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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그림을 만나다 Ⅱ

문수봉(李楨汕) 2018. 1. 11. 11:55

한국학 그림을 만나다 Ⅱ


순종즉위식,파초도,환어행렬도,중인수장가들,일본소설속의 조선풍속화,



6. 순종황제 즉위식 광경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즉위식  



12장복을 착용한 순종황제

[대한제국 -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0), 262쪽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순종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 1874~1926)이다. 그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귀하디귀한 황실의 자손이었다. 태어난 바로 다음 해에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는 세자가 되었고, 아버지 고종이 대한제국()을 탄생시키며 황제로 등극할 때 황태자로 거듭났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세자 → 황태자 → 황제. 얼핏 보기엔 그저 비단길, 꽃길만 밟고 살았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표면에 치장된 거창한 신분 뒤에 드리워진 그늘은 깊고 어두웠다. 순종은 평생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근대 전환기에 펼쳐진 구중궁궐의 갖가지 변혁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한순간도 마음 편한 날 없었다.

장 큰 상처는 일본 자객에게 어머니 명성황후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사건이다. 사랑과 자혜로움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신마저 불태워져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그 슬픔을 씻기에는 3년이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심상삼년()을 세 차례나 거듭하며 9년이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측은한 그의 곁을 묵묵히 함께하던 황태자비마저 불현듯 세상을 떠나버린다.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황태자비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찢어지는 고통을 한 번 더 감내해야 했다.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황태자비는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났다. 그것은 굴곡 많던 구한말, 궁중에서 태어난 순종의 운명이었다.

거짓 황위 계승식을 꾸미다

 

순종의 황제 즉위는 그의 고단한 인생 여정에 놓인 또 하나의 큰 짐이었다. 왜 황제 즉위가 기쁜 일이 아니고 짐이 되었다는 말인가? 순종의 황위 계승이 영광스럽지 못했던 이유는 고종황제에게 아름답게 물려받은 황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 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황권을 탐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제3자가 끼여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갑작스러운 고종황제의 퇴진은 결코 고종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특사를 출석하게 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 실상을 세계에 알리려 한 일)이 일제에게 알려지면서 고종황제는 벼랑 끝에 내몰린다. 일제가 고종황제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이 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며 일제에게 강하게 항변하였다. 거듭되는 일제의 위협과 압박을 끝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결국 일제는 고종황제를 밀어낼 정치적 음모를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고종황제를 덕수궁 늙은이로 가둬놓을 생각이었다. 일제는 고종황제 대리인과 순종황제 대리인을 등장시켜 ‘거짓 황위 계승식’을 꾸몄다. 마치 아무 문제 없이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황권을 넘겨준 것처럼 연극을 한 것이다.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殿)에서 행한 이 엉터리 의식은 이러하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모두 불참
고종황제 대리인과 순종황제 대리인이 등장
고종황제 대리인이 양위 조칙을 읽음
양위 조칙을 순종황제 대리인이 받음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시나리오를 현실화하였다. 그리고 그 현실을 사실로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꾸민 ‘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양위식’으로 둔갑시켜 일본의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하였다. 고종황제가 자발적인 의지로 순종황제에게 평화롭게 정권을 넘겨주었다고 선전하였고, 그것을 ‘진실’로 못 박으려 했다.


대한제국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고종황제는 황위를 넘겨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일제가 황위를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어떻게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제에 의해 졸속으로 행해진 엉터리 행사였을 뿐이다.



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기념한 사진엽서.

왼쪽에 순종황제와 태극기를, 오른쪽에 고종황제와 일장기를 배치하여 고종황제가 무력해졌음과 동시에 순조로운 권력 이양인 것처럼 묘사하였다.제작연도 미상,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일제는 정치적 만행이었던 ‘엉터리 황위 계승식’을 기념한 사진엽서도 발행하였다. 사진엽서의 왼쪽 동그라미에는 순종황제, 오른쪽 동그라미에는 고종황제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국기를 배치하였다. 순종황제 쪽에는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가, 고종황제 쪽에는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가 선명하다. 일제는 고종황제 뒤에 일장기를 배치하여 이미 고종황제가 무력()해졌음을 교묘하게 묘사하였다. 대한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착실하게 이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시각적 폭로’였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도 흩날리고 있다. 붉은색이 엽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태양의 빛깔.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에 이미 태양, 해가 들어 있지 않은가. 붉은색은 일본 그 자체다. 따사로운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흩날리는 벚꽃 향기를 맡는 가운데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는 환희. 일제가 고종황제를 황위에서 밀쳐내는 자작극을 단행한 후 맛본 그들만의 희열을 사진엽서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이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찬탈했던 실상이자 그 증거물이기도 하다.



1907년 8월 4일자로 발간된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lustrata)]의 표지에 실린 일러스트. 순종황제의 대관식 장면을 묘사한 일러스트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출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태학사, 2005), 201쪽 

한편 대한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이탈리아 로마까지 전해졌다. 1907년 8월 4일자로 발간된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lustrata)]지에 한 장의 일러스트가 게재된 것이다. 그 하단에는 ‘L'INCORONAZIONE DI I-TSACK, NUOVO IMPERATORE DI COREA’라고 쓰여 있다. ‘코리아의 신()황제, 이척의 대관식’이란 뜻이다.

이척()은 순종황제의 이름이다. 순종황제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음을 알리는 보도이다. 그 예식의 진위 여부는 외신()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또 하나의 뉴스거리에 불과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그저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coronazione, coronation)으로 비춰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일러스트는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황위에 앉아 있는 인물, 그가 착용한 복색, 생뚱맞게 참석한 궁중 무희들……. 혹시 일제가 조작한 홍보용 일러스트가 아닐까? 일제는 자신들이 성공리에 끝낸 이 사건을 전 세계에 공표하고 싶었을 게다.


공표는 고종황제의 복귀를 철저하게 봉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방법이니까. 그리하여 광고용으로 거짓 황위 계승식 장면을 재구성한 일러스트를 제작한 후 외신들에게 배포하였고, 외신들은 그것을 자국으로 발송해 특보로 보도하기에 이른다. 일제가 배포한 홍보용 일러스트 중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전해져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에 게재된 것이 아닐까?


신식이 투입된 새로운 즉위식

순종황제 즉위식은 1907년 8월 27일 덕수궁 돈덕전(殿)에서 거행되었다. 일제의 자작극이었던 가짜 황위 계승식으로부터 4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장에는 국내외 관원, 각국 영사() 등 3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에게는 서구식 복장(대례복() 또는 프록 코트) 착용과 단발을 권하였다.

 값비싼 서구식 대례복을 장만하지 못해 사직을 청하는 관리가 속출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참석이 확정된 이들에게는 초청장과 안내 책자인 [대황제폐하 즉위예식의주()]를 배포했다. 책자에는 즉위식 순서, 자리 배치, 즉위식장 안내도가 수록되었다.



순종의 황제 즉위식장(돈덕전) 안내도,

대황제폐하 즉위예식의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즉위식장 안내도를 상세히 살펴보면 돈덕전은 어실(), 휴게실 두 곳, 식당(), 어탑()이라는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리고 건물 주위에 악실()과 분수기()가 있다. 어실은 순종황제를 위한 공간이고, 휴게실은 즉위식 참석자들을 배려한 것이며, 어탑이라는 곳이 즉위식장인 것으로 보인다. 악실은 음악을 연주할 악인()들을 위한 공간일 게다.


즉위식에 참관하기 위해 돈덕전에 도착한 여러 참석자는 휴게실에서 대기하다가 즉위식장으로 나아가 정해진 위치에 섰다. 어실에서 복색을 점검한 순종황제가 전통적인 궁중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면복(: 조선 시대 임금이 제례() 때 착용한 관복)을 착용한 채 즉위식장으로 입장하였다. 참석자들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이완용이 축하문 낭독을 마치자 참석자들은 다시 허리 굽혀 인사했다.

순종황제는 잠시 퇴장하였다. 육군 대장복으로 갈아입은 순종황제가 재등장하였다. 일본에서 파견된 장곡천() 대장()과 영사() 대표 뱅카르(, Léon Vincart, 벨기에)가 축하글을 낭독하였다. 이어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참석자들은 ‘순종황제 만세’를 세 번 외친 후 순종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순종황제가 퇴장했다. 참석자들도 퇴장했다.

참석자 기립
면복을 착용한 황제 입장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이완용의 축하문 낭독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황제 퇴장
육군 대장복을 착용한 황제 입장
장곡천 대장과 뱅카르의 축하글 낭독
군악대의 애국가 연주
만세 삼창
황제에게 허리 굽혀 인사
황제 퇴장
참석자 퇴장


군복을 입은 순종황제


이는 일찍이 궁중 의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이다. 전통복식을 착용한 채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예를 표하던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궁중 의식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현대적인 예식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전체적인 구성이 요즘 행사장 의식 순서와 유사하다.


특히 외형상 주목되는 사항은 황제가 면복에서 육군 대장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점, 군악대에 의해 애국가가 연주되었다는 점, 참석자들이 황제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지 않고 요즘처럼 허리만 굽혀 인사했다는 점이다. 육군 대장복은 황제가 착용했던 군복()의 일종으로 서구식 복장이다.

