)의 장인이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순제에게 바쳤다. 세 사람 모두 원나라 황실의 일족이 되어 고려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린 인물들이다.

 

공민왕은 세 사람과 그 일족을 처단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유명한 반원(反元) 개혁을 단행한다. 이해 6월 공민왕은 인당(印璫)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 이동·이서 지역의 원나라 역(驛) 8곳을 공격하게 한다. 7월엔 쌍성(雙城)총관부를 점령함으로써 약 100년 만에 원나라에 빼앗긴 동북 지역(※함경도 일대)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다.

이해 7월 원나라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공민왕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적신(賊臣) 기철이 노책·권겸과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들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한 것을 계기로 황실의 위엄을 빌려 국왕을 협박하고 백성들의 토지 등 원하는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제가 원나라를 두려워해 문책을 못하니 백성들의 원한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기철 등은 천하(※중국 대륙)가 병란에 싸이자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자기들의 심복을 심어두고, 무기를 만들어 공공연하게 연습하고 온갖 유언비어로 선동했습니다. 드디어 금년 5월 18일 무뢰배를 모아 무기를 싣고 궁궐을 습격하려 했습니다.

 

이에 원나라에 알릴 틈도 없이 처단했으며, 살아남은 무리들이 변방으로 도망한 것을 추격하다 본의 아니게 압록강을 넘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7월)

고려 왕조에 반역한 기철 일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망친 잔당을 잡으려다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건너 원나라 역을 공격했다고 변명했다. 공민왕은 압록강을 건넌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
기철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기철 일당은 천하가 병란에 싸이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심복을 앉혔다’는 공민왕의 해명에 진실이 담겨 있다. 기철 일당의 세력 확장이 왕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공민왕이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대륙 정세의 급변도 그런 조치를 취한 또 다른 배경이다.

공민왕은 원나라 요청에 따라 1354년(공민왕 3) 대륙의 한족(漢族)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탁·염제신·최영 장군 등에게 고려군 2000명에다 현지 고려인 2만 명을 붙여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를 상세하게 보고한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 정세를 읽고 기철 등을 제거했다. 쇠망의 길로 접어든 원나라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공민왕은 꿰뚫어 본 것이다.

기씨 일족은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된 이후 고려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기 황후 덕에 부친 기자오(奇子敖)와 모친 이씨는 제후의 지위인 영안왕(榮安王)과 영안왕 대부인(大夫人)으로 각각 책봉된다.

 

이미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 살아있던 모친이 극도의 환대를 받는다. 고려 국왕은 매년 이씨 집을 방문해 잔치를 열었다. 1353년(공민왕 2) 기 황후 아들이 원나라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나라는 황족을 보내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당시 잔치의 모습이 다음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신당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공주(※공민왕 비)와 태자(※원에서 보낸 황족)는 남쪽에 앉고, 왕(※공민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각각 앉았다. …잔치가 끝날 무렵 사신과 그 수행원은 서쪽 계단에, 호위 무사는 동쪽 계단에 각각 앉아 고기 많이 먹기 내기를 했다. 잔치 후 모두 뜰에 내려와 비단 1필을 서로 이어 잡고 호가(胡歌:몽골 노래)를 부르고 춤추면서 서너 차례 뜰을 돈 후 비단을 잘라 나누어 가졌다. 잔치에 베를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무려 베 5140필이 들었다. 다른 물건도 이 정도의 기준에 맞춰 준비했을 정도로 잔치는 매우 사치스러웠다.”

(『고려사』 권131 기철 열전)

고려 국왕과 이씨는 같은 제후왕으로 마주 앉았다. 기씨 일족이 공민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는 증거다. 5000필이 넘는 베를 잘라 꽃을 만들어 장식할 정도로 호화판 잔치였다. 이 잔치에 참석한 원나라 사신들이 ‘묵을 공관이 부족해 무려 30여 곳의 재상들의 집에 유숙했다’(『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2년 8월조)고 말할 정도였다.