군악대는 1901년에 궁중에 신설된 서양식 악대였다. 애국가는 군악대 음악 교사로 부임한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가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악곡이었다. 허리만 굽히는 인사법은 서구식 예법이다. 이렇게 즉위식에 등장하는 서구식 복장, 서양식 악대와 음악, 서구식 인사법은 ‘신식()’으로 압축된다.

전통적인 궁중 의례가 대한제국 시기에도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새로운 요소를 즉위식에 대거 투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왜 고종황제 즉위 의례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은 걸까? 궁중예식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전체 틀이 180도로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하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후 순종이 황제로 등극하는 껄끄러운 시점에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모든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행사의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춰보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발동한다. 주인공은 바로 순종황제다. 즉위식에서 드러나는 순종황제의 특징은 면복을 착용했다가 군복으로 갈아입은 점이다.


왜 전통식 복장에서 서구식 옷으로 바꿔 입었을까? 고종이 황제로 등극할 때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서양식 군복이 왜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당시 순종황제의 뒤에서 즉위 행사 준비를 시시콜콜 조정한 이는 일제였다. 그렇다면 ‘서구식 군복 등장’을 주도한 일제는 어떤 생각을 품고 이를 단행했을까? 과연 일제는 즉위식에서 복장 변화를 통해 순종황제를 어떤 존재로 재탄생시키려 했던 것일까?


거대한 덫에 걸리다

 

가짜 황위 계승식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엽서를 다시 살펴보자. 그중에서 고종황제를 상세히 보자. 그의 뒤에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다. 아, 그렇구나! 일제는 이미 고종황제를 그들의 권역에 들어온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뒤를 이은 순종황제의 위상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순종황제를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지닌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아니라,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온 예비 식민국의 대표 정도로 설정한 것이다. 일제가 생각하는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 일제의 권역에 발을 들여놓은 허수아비 황제였다. 이러한 일제의 계략을 ‘황제 즉위식’이라는 공식적인 절차에서 눈에 띄게 드러냈으니, 즉위식에서 두드러지게 작동한 ‘신식’은 바로 일제의 야욕을 보조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던 측면이 있다.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사용된 ‘신식’이라는 코드는 구식, 즉 전통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신식의 부각은 상대적으로 전통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통과의 끈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전통’은 대한제국의 다른 얼굴이었으며, ‘신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이었다.


‘신식’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는 근대화와 연계되어 대한제국에 순풍을 달아줬던 아이템이었지만, 순종황제 즉위식에서는 역풍으로 기능하였다. 순종황제가 전통복식인 면복을 벗고 서구식 복식인 군복을 착용한 채 재등장한 행위는 대한제국과 결별한 채 일제의 휘하로 들어가는 계산된 장치였다. ‘신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일병합 기념사진. 순종황제(왼쪽)와 메이지() 왕(오른쪽)제작연도 미상,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일제는 순종의 황제 즉위를 ‘한국의 유신()’이라고 규정지었다. 유신이란 용어는 일본의 ‘명치유신()’에 등장하는 ‘유신’과 긴밀성을 지닌다. 이전 시기와 차별되는 새로운 정치, 그것이 유신이다. 일제가 순종황제 즉위를 유신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노선이 다름을 알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고종황제와의 연결고리를 철저히 차단시켜 대한제국의 생명력을 끊으려는 작전 실행의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순종황제 즉위와 한국의 유신을 통해 구상했던 새로운 국가는 어떤 형태였을까? 그것은 바로 일제의 식민국가 건설이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일제의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통로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결코 영예로운 황제 즉위식이 아니었다. 면복을 벗은 후 군복을 착용한 채 즉위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순종황제의 온몸을 옥죄고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순종황제의 마음은 불안하고 침울해졌으며 암담했다. 강제 퇴위된 아버지를 대신한 황제 자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불쾌한 수렁처럼 느껴졌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원구단(: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에서 철저하게 전통방식으로 황제 등극의를 행했던 고종황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동아시아에서는 황제가 천자()이기 때문에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인 원구단에 나아가 제사를 올려야만 정식 황제로 공인받는다고 여겼다. 하늘 제사는 황제의 권위와 입지를 굳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정도로 핵심적인 행사였다.

공식적인 황제 인증이 원구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통념이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황제는 끝내 원구단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제대로 황제 공증을 받지 못한 채 즉위하였다. 순종은 그림자 같은 허수아비 황제였을 뿐이다.

마지막 황제의 뒤안길

순종의 장례행렬(1926).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종황제는 불과 4년 만에 허수아비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순종은 일본 황실에 종속되었고 이왕()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순종은 창덕궁에 기거하며 옥돌(: 당구)을 취미 삼아 힘든 순간순간을 털어버리려 했다. 때로는 진열된 세계 각국의 시계를 바라보며 이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시름에 젖기도 했다. 그가 아끼던 옥돌과 시계만이 변치 않는 벗으로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고종이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순종이 아버지 고종을 잃은 날은 1919년 1월 21일이었다. 한창 추운 겨울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얼어붙었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으로 경성의 쌩쌩한 칼바람만 드나들었다.


고종의 서거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퍼졌다. 독살설이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분노가 창덕궁 담을 넘어 순종에게까지 도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 된 1926년 4월 25일, 순종은 53세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일본에는 현재까지 황제가 존재한다. 일본에는 마지막 황제가 없다. 일본의 황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마지막 황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황실은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순종황제이며, 그의 즉위식은 철저하게 일제의 계산과 주도로 이행되었다.

순종황제 즉위식은 일제의 식민지로 가속화되는 출발 지점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궁궐이라는 무대에 올린 일제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연주된 음악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아닌가. 1902년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프란츠 폰 에케르트가 작곡한 바로 그 노래, 분명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처음과 마지막 부분의 노랫말이 반복되고 있다. 그 뜻은 이러하다.

“하늘에 계신 상제()여, 우리 대한제국의 황제를 도와주시옵소!” 

대한제국의 황제를 도와달라는 간절함이 깃든 애국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길목이었던 순종황제 즉위식에서 유유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국가를 연주하도록 계획적으로 방관한 일제의 속마음은 이러했다. “봐라! 하늘은 결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돕지 않는다. 순순히 일제의 식민국이 되어라. 하늘은 대한제국을 버렸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한일병합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군들에 의해 약간 개사되어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불렸다. 독립군들은 <대한제국 애국가>에 독립의 염원을 담아 목이 터지도록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리고 1945년, 드디어 광복이 찾아왔다. 과연 하늘은 대한제국을 도왔는가, 돕지 않았는가?

[출처]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순종황제 즉위식 광경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7. 파초가 있는 풍경 - 옛 문인들의 시와 그림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김동명의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부드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1930년대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파초에 감정이입 하였다는 교과서적인 해설과 상관없이, 이 시 속의 파초는 어찌나 낭만적이고 이국적인지 내게는 오히려 조국의 상실을 운운하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수녀보다 외로운 넋, 정열의 여인, 부드러운 치맛자락으로 그려진 파초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낯선 남국의 열대 식물이었다. 그러니 한동안 내게 파초는 상상 속의 뜨거운 풍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파초는 멀리 이국에서 온 낯선 식물이 전혀 아니었다. 중국 원산의 온대성 대형 초본식물인 파초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일찍부터 재배되었으며, 제주도에서는 자생하였다. 그래서인지 옛 문인들의 시문과 그림 속에서 너무나 흔하게 자주 만날 수 있는 식물이 바로 파초이다.

파초가 바나나와 동종의 식물인지는 더 늦게 알게 되었다. 파초의 전체 모양과 꽃, 열매는 바나나와 무척 닮아서 구별이 잘 안 되지만, 파초는 바나나에 비해 결실성이 아주 떨어지고 열매도 바나나보다 작고 먹을 수도 없다. 중국의 시에 등장하는 누런 파초실()은 알고 보면 제수로 올린 바나나였으니, 요즘 간혹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리는 것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파초가 있는 풍경, 겸재 정선의 <척재제시()>



김홍도, <초원시명()>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28 x 37.8 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봉래선경()>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23.2 x 30.3 cm, 간송미술관 소장

 

옛 그림 속에 파초가 그려진 예는 너무 많다. 정조의 <파초도>(, 보물 제743호)처럼 파초만을 그린 그림도 있지만, 정원에 그려진 파초가 대부분이다. 은자()의 정원, 도사()의 정원, 문인()의 정원에는 늘 파초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홍도(, 1745~?)의 <초원시명()>을 보면 시원스럽게 쭉 뻗은 파초 한 그루 아래 질박한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 책 두 권, 원형 벼루, 몽당 먹, 족자 세 개, 줄 없는 거문고, 투박한 찻잔 세 개가 놓여 있다. 탁자 옆에는 미소를 띤 동자가 질화로에 무쇠 다관을 올려놓고 쪼그리고 앉은 채 부채질을 하고 있다. 은자는 보이지 않는데 탁자 옆에는 사슴 한 마리가 있어 이곳이 심산유곡()임을 알게 해준다.

김홍도의 <봉래선경()>에도 커다란 태호석 옆에 곧게 뻗은 큰 파초와 그 옆에 붙어서 자라는 아기 파초 한 그루가 보인다. 긴 평상 위에는 두루마리가 꽂힌 고동기()와 질화로가 있고, 평상 옆에는 단정학() 한 마리가 보인다. 이처럼 은자의 탈속적인 공간이나 선계()에 잘 어울리는 식물이 파초였다.

또 파초는 곧잘 문인이나 예인()의 방에서도 보인다. 김홍도의 <월하취생도()>를 보자. 이 그림은 당나라 시인 나업()의 생황시 “월당의 생황소리 용울음보다 처절하네()”를 화제로 한 그림이다.

방에는 질그릇 술병, 사기 사발, 흰 족자 두 개, 벼루와 먹, 바닥에 나뒹구는 붓 두 자루가 단출하게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 준수한 사내가 맨다리로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파초를 깔고 앉아 생황을 불고 있다. 널리 알려진 <포의풍류도(>)에도 한 선비가 맨발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당비파를 타고 있는데, 그 옆에 커다란 파초 잎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렇듯이 파초 잎이 방 안에 놓인 이유는 파초 잎에 시를 쓰고 글씨를 쓰는 아취(:고아한 정취) 때문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화분에 심어진 파초도 보이고, 또 꽃병에 꽂힌 파초 잎도 보인다. 그림에만 파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백자 항아리에도 그려져 있고,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에는 현판이 파초 잎 모양을 띠고 있기도 하다.




김홍도, <월하취생도()>제작연도 미상,

종에에 수묵담채, 23.2 x 27.8 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 <포의풍류도()>제작연도 미상, 종에에 수묵담채, 27.9 x 37 cm, 개인 소장


많은 파초 그림 중에서 가장 시원스럽게 그려진 예는 아마도 겸재() 정선(, 1676~1759)의 <척재제시(>([경교명승첩()])가 아닐까. 겸재는 이 그림을 웅어와 함께 벗 사천() 이병연()에게 보냈다. 화제() ‘척재제시’는 척재 김보택(, 1672~1717)이 웅어 꿰미를 선물 받고 시를 지어 답례한다는 뜻이다.

김보택은 김만기()의 손자요, 김진귀()의 둘째 아들로 김춘택()의 동생이었다. 최완수에 따르면, 김보택은 당대 제일의 명문가로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니 계절의 진미 웅어가 진상됨이 당연한 일이고, 아마도 이 일이 널리 알려져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였다.

정선,<척재제시()>([경교명승첩])1741년, 비단에 채색, 28.2 x 33.1 cm, 간송미술관 소장

사방이 신록으로 빽빽하게 에워싸인 사랑채 정원이 그림 속 공간이다. 어찌나 푸름이 넘치는지 이 그림처럼 사방에 여백 없이 신록으로 가득 찬 정원을 보지 못했다. 사랑채의 오른편 파초는 또 얼마나 무성하게 잘 자랐는지 지붕까지 치솟았고, 열어젖힌 문의 한쪽을 가릴 정도다.

섬돌 아래에는 젊은 군노(: 군무를 맡아보던 관아에 속한 사내종)가 웅어 꿰미를 치켜들고 섰는데, 탕건 차림을 한 덥수룩한 흰 수염의 주인은 방문을 열어젖히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시를 쓰고 있다. 파초의 싱그러움도 보는 눈을 시원스럽게 만들지만, 두 인물의 정다운 배치에 그림을 읽는 맛이 즐겁다.

이 그림을 받은 사천(이병연)은 그림의 뒷면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써서 돌려보냈다.


<strong>설화전 여섯 폭을 싸서 종해헌에게 보냅니다. 제가 시를 짓고자 하나 좋은 시가 없어서, 설화전을 펼쳐놓고 짐짓 머뭇거립니다. 차라리 파릉 태수(양천현령, 곧 정선을 이름)에게 권째로 보내니, 강가에서 젖혀진 두건을 쓸 때를 기다림만 같지 못합니다. 신유년(1741) 첫여름에 사천 아우(, , , . , . , </strong>).

버들가지에 꿰어 보낸 것으로 한술 뜰 수 있었습니다. 제 시를 보시고자 한다 하니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몇 배나 더합니다. 육지가 막아 다치게 될까 봐 하나의 시축 중에 넣어 보내니 따로 육지를 돌려보내실 때 함께 돌려보내주십시오. 속말에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병든 심회를 위로하기가 어렵지 않다 합니다. 18일 새벽에 조아림(, . , , . , , , . , ).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짓지 못했으니 다른 날 한강가에서 만나 두건이 젖혀질 정도로 호탕하게 시주()의 풍류를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하고, 또 보내준 웅어를 맛있게 먹었다고 사례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림 속에 그려진 웅어를 실제로 맛본 이는 척재가 아니라 바로 겸재의 벗 사천인 셈이다.

웅어는 예전 임금님이 드시던 귀한 물고기로 조선 말기에는 행주에 사옹원() 소속의 ‘위어소()’를 두어 이것을 잡아 왕가에 진상하던 것이 상례였다. 행호의 고기잡이 배들이 바람을 타고 경쾌하게 늘어선 풍경을 담은 겸재의 <행호관어()> 옆에는 사천이 지은 시가 고운 시전지(: 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에 적혀 있다.

늦봄엔 복어국                                  
초여름엔 웅어회                              
복사꽃 필 적 물결이 불어                  
행호 밖으로 그물을 던지네.               
 



정선, <행호관어()>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채색, 23 x 29.2cm, 간송미술관 소장


<척재제시>와 <행호관어>의 두 그림을 나란히 감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겸재와 사천이 웅어회를 안주 삼아 시화를 즐기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하다.


두 그림이 실려 있는 [경교명승첩]은 일명 ‘시화상간첩()’이라고도 불린다. 1740년 70세의 노시인() 사천이 양천현령으로 떠나는 65세의 노화가() 겸재를 전송하며 ‘시화상간()’을 약속하였고, 그 약속대로 시화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온 별칭이다.

겸재는 이 화첩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 ‘천금을 주어도 절대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인장()을 새겨 그림 사이사이에 찍어놓았는데, <척재제시>의 아래 쪽 화제 옆에도 ‘천금물전’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래서인지 <척재제시>에 보이는 파초의 무성한 기운이 백발 시인이 살포시 띄운 미소와 어울려 늙어도 시들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파초와 웅어, 시와 그림이 빚어낸 우정의 풍경이 바로 <척재제시>라 하겠다.

고즈넉한 산사의 파초

 

절을 자주 찾는 사람이라면 어느 절에선가 법당 섬돌 아래쯤에서 푸르른 파초를 본 적이 있으리라. 물론 파초인 줄 모르고 스친 이들도 많겠지만. 산사에 파초가 어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좀 무서운 이야기가 전한다.


달마가 북위()의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향해 앉았는데, 혜가()가 불법을 물으러 와 밤새도록 문 앞에서 눈을 맞고 서서 법을 구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일절 응대를 하지 않았고, 결국 혜가는 아침이 되자 자기 팔을 계도()로 끊었다. 혜가의 뿜어 나온 피 속에서 파초가 솟아나고, 그 잎에 글을 써서 달마에게 바쳐 정성을 표했다. 상상만 해도 조금 어질해지는데, 이를 그린 그림을 인터넷 검색으로 보고야 말았다.

천안의 광덕사 법당의 한 벽에 바로 이 장면이 그려져 있다. 혜가가 무릎을 꿇고 커다란 파초 잎에 자신의 잘린 왼팔을 얹어 바치는 장면. 아주 오래 전에 광덕사로 답사를 간 적도 있건만, 도무지 이 벽화를 본 기억이 없고 그 대신 호두나무 얘기를 한참 했던 기억만이 선하다.

파초는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이테가 없고 그 속은 알맹이도 없고 견고함도 없지만, 자르면 그 위에 다시 싹이 올라온다. 이런 파초를 보고 유마힐()은 “이 몸은 파초와 같아 속에 견고함이 있지 않다(, )”라 하였다.

왕유()의 <원안와설도()>에 그려진 눈 속의 파초는 실제의 너머를 지향하는 초일()한 정신을 환기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파초는 그 어떤 화초보다 절간에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작 나와 같은 속인들은 절간 뜰의 푸른 파초에서 이런 연상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파초의 싱그러운 푸름이 절간이라 더욱 푸르고 싱그러워 보일 뿐.


고려의 선사() 혜문(, 송월화상()이라고도 함)이 보현사()에서 쓴 시를 읽어보자.


향로 연기 자욱한 속에 범패 소리 울리는데                  
깊숙한 방에 고요히 상서로운 흰 기운 피어오르네.        
문밖 뻗은 길엔 남으로 북으로 가는 사람                      
바윗가 늙은 솔엔 예나 이제나 달빛 비치네.                 
빈 뜰 새벽바람에 풍경소리 울리고                             
작은 뜰 가을 이슬에 파초는 시들었네.                       
내가 와서 고승의 자리에 앉으니                               
하룻밤 청담은 그 값이 만금일세.                                

 

이 시에서 명구()로 꼽히는 구절은 함련(: 셋째 구와 넷째 구)이지만, 새벽바람에 풍경소리 울리는 고즈넉한 절간의 뜰에 막 가을 이슬 맞아 시들어가는 파초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매화를 보러 선암사에 가거나, 동백을 보러 선운사나 미황사를 가거나, 또 여름날 상사화를 보러 선암사를 찾기도 하였다. 이제는 붉은 파초 꽃이나 푸른 파초 잎을 보러 갈 산사를 한 곳 찾아야겠다. 그러자 어느새 누군가 “화엄사 각황전 섬돌 아래 파초가 볼 만하지요” 한다.