충혜왕과 기 황후의 악연
기 황후 모녀가 각각 제 2황후와 영안왕 대부인으로 책봉되면서 당시 국왕 충혜왕(1330∼1332년, 1339∼1344년 재위)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충혜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승상 연철목아(燕鐵木亞)는 그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아들처럼 대했다.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연철목아는 황제에게 상소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 (『고려사』 권109 이조년 열전)

연철목아는 1330년 충혜왕 즉위를 도운 인물이다.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가 낳은 왕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충혜왕은 고려 왕비가 낳은 왕자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는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실권자 연철목아의 든든한 후원 덕택이었다.

연철목아는 원나라 황제 순제의 즉위에도 관여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의 즉위(1333년)를 승인한 당시 원나라 최고의 실권자였다.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기 황후는 연철목아의 딸이자 순제의 정후인 답납실리(答納失里)로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연철목아와 그 일족은 순제 역모 사건으로 1332년 정적 백안(伯顔)에게 제거된다. 그의 실각으로 충혜왕도 이해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런 연유 때문에 충혜왕과 기 황후는 불편한 관계였다.

충혜왕이 1339년 11월 부왕 충숙왕이 사망해 두 번째로 즉위한다. 그런데 4개월 후인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한다. 8년 전 순제를 제거하려 한 연철목아의 후원을 받은 충혜왕은 기 황후의 등장으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충혜왕은 이해 3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원나라에 파견한다. 또한 기 황후의 재정기관인 자정원(資政院) 책임자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이듬해(1341년) 2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으로 책봉한다. 충혜왕이 기 황후의 환심을 얻어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다.

 

이러한 충혜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기 황후 일족을 중심으로 한 부원(附元) 세력이 고려에서 활개를 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 황후 역시 충혜왕 재위 동안 자신의 일족이 고려에서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정국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철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8월 충혜왕이 음란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원나라에 올린다.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에 기용된 지 불과 3년 만에 기철은 국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정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결국 충혜왕은 이듬해(1344년) 기 황후의 측근 환관 고용보에 의해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어 왕위를 잃는다.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유배 도중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기 황후, 편협한 정치로 역사의 혹평
이어 충혜왕의 8살짜리 아들 충목왕이 즉위한다. 환관 고용보가 그를 안고 황제에게 선을 보인 후였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충정왕을 내세웠다’(『고려사』 권38 공민왕 총서)고 한다. 기 황후 일족이 공민왕 대신 충혜왕의 서자이자 11살짜리 나이 어린 충정왕을 선택한 것이다. 기 황후 일족이 고려 국왕 임명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다.

이때 20세의 공민왕은 나라 사람의 신망을 받는 훌륭한 제왕의 자질을 지녔으나 두 번이나 국왕에 임명되지 못했다. 충정왕이 재위 약 2년 만에 죽자 그때야 즉위한다.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이 높은 신망을 받고도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역시 원나라 공주 소생의 자식이 아니라는 혈통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형인 충혜왕의 죽음을 목격했고 3수(修)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과 기 황후 일족의 관계는 원만할 수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원나라의 쇠망과 맞물려 큰 저항 없이 단행되었다.

기 황후는 일족과 측근이 제거되자 황제와 태자에게 복수를 요청한다. 고려 출신 원나라 고위 관료 최유(崔濡)는 기 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한다.

 

1363년(공민왕 12) 5월 고려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는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요새에 군사를 배치한다.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1363년(공민왕 12) 6월 고려를 침공했으나, 이듬해 1월 마침내 패배한다.

이듬해(1364년) 5월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 덕흥군 옹립과 공민왕 폐위에 앞장선 인물들의 처단을 통보하면서, 6월엔 공민왕을 다시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고려가 신흥 한족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4년 후 원나라는 신흥국 명나라에 쫓겨 몽골 지역으로 쫓겨났다. 1365년 12월 기 황후는 원나라 황제의 정후(正后)가 되지만 빛바랜 영화에 불과했다. 온 생애를 바쳐 얻은 권력으로 원나라에선 자신과 황태자, 고려에선 일족의 안녕과 지위를 유지하려던 그녀의 편협한 정치는 모국 고려에서조차 외면을 받아 역사의 혹평을 받게 된다.
[출처] : 박종기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 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