문인의 맑은 벗, 파초

 

무어라 해도 파초를 가장 즐겨 가꾼 이들은 사대부 문인들이었다. 구례의 운조루를 그린 <오미동가도()>를 보면, 사랑채 마당에 파초가 보인다. 담양의 소쇄원을 그린 <소쇄원도>에도 제월당 왼편과 소쇄원 입구에 파초가 한 그루씩 보인다. 김인후가 소쇄원에 부친 시 48수 중 한 수가 바로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였다.

김조순의 집을 그린 <옥호정도()>에도 사랑채 마당 끝자락에 파초가 보인다. 강진의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초당도>에도 초당 뒤편 괴석 옆에 파초가 심겨 있다. 김조순의 옥호정을 제외하면 지금도 남아 있는 정원들이라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곳들이다. 운조루와 다산초당에는 두 번, 소쇄원은 여러 번 가보았는데, 어째서 파초를 본 기억은 잘 나지 않을까? 파초에 대한 또렷한 이미지를 갖지 못한 채 들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찾을 때에는 꼭 파초를 찾아보리라.


문인들이 글로 그려낸 아름다운 정원 풍경에도 파초는 빠지지 않는다. 다산의 서울 명례방 집 정원에도 크기가 방석만 한 파초가 한 그루 있었고, 이이엄(广) 장혼()이 인왕산 옥류동에 그린 집 ‘이이엄’의 사랑채 왼편에도 파초 한 그루가 있었다. 이렇듯 문인들의 사랑채에 파초가 제격인 이유는 파초에 담긴 문취() 때문이었다.

글씨를 잘 썼던 회소(, 당 나라의 승려이자 명필)가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파초 1만 그루를 심어놓고, 그 잎에다 글씨를 연습했다는 고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백거이()가 “한가할 땐 파초 잎 뜯어다가 시 써서 읊는다()”라 읊었듯이, 파초 잎에 글씨를 쓰고 시를 적는 것이 문인의 아취였다.

유달리 파초를 즐겨 읊은 시인 서거정()도 “시 생각이 물처럼 맑은 게 하도 괴이하여, 파초 잎 위에다 또 새로운 시를 적어보네(, )”라 하였다. 이러한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는 이재관의 <파초제시도()>를 꼽을 수 있다.



이재관, <파초제시도()>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37 x 59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파초를 좋아하여 ‘마음의 벗’이라 부른 이로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영해에 귀양 중인 이서구()가 보낸 편지를 받은 연암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 중에는 파초를 벗한 이가 없는데, 나는 유독 파초를 사랑하지요. 줄기는 비록 백 겹으로 돌돌 말려 있지만 가운데가 본래 텅 비어 한번 잎을 펼치면 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된 것이라오. 달 밝은 창이나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가슴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하니, 중산군(: 중산에서 나는 토끼의 털로 만든 붓)이 민첩하여 말없이 도망치는 것과는 같지 않소이다. 

 

파초는 심지가 없이 속이 텅 비어 있다가 잎을 펼치면 있는 그대로를 다 드러내니, 그래서 마음을 터놓은 벗이 된다 하였다. 감추는 것이 많고 꾸밈이 많은 우리 인간과 참으로 다르다. 또 연암은 김이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파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였다.

지난가을에 자녀와 남녀 종들을 다 보내고 나니 관아가 온통 비었고, 몸에 딸린 것은 관인()을 맡아 곁을 지키는 동자 하나뿐인데, 밤이면 문득 꿈결에 잠꼬대를 외치므로 한심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늘 그 아이로 하여금 동헌()을 지키도록 바꾸어주고, 홀로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여 삼동을 났습니다.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 

 

한겨울 눈이 내려도 화분에 심긴 파초는 방 안에서 푸른 자태를 뽐내며 연암의 곁을 지켰다. 특별한 공무 없이 관아의 방에서 눈 내리는 날 파초를 곁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는 연암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연암은 경상도 안의에 세운 하풍죽로당()에도 뜰 가운데 열한 뿌리의 파초를 심어 가꾸었다. 연암은 파초를 감상하는 정경을 두고 이렇게 묘사하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이 산란하여 탕건이 절로 숙여지고 눈꺼풀이 무겁다가 파초의 잎을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갑자기 개운해지는 것은 시원한 소낙비 내린 낮이오”라고. 연암과 각별한 사이였던 이덕무() 또한 참으로 비슷한 정경을 글로 그려놓았다.

<strong>더운 여름날에 파초원(</strong>)에 앉았노라면 졸음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이때 소나기가 좍좍 파초 잎을 치면 물방울 흐름에 따라 잎이 까딱까딱거리고, 세찬 빗발로 이는 안개 같은 물방울 때문에 얼굴이 서늘해져서 졸음을 쫓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를 기다리며

 

[소창청기()]에 의하면, 소리()의 운치에 대해서 논하는 자들이 계성()ㆍ간성()ㆍ죽성()ㆍ송성()ㆍ산새 소리[]ㆍ그윽한 골짜기에서 나는 소리()ㆍ파초에 듣는 빗소리()ㆍ낙화성()ㆍ낙엽성()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천지()의 맑은 소리로 시인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라 하였다.

나는 시냇물 소리와 계곡물 소리, 계곡에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어보았다. 담양 시골집에 갈 때마다 대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한 적도 많았다. 솔바람 소리도, 산새 소리도 들어보았다. 꽃이 지는 소리와 낙엽이 지는 소리는 눈과 마음으로 들어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있으니, 바로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다. 옛 문인이 그렇게나 좋아한 그 소리를 말이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창가에 파초를 심어두고 빗소리를 듣는 아취를 기대할 수는 없다. 물론 옛 문인들이 그랬듯이 화분에 심어두고 본다 해도, 아파트에서는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언젠가 새하얗게 눈이 내린 날, 경주 기림사를 찾아가 법당 처마 아래 쪼그리고 앉아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한참이나 들은 적이 있듯이, 이제는 산사를 찾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소나기를 만나 파초 잎의 빗소리를 한번 기다려 볼 수밖에. 아니면 제법 멀고 먼 어느 날 내가 오랫동안 그리고 있는 노년의 집이 현실이 되는 날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를 마음껏 들으려니, 그때 혹 다음 시와 같은 풍경도 보지 않을까.


나무마다 부는 더운 바람에 잎잎이 나란한데          
두어 봉우리 서쪽에는 비 짙어 새까맣네.                西
쑥빛보다 푸른 청개구리 한 마리                          
파초 잎에 뛰어올라 까치 울음 흉내 내네.                

 

이 시는 김정희()의 <소나기()>로 [완당전집] 제10권에 실려 있지만, 본래 유득공()의 <비가 오려나()>란 시를 살짝 고친 시이다. 유득공의 시는 “나무마다 부는 더운 바람에 푸른 잎이 나란한데, 두어 봉우리 서쪽에는 구름 기운이 짙어지네. 쑥빛보다 푸른 청개구리 한 마리가 매화가지에 뛰어올라 까치 울음 흉내 내네(, 西. , )”이다.

[출처] : 강혜선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파초가 있는 풍경>'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네이버 지식백과]




8. 파초의 노래 - 시원스러운 푸른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strong>- 조지훈, 〈파초우()〉</strong>

남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 〈파초우()〉를 새긴 조지훈(, 1920~1968) 시비에 발길이 머물게 된다. 어스름 저녁 파초 잎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푸른 산을 대하고 앉은 시인의 관조와 평정의 순간이 시원스레 다가온다. 이 짧은 몇 줄만으로도 다정한 사연과 달관한 인생의 자세가 전해지는 듯하다.



강세황, 〈벽오청서도()〉1712년, 종이에 수묵담채, 35.8×30cm, 개인 소장.


파초()라는 이름은 한 잎이 쭉 펴져 있고, 다른 한 잎도 쭉 펴져 있는 모습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 선인들이 정원수로 흔히 심어 사랑한 잎 넓은 식물로는 파초와 벽오동이 있으니 그 맑은 그림자만 너울거릴 뿐인데도 한 점 속세의 기운이 없는 점을 사랑하였다. 파초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주요한 정원 식물이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지금도 양반가 혹은 절의 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파초는 잎이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화조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강희안()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화목류를 9품으로 나누어 평하면서 파초를 앙우()ㆍ초왕()ㆍ녹천암()이라 부르고 부귀한 모습을 취하여 2품에 올렸다.

글씨를 잘 썼던 당나라 스님 회소()는 자신이 사는 곳에 파초 1만 그루를 심어놓고 ‘녹천암()’이라 불렀다. ‘녹천’은 뜰에 심은 한 포기 파초만으로도 창가에서 보면 하늘처럼 온통 푸르기 때문이다. 이서구()의 ‘녹천관()’이란 호도 파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리라.


정약용()은 파초의 꽃을 두고 “우유초는 가을이 되면 씨알을 따고, 봉미초는 바람 품고 흔들대지만, 아침 오자 피어낸 한 송이 꽃은, 추한 모습 볼 수 없는 꼴불견이지(, , , )”라고 읊어 광채 나는 펼친 잎들에 비해 볼품없다고 노래했다.

우유초()는 파초의 일종으로 달걀만 한 씨알이 소의 젖 모양으로 생겨 얻어진 이름이며, 봉미초()는 그 잎이 봉황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초는 3년 내지 5년을 자라야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면 다음 해 그 대궁은 말라 죽는다. 이를 1대라고 한다. 본 대 옆에 돋아난 어린 싹이 자라 다시 큰 줄기로 자라면 꽃이 피고 열매가 익은 뒤 시들고 만다. 18대가 되면 파초는 그 생명을 다한다고 한다. 한 대를 평균 4년 정도로 치면 18대는 72년이 되니 사람의 일생과 유사하기에 ‘파초십팔대()’라는 말이 나왔다.

파초의 일생

 

파초는 식물 중에서 가장 연약하다. 너무 건조하면 마르고 너무 음습하면 썩는다. 키우는 방법을 터득하면 쉽게 번성시킬 수 있고 키우는 방법을 모르면 말려 죽이기 십상이다. 강희맹의 [양초부()]를 보면 파초를 키우는 방법이 나온다. 언 흙이 완전히 풀리고 밤에 서리가 안 올 때쯤 반음반양인 땅에 커다랗게 구덩이를 판다.

그 속에 뿌리를 편안하게 앉히고 고운 흙으로 뿌리를 감싼 다음 보드라운 거름흙으로 지난해 묻혔던 자리까지만 묻어 주고 잠시도 마르지 않게 물을 준다. 4월이 오고 훈훈한 남풍이 불어오면 묵은 줄기(宿)에서 새잎이 나오고 묵은 줄기는 꺼멓게 떠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못 신게 된 짚신을 말 오줌에 담가놓았다가 뿌리 근처의 땅을 깊이 파고 빙 둘러 묻어주면 싹이 윤기를 띠며 빨리 크고 기운차고 왕성해진다. 녹색 전갈 같은 줄기는 촛대처럼 솟아나고 푸른 난새()마냥 잎이 나와 꼬리를 펴니, 부드럽고도 장엄하고 우람한 맵시로 범상한 뭇 화초를 압도한다고 하였다.


복사 오얏 붉고 흰 꽃 벌써 가지 떠나갔고
눈 돌릴 새 저 봄빛도 차례차례 시들건만
반갑구나, 서창 처마 밤을 이어 내린 비에西
한 뿌리서 청청하게 불쑥 솟은 저 파초여!

 - 황현(), 〈시골 마을의 저문 봄()〉

 

찬란한 봄날도 저물어간다. 매화도 피었다 졌고, 붉게 빛나던 복사꽃과 하얗게 눈부시던 오얏꽃도 피어난 차례를 따라 벌써 가지를 떠났다. 봄빛이 모두 다 덧없이 사라져간 휑한 가지 끝이 마음을 아쉽고 헛헛하게 한다.



강세황, 〈파초〉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수묵담채, 28.5×22.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심한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듯 비가 내린다. 서쪽 창가 처마에선 온밤 내내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낙숫물 소리가 하염없이 들린다. 잠이 깬 이른 아침 빗소리도 잦아들고 밝아진 창문을 무심코 열어젖혔다. ‘아!’ 그저 외마디 탄성이 절로 튀어나온다.

밤을 이어 내렸던 비의 내음을 맡고, 저 아득한 지심()에서부터 하늘을 밀어올리고 나타난 싱그러운 파초 대궁이. 쑤욱 솟아나온 뾰족한 새싹 한 자락 끝에 푸른 물방울이 맺혀 있다.

여름을 부채질할 장대한 모습을 전하려는 전령사인 듯, 장차 푸른 깃발을 흔들며 온 천지에 다가올 신록의 여름을 선언하는 기수인 듯이 그렇게 솟아있다. 반갑구나, 파초야! 작은 네 몸에서 애상을 기쁨으로 반전시키는 그 큰 힘이 있다니. 경이로운 새 생명에 대한 찬미이며, 싱그럽게 다가올 새로운 계절에 대한 환희이다.

여름에 뜰에서 자랄 파초를 생각하면 절로 시원해진다. 큰 키와 큰 잎의 이 초록 덩어리 식물은 여름이 주는 싱싱한 느낌을 온몸으로 발산하면서 주변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신통력을 부릴 것만 같다. 봄날의 사물들을 그려내고 있지만, 여름날 파초로 인해 누릴 청복(: 맑은 복)을 기대하는 시인의 즐거워하는 마음이 여운으로 남는다.

파초의 분양은 속인에게는 하지 않고 특별히 친한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고귀한 예물이다. 서거정은 〈영천이 파초를 보내준 데 대하여 사례하며()〉에서 “귀하신 분 정원에서 파초 옮겨주셨으니, 즐거이 창 앞 향해 터를 가려 심어두고, 덮고 찐 날 비바람 친 저녁 곧장 기다려서, 서늘한 밤 맑은 흥을 술잔에다 부치려오(, . , )”라고 하였다.


파초를 사랑하는 이유, 푸른 잎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파초는 파초과에 속하는 관엽식물로 중국이 원산지다. 잎이 넓은 파초는 정원수로 애용되었는데, 옛 사람들은 특히 여름날 파초 잎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좋아하였다.

장조()는 [유몽영()]에서 정원에 파초를 심는 것은 빗소리를 듣기 위해서이고,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파초에 마음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시원스러운’ 잎 때문일 것이다.

 서거정은 〈흥이 이는 대로 읊으며()〉에서 “대 그림자 솔 그늘이 가볍게 땅을 덮자, 납량(: 여름철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기운을 느낌)하는 못가 집이 다시 맑고 서늘해져, 저물녘에 한바탕 상쾌하게 내린 비에, 파초 위에 듣는 소리 너무도 사랑옵다(, . , )”라고 하여 파초우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파초를 사항했던 박지원도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이 산란하여 머리가 절로 끄떡여지고 눈꺼풀이 천 근 같다가도 파초의 잎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갑자기 개운해진다고 하였다.

강희맹은 그의 〈양초부〉에서 여름날의 파초를 노래한다. 맺히고 얽힌 정을 둘 곳이 없어 답답하고 외로운 회포가 쓸쓸할 때, 문득 저 파초의 푸른 잎이 너울너울 번뜩이면 바로 앞에서 곱디고운 비단 춤을 추는 듯하다. 이윽고 빈 뜰에 비가 내리고 창밖에 사람은 없고 방 안의 푸른 등은 깜빡깜빡 빛을 잃어 만 가지 느낌이 마음을 어지럽혀 세상을 버리고 훌쩍 날고플 때, 소낙비가 휘몰아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로 시름에 잠긴 혼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경자년(1780) 5월에 나는 죽서(西)의 태극실()에 있었다. 앞쪽 작은 화단에 새로 심어둔 파초 너덧 뿌리가 갑자기 10여 자 정도 자라서 저물녘이면 그늘이 창을 덮었다. 안석과 서가가 이 때문에 맑고 푸르러 기릴 만했다. 이때 날이 매우 무더웠다.

나는 폐병을 앓아 누워 있었는데 땀이 줄줄 흐르고 기운이 빠져 계속 꾸벅꾸벅 졸았다. 갑자기 섬돌 사이에 툭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청량한 기운이 얼굴을 스치기에 일어나 보았다.

구름장이 뭉게뭉게 일어 빽빽하게 퍼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져 파초 잎을 두드렸다. 후드득후드득 구슬처럼 흩어져 떨어졌다. 나는 귀를 쫑긋하여 한참을 들었다. 정신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명랑해져 병이 벌써 나았음을 깨달았다

- 서유구(), 〈우초당기()〉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유구는 파초를 매우 아꼈다. 이 글은 처남 박성용()의 거처 우초당()에 대한 기문이다. 방 앞 화단에 심어둔 파초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노라니 절로 정신이 맑아진다. 파초 잎을 타고 후드득 내리는 빗소리가 사랑스럽다.

상허() 이태준()은 파초가 폭염 아래서도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이 서늘하여 눈을 씻어주고, 비오는 날에는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는 소리가 좋아 그 시원함을 즐기려 파초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런 맛이 그의 수필 〈파초()〉에 보인다.

여름이면 장대하게 키운 파초가 폭염 속에 드리운다. 그는 싱그러운 그늘에 눈길을 주고, 비 내리는 날 넓은 파초 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청복으로 누린다. 파초 잎을 두들기는 빗소리, 자연의 소리에 젖어 여유와 시원함을 누리는 깨끗한 관조적인 마음, 서정감이 넘친다.


심사정, 〈패초추묘()〉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담채, 23×18.5 cm, 간송미술관 소장.

최립()의 시에 “집안사람 함께 모아 큰 잔치를 여는 사이, 계온 담은 파초 술잔 물러질까 걱정이네(, .)”라는 구절이 있다. 옛날에 풍류 삼아 파초 잎으로 술잔을 대신하곤 하였는데, 지금 잔치 자리에 나온 계주()처럼 독하고 진한 궁중의 명주는 파초 잎이 연약해서 아무래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파초 잎사귀로 만든 얕고 얇은 술잔 초엽()은 다루기는 조심스러워도 기막힌 운치가 있다.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나뭇잎으로 모아 차를 우려내듯 아껴가면서 조금씩 마시기 위해서 반드시 초엽을 썼다.

계곡(谿) 장유()는 “새벽 서리 뜰아래 파초에 내려, 찢긴 잎들 짙푸른 빛 바래버렸네(, )”라고 하여 영고성쇠()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늦가을이 되자 찬란한 파초의 영광도 시들어버려 바삐 지나가는 세월을 한탄한다. 이제는 파초를 거둬야 할 때이다.

옛사람들의 파초 보관 방법은 강희맹의 〈양초부〉에 보인다. 된서리가 오고 나뭇잎이 떨어지려 할 때가 되면 힘센 종을 시켜 줄기를 한 자쯤 남겨두고 베어버린 후 뿌리를 캐어 움[] 속에 갈무리하도록 한다. 움 속에 갈무리할 때는 복판으로 몰지 말고 가장자리로 줄지어 심은 다음 등겨[]로 덮어준다.

사람의 훈기도 싫어하지 않으며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 바탕을 살펴 법대로 하면 잘 안 될 걱정이 없으니 엄동이 닥쳐 몹시 춥고 어두울 때에도 한 줄기 미약한 양기를 통하여 따뜻이 보호해 주면 그대로 싹이 나오고 움도 틀 것이라고 하였다.


파초에게 배우는 수양과 지혜

 

옛 선인들은 자신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꽃과 나무를 아끼고 사랑했다. 옛 선인들은 자연 속의 꽃과 풀, 나무에 대해 많은 시를 읊었고, 글을 남기고 그림을 그려 그것이 지닌 물성을 닮고자 하였다. 강희맹은 그의 〈양초부〉에서 파초의 덕성을 노래하였다.

파초란 연한 바탕이 쉬 부서져 송죽 같은 곧은 자세는 없으나 중심에서 솟아나와 이어지는 모습이 진실로 유위() 유미()한 인심()과 도심()에 절로 맞으니 뜰 앞에 심어서 군자의 맑은 의론에 가까이 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정원에 고운 봄이 짙어져 가니
초록 파초 새잎을 펼치려는데
펼쳐내면 빗자룬 양 커질 것이니
탁물이란 대인들이 힘쓴 바였네.

 - 정조(), 〈섬돌 앞의 파초()〉

 



정조(), <파초도()>18세기, 종이에 수묵, 84.7×51.5 cm,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정조가 세손으로 있었던 시절에 섬돌 앞의 파초를 두고 쓴 시이다. 여름날 파초가 그 큰 잎을 펼쳐 무성한 녹음을 이뤄 그 그늘의 시원함을 만인에게 베풀듯이 이다음에 군주가 되면 성인의 정치를 펴보겠다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 있다. 정조가 그린 〈파초도〉도 남아 있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의 꿈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고 지혜를 배양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화상이다.

세손 시절 정조는 파초 한 그루를 섬돌 곁에 심어두고 보았다. 궁궐의 정원에는 봄이 짙어져 간다. 이럴 때 파초도 땅속에 묻어두었던 뿌리에서 새잎의 대궁을 밀어 올린다. 정조가 파초를 사랑한 것은 사물의 외형을 보고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학()의 군주답게 파초에 담긴 이치를 음미해야 한다고 여겼다.

탁물()이란 마음이 지향하는 자세를 사물의 속성에 미루는 것이다. 정조는 탁물을 이 파초에 두었고, 자신의 수양과 지혜의 자료로 삼은 것이다. 파초는 잎이 지지 않으며, 먼저 나온 잎이 어느 정도 자라면 곧이어 늘 새로운 잎이 말려 나온다.

파초는 중심을 같이하고 한곳에서 나와 너른 잎이 여러 개씩 붙어 있다. 처음 잎은 말려 올라가다 활짝 펼쳐지고, 다시금 돌돌 말린 새잎이 돋아난다. 줄기에 붙어 자란 잎사귀는 마치 척추에 붙은 갈비뼈들과 같아 그 조리 참으로 치밀하다.

송나라 학자 장재()는 이 파초의 속성에서 덕성을 잘 기르고 새로운 지혜를 배양하는 학문의 요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파초는 속이 꽉 차면 새 가지를 펼치는데, 새 속이 돌돌 말려 언뜻 벌써 뒤따르니, 새 속 배워 새 덕을 기르기를 바라고, 이내 따른 새잎으로 새 지혜를 펼쳐내리(, . , )”라고 하였다.

웅화()는 주()에서 “새 속으로 새 덕을 기른다는 것은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해당하고, 새잎 따라 새 지혜가 펼쳐진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공부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정조도 또한 이런 의미로 파초를 보았을 것이다.

눈 속에 피어난 파초의 덕

 

한겨울 눈이 쌓이는 계절에 남방식물인 파초가 자랄 리 없다. 그러나 왕유()는 눈 속에 생생하게 잎을 펼친 파초를 그렸다. 〈원안와설도()〉라는 그림이다. 원안()은 한나라 때의 사람이다.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려 민가()에서는 식량을 구걸하고 있는데, 원안의 문 앞에는 사람 자취가 없었다.

낙양령()이 집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원안에게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원안이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주리고 있는데 남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낙양령이 그 말을 듣고 그의 품덕을 찬양하며 효렴()으로 천거했다. 왕유는 이러한 원안의 맑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표상해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왕유 이후 중국의 역대 화가들이 원안의 고사를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 장언원()은 파초 그림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말하였지만, 심괄()은 [몽계필담()]에서 “눈 속에 그려진 파초는 마음에 얻어서 손이 응한 것이요, 뜻이 이르자 바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를 만든 것이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 천연의 아취를 깊이 얻었다. 이 경지는 속인들과 더불어 말하기가 어렵다”라고 한다.


그림은 정신으로 이해해야지 형상의 모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눈 속 파초는 예술이란 불변의 법칙이 없고 형편에 따라 변화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율곡 이이는 원안의 고사를 자신의 고요한 본성을 지키는() 즐거움으로 평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빈 관아에서 홀로 삼동을 날 적에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였다. 우의정 김이소()에게 보낸 편지에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연암은 겨울의 파초를 통해 원안()의 덕을 닮으려 했음을 볼 수 있다.



순천 송광사의 벽화, <단비구도()>

신광 스님이 달마 대사 앞에서 왼팔을 자르자 눈 속에서 파초 잎이 피어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김해 신어산 동림사와 김제 금산사 대웅전, 순천 송광사에는 파초 그림이 있다. 젊은 신광 스님이 동굴에서 좌선하는 달마 대사 앞에서 예리한 칼을 뽑아 왼팔을 잘라버리자 눈 속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이는 〈혜가단비도(〉로 [전등록()]에 나오는 ‘단비구법()’, 즉 팔을 잘라 법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파초는 왜 때 아닌 눈 속에서 피어났을까?


어느 해, 동짓달 초아흐렛날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신광은 달마 대사가 면벽하고 있는 굴 밖에 서서 꿈쩍도 않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것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얻고자 하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니라.”


달마 대사의 이 얘기를 듣던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러자 때 아닌 파초가 피어나 잘린 팔을 고이 받치는 것이었다. 그의 발심()이 열렬함을 본 달마 대사는
혜가(, 487~593)라는 법명을 주었다.


“그래,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마음이 심히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그 마음을 어디 가져와보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졌다.”
이 안심() 문답을 계기로 혜가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혜가는 보리달마를 6년 동안 받들었으며 [능가경()]과 전법의 증표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가사인 신의()를 받았으며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파초는 대승()의 십유(: 모든 사물 현상에는 실체가 없으며 모두 허망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열 가지 비유) 중 하나이다. 십유는 취말(), 포(), 염(), 파초(), 환(), 몽(), 영(), 향(), 부운(), 전()이다.

파초는 양파 껍질처럼 아무리 벗겨도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불완전한 인간에 비유되었다. 파초의 체질이 견실하지 못하고 취약한 것처럼 사람의 몸도 허망하고 무상한 것을 가리킨다. 파초를 갈가리 찢어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람 역시 눈[], 귀[], 코[], 혀[], 몸[], 의()를 서로 갈라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덧없는 존재며 모든 생명체의 삶도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처음부터 주인이 없으며 모든 존재가 각각 주인이다. 식물은 한 뼘의 땅만으로 살아간다. 세상은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만이 의미 있으며, 결국 죽어 묻힐 내 키만큼의 땅이 의미 있을 뿐이다.

요즘처럼 화장을 하거나 수목장을 하는 세상은 그 땅마저도 의미가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본다.

[출처] : 김종서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파초의 노래>'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네이버 지식백과]





9. 정조의〈환어행렬도〉- 사실과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 사이

정조,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다

 

1795년 윤2월 9일 이른 아침, 정조(, 1752~1800)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 자락에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는 매년 사도세자의 생신 무렵인 1월이나 2월이면 이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정조에게 이날의 행차가 더욱 각별했던 것은 이해가 바로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 두 분의 회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임금의 행차라면 기본적으로 시위 군관과 의장이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날의 행차에는 이에 더해서 혜경궁을 시중하는 나인들과 회갑 잔치를 위한 행사 인원, 잔치에 참석하는 내ㆍ외빈까지 함께 갔으니 수행 인원은 6천여 명에 달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현지에 먼저 가서 준비하거나 길목을 지키고 대기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고 해도 어가 행렬은 어림잡아 1킬로미터는 족히 되었음직하다. 1백여 명의 악대가 연주하고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말과 가마가 줄지어 가는 행차는 당시에도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만약 현재에 이러한 행차를 재현한다면 어떻게 기록할까? 아마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원될 것이다. 행렬을 따라가는 카메라, 임금을 클로즈업 하는 카메라, 관중의 반응과 주변 풍경을 담는 카메라는 물론이고, 대열 전체를 담기 위해 항공 촬영도 필요하다.

이렇게 찍은 필름들을 다시 편집하고 지도나 도표도 삽입해야, 어느 정도 행차의 면모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폭에 담은 그림이 있다. 바로 [화성능행도()] 병풍의 일곱 번째 폭인 <서울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차 그림― 환어행렬도()>이다(그림1). 어떻게 담고 있는지 오늘은 이 한 폭만을 유심히 살펴보자.




그림 1 김득신 외,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1795년경,

비단에 채색, 156.5×65.3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환어행렬도>가 어떤 그림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 그림이 속한 [화성능행도] 8폭 병풍의 나머지 폭에는 무엇이 그려 있는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당시 정조의 현륭원 방문은 ‘원행()’이기 때문에 이 그림을 ‘화성원행도’라 부르는 것이 옳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기존 명칭인 ‘화성능행도’를 사용하겠다).

이 병풍의 제1폭부터 6폭까지는 1795년 화성에서 열린 주요 행사를 한 폭씩 그렸다. 우선 주행사인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비롯해, 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베푼 양로연()과 과거시험 등을 그렸다. 정조의 문무진작을 상징하는 문묘 참배와 군사 훈련, 활쏘기 의식 등도 주제로 채택하였다([화성능행도] 각 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송희경의 네이버캐스트 -<화성능행도>를 참고하라).


그런데 이 병풍의 마지막 두 폭은 특정한 행사가 아니라 길 위의 여정을 그렸다. 제7폭은 어가 행렬이 수원에서 출발하여 시흥을 지나는 장면이고, 제8폭은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폭이 배다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 글에서 다룰 일곱 번째 폭은 온전히 행차 장면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행차는 단순히 서울에서 화성을 오고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능행의 핵심 사안이었던 것이다.



어가 행렬을 정비하고 그림으로 그려 정식으로 삼다 – 반차도와 행렬도

정조가 원행 준비에 있어 가장 신경 쓴 부분 중에 하나는 바로 어가 행렬의 대열 구성이었다. 국왕 스스로가 군복을 입고 검을 차고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는 행차는 그 자체로 군사 훈련의 일부였다. 새로 설립한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비롯하여 서로 다른 소속의 군사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치밀한 사전 계획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가 행렬을 정밀하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은 군사 통솔과 같은 실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왕을 보위한 가운데 모든 구성원이 각자 맡은 자리에 적합하게 서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의 확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어행렬도>가 행렬의 일부를 확대하거나 생략하지 않고 대열의 전체 구성을 보여주는 점이 주목된다. <환어행렬도>를 당시 행차의 사전 연습을 위해 제작된 반차도()와 비교해보면 그 배열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림 2.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의장기’ 부분



그림 3. <화성원행반차도> ‘의장기’ 부분1794년, 책 크기 15.36×36.6cm, 규장각 소장(규16031)


그 일례로 규장각에 소장된 <화성원행반차도>와 <환어행렬도>의 의장기 부분을 비교해 보자(그림 2, 3). 말을 탄 장교를 필두로 19기의 깃발이 뒤따른다. 사각형의 큰 깃발인 대기치()가 좌우로 7기씩 늘어섰고 가운데에는 좁고 긴 고초기()가 5기 자리하였다.

대기치를 살펴보면 우선 도로를 정리하는 푸른색 깃발인 청도()가 좌우로 앞장선다. 이어서 두 가지 색이 반씩 칠해진 깃발이 등장한다. 진영의 네 모퉁이에 세워지기 위한 각기()이다. 네 개의 각기 사이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문기()가 자리한다. 그 뒤로는 백호기와 현무기 그리고 주작기와 청룡기가 좌우로 각각 따른다.

반차도에는 희미하게 사신() 문양이 남아 있는데, <환어행렬도>에는 좁은 지면 때문인지 문양 대신에 각 사신의 방위에 해당하는 사방색을 채워 넣었다. 의장기의 마지막에는 황색의 금고기() 2기와 등사기()가 따른다. 금고기는 취타수를 지휘하는 깃발로서 ‘(금고)’ 두 글자가 적혀 있고, 등사기는 역시 지휘용 깃발로서 ‘나는 뱀’이 그려진다고 한다. 여기서는 반차도와 행렬도 모두 문양은 삽입하지 않았지만 황색 바탕에 붉은 언저리를 댄다는 지침은 지키고 있다.

이처럼 의장기의 대열을 자세히 비교하니, 반차도와 <환어행렬도>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 깃발의 모양과 색은 가까운 시기의 군정 서적인 [만기요람](1808)의 지침과 같다. 이는<환어행렬도>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행차의 모든 대열이 법식에 맞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정조는 적법한 도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시각 자료를 이용하였는가. <환어행렬도>의 사실성 이면에 있는 정조의 의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기초 자료가 되는 반차도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차도는 맡은 소임과 신분()에 따라 차례대로 세운() 그림이라는 뜻이다. 의식이나 행렬 중에 참석자의 위치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시한 것인데, 행사 전에 대열을 점검하거나 행사 후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하였다.

반차도가 정조대에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때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혁신 중 하나는 국왕의 도성 밖 행차와 같이 거대한 행렬을 처음 반차도로 정리하여 정식으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1795년 원행에 앞서 반차도를 들여오게 하고 여러 차례 연습하였다고 하니 정조의 철저함과 이에 부합하는 반차도의 효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조대 반차도의 혁신 중 또 다른 하나는 행차의 현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차도에 새로운 도해(: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함)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정조의 화성 원행을 기록한 반차도는 여러 본이 남아 있다. 그중 도해 방식이 크게 구별되는 두 종의 반차도를 비교해보자.




그림 4. <화성원행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


그림 5.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도식>에 실린 <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1796년,

책 크기 33.8×21.8cm, 규장각 소장


우선 앞서 살펴본 규장각 소장의 반차도는 전통적인 도법의 반차도이다(그림 4). 두루마리를 펴가면서 볼 때 행렬의 앞에서부터 점검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인물을 뒤에서 본 시점으로 그렸다. 단지 가마와 같이 옆에서 보아야만 그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물은 측면 시점으로 그렸다.


이처럼 후면과 측면이 복합된 시점은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지만 대열을 파악하기에는 적합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반복되는 인물들은 도장으로 찍어냈는데, 이를 통해 이 반차도가 감상용이 아니라 실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형식을 사용하였다(그림5). 인물을 모두 옆에서 보듯 겹쳐 그린 것이다. 보기에 자연스럽고 회화적이지만, 인물들이 겹쳐 있으니 실무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 의궤는 국가 행사를 치른 후에 관청에 두어 후대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국가 기록물이다.


그러나 을묘년(1795) 화성 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례적으로 101건이 출간되어 관청뿐 아니라 참석자들에게도 나누어졌다. ‘기록물’의 성격뿐 아니라 ‘기념물’의 성격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참석자들이 행차의 장관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정조는 이처럼 행차의 실무적인 사전 준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후에 당시의 장관을 실감나게 기억하기 위해 반차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환어행렬도>는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가 가졌던 시각적 효과에 시공간을 부여함으로써 더 현장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반차도에서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 그리고 <환어행렬도>로의 표현 변화는 이를테면 2D에서 3D로의 변화라고나 할까. 행차의 법식을 유지하면서도 현장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이 <환어행렬도>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행차를 멈추다

<환어행렬도>의 대열은 반차도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반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환어행렬도>는 특정한 시점을 상정하였는데, 바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멈춰 선 시점이다. 화면 상단에 시위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 혜경궁의 가마가 위치한 곳이다(그림6).




그림 6.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혜경궁의 가교’와 ‘정조의 어마’ 부분


그 주변은 푸른 포장으로 둘러져 있고, 대열에서 나온 궁중 내인과 일부 장교들이 이 주위에 몰려있다. 혜경궁이 가마에서 나와 쉬기 위해 포장을 둘러 가리고 시중을 들기 위해 내인과 장교들이 시위한 모습이다. 그 옆으로는 음식을 실은 수라마차가 대기해 있고,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막차도 설치되었다.


임금과 왕실 친척은 함부로 그리지 않는 전통 때문에 혜경궁께 다반을 올리는 정조의 모습은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반차도와 비교해 달라진 수행원의 대열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행차 도중 미음을 진상하는 시점을 택했을까? 이는 을묘년 원행 자체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하여 계획된 행사로서 행사의 상당 부분이 혜경궁에 집중된 것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행차 중에도 혜경궁의 안위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처럼 종종 행렬을 멈추고 혜경궁의 원기 회복을 위해 직접 미음이나 대추차 등을 올렸으며, 숙소에 다다르기 전에는 항상 먼저 가서 살폈다고 한다. 즉, 그림 속에서 미음 다반이 진상되는 장면은 이번 행차가 어머니에 대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환어행렬도>에서 혜경궁의 가마는 상단 중앙에 가장 눈에 띄게 표현되었다. 심지어 정조의 어가보다 혜경궁의 가마를 더 강조한 표현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정조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는 명목상 효의 실천이었지만, 그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혜경궁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왕위의 정통성 강화를 도모한 정조의 원행은 그림 속 행차의 구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화려하게 부각된 혜경궁 가마에서 수직으로 내려오면 행렬 중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교룡기()와 독기()가 있다(그림7). 교룡기와 독기는 왕권을 상징하는 국왕의 고유한 의장으로서 이러한 배치는 혜경궁의 추존과 왕권 강화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림 7.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교룡기’와 ‘독기’ 부분


수도권을 ‘새로이 부흥()’ 시키다 –시흥로와 시흥행궁

 

<환어행렬도>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시흥행궁을 앞에 둔 시흥로이다. 화면에서 하단 왼쪽에 있는 건물이 시흥행궁이다. 곧 행차할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호위 군사들이 시흥행궁에 천막을 두르고 대기하고 있다(그림8).



그림 8.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시흥행궁’ 부분


그런데 실제로 미음 다반이 진상되었던 장소와 시흥행궁은 11리나 떨어져 있어서 그림에서처럼 행렬의 끝과 시흥행궁의 입구가 맞닿을 수 없다. 왜곡을 감수하면서 시흥행궁을 화면 안에 끌어들인 것은 미음 진상이라는 사건뿐 아니라 시흥이라는 장소가 이 행차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혜경궁에게 행차 중에 미음 다반을 진상한 곳은 모두 여덟 군데이다. 그중에서 특히 시흥행궁 주변을 배경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그림의 공간적 배경인 시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을묘년 원행에 앞서 이미 여섯 번의 원행을 거행하였는데 시흥을 거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별히 장대해진 행렬을 수용하기 위해, 남태령을 거치는 좁고 험한 과천로 대신에 시흥을 거쳐 오는 평탄한 길을 새로 닦았다. 31리가 넘는 시흥로 상에는 중간 경숙처(宿)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114칸에 이르는 시흥행궁이다.

<환어행렬도>에 시흥로와 시흥행궁이 포함된 것은 이들이 이번 원행을 위해 특별히 시행된 대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그재그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로의 표현도 눈에 띈다. 도로를 주변 지세와 구분하여 표현한 것은 새로 닦은 시흥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시흥로의 건설은 원행을 위한 일회성 공사가 아니었다. 시흥로는 장기적으로 수도권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촉진하고자 계획되었다. 이는 공사를 마친 후 정조가 내린 조치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정조는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금천()’에서 ‘새로운 흥성’을 의미하는 ‘시흥()’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승격은 작업에 대한 포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흥로의 건설이 애초에 시흥의 승격과 육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정조가 ‘시흥’뿐 아니라 시흥로 상의 많은 지명을 이처럼 개칭하고, 개칭한 지명을 돌에 새겨 길가에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개칭된 지명은 ‘소사현()→만안현()’, ‘소황교()→황교()’, ‘황교()→대황교()’, ‘방축수()→만년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수수한()’ ‘작은()’ 등의 접두어 대신에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 만() 등을 사용하였다.

이는 시흥로를 명실공히 국왕의 행차로로 이름 짓는 과정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공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시흥로에서 정조의 행차를 보며 사람들은 시흥의 부흥을 곧 국왕의 위업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듣다

<환어행렬도>는 행차의 방향으로 볼 때 화성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환궁’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이 환궁을 택한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왕의 행차에서 환궁할 때 벌어진 일들을 참고해보면 환궁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역대 왕의 행차 기록을 살펴보면, 관습적으로 환궁 시에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상언()을 들어주는 예가 많았다. 정조는 특히 대민 접촉과 민안 해결의 기회로 행차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번 을묘년 원행에서도 환궁 시에 상언을 허용하였는데, 특히 시흥행궁에서 하루 머문 다음 날에는 시흥현령과 백성들과의 만남을 마련하여 고충을 들었다고 한다.



그림 9. [화성능행도]의 제7폭 <환어행렬도> ‘관광민인’ 부분


<환어행렬도>에서 특별히 백성들이 왕 앞에서 상언하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행렬의 주변에 빽빽하게 늘어선 백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그림 9). 이들은 국왕이 거동할 때면 성 밖으로 구경 나오는 ‘관광민인()’ 이라 지칭되는 존재들이다. 각자 자유로운 자세로 행렬을 구경하며 심지어는 천막을 치고 술을 파는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행차는 하나의 떠들썩한 구경거리이자 잔치로 변한 것이다. 정조는 이 원행에서 “백성들이 협로에서 관광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792년과 1794년의 행차에서는 관광민인들을 배려하여 통금을 늦추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단순히 백성들의 접근을 용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광을 장려한다고 볼 수 있다. 국왕 행차의 위용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행차 시 백성들에게 국왕의 위용을 과시할 뿐 아니라, 행차 주변으로 몰려든 인파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1779년 남한행궁에 행차하였을 때 적은 아래의 글은 ‘관광민인’을 대하는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산에 가득한 백성과 들에 가득한 곡식을 보니 감회가 있도다. 한 해 농사가 다행히 평년보다 잘된 것도 황천이 돌보심이다. 내 부덕함으로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관광민인 또한 담장처럼 둘러서니 억만을 헤아리는구나. 노인과 어린아이를 이끌고서 길을 가득 메웠도다. 내 오늘 이 곳에 임하여 이 백성들을 대하니 한 가지 생각에 가슴이 뛴다. 어찌하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믿는 것은 경들이 돕고 보좌하는 정성뿐이다. ([일성록] 1779년 8월 3일)  

 

정조는 행차에 모인 관광민인을 자신의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거울로 삼았다. 이를 그림 속에 적용하면 “담장처럼 둘러서 (……) 길을 가득 메”운 관광민인의 묘사가 역으로 정조의 선정()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행차의 기억을 유포하다

[화성능행도]는 모두 21건이 제작되어 궁중에 보관되었을 뿐 아니라, 행사를 담당한 참석자 15명에게 하사되었다. 이처럼 궁중의 행사를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제작하여 관원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그 대열 속에 있던 참석자들은 병풍을 받아 보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행차는 기록하듯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그들은 이 안에서 자신의 위치마저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환어행렬도>와 같은 시점으로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은 이 그림을 보듯이 행렬의 전 구성을 한눈에 볼 수 없었고, 다반이 진상되는 혜경궁의 가마와 시흥행궁을 한 시점에서 조망할 수 없었다. <환어행렬도>가 택한 시흥이라는 행차의 공간과 환궁이라는 시점, 그리고 혜경궁께 올리는 다반 진상이라는 의식은 각각 정조가 원행을 통해서 의도하였던 수도권의 발전과 대민 정치, 그리고 선친의 추존을 통한 왕위 전통성의 강화를 드러내기 위해 채택되었다.


 이를테면 <환어행렬도>는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인 것이다. 정조가 이 그림의 제작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행차의 시각 기록을 국가가 관장하고 유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은 분명하다. 이로써 그는 행차의 사전 계획뿐 아니라 사후 기억까지도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출처]: 유재빈 하버드 예칭연구소 연구원 <정조의〈환어행렬도〉'한국학,그림과 만나다)'[네이버 지식백과]





10. 역관() 이민식()이 소장한 그림들

- 중인 계층의 수장가들, 예술의 수요층으로 등장하다

1744년 여름, 와룡암()

 

1744년 여름 김광국(, 1727~1797)은 서화수장(: 글씨와 그림을 수집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광수(, 1696~1770)의 집 와룡암()을 방문한다.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시며 서화()에 대해 논하던 중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 순간 화가 심사정(,1707~

1769)이 낭창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이 두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비가 그치자 순간 정원 가득 피어오르는 경관이 완연한 미불(, 1051~1107, 중국 북송의 화가이자 서예가)의 수묵화 한 폭이다. 한동안 무릎을 안고 그 광경을 주시하던 심사정은 갑자기 크게 소리 지르며 종이를 찾더니 순식간에 정원의 풍광이 담긴 그림 한 장을 완성하였다. 필법에 윤기가 흐르고 화면은 촉촉하니 아름다웠다. 김광국과 김광수는 그림을 돌려 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는다. 이윽고 작고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세 사람이 함께 즐겁게 놀다 헤어졌다.


이날 심사정이 김광수의 집에서 그린 그림이 ‘와룡암의 작은 모임’, 곧 ‘와룡암소집도()’로 알려진 작은 그림이다. 방금이라도 물기가 떨어질 것 같은 화면은 비 온 뒤의 운치 있는 정경을 잘 살려냈다.

낮은 담 너머로 굵은 소나무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뜨락이 보인다. 그 뒤편의 안개 속에 서 있는 집 한 채가 와룡암이다. 와룡암이라는 이름은 굵은 둥치를 자랑하는 소나무에서 왔다.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일행 중 탕건을 쓴 인물은 주인 김광수이며, 그 앞에 모자를 쓴 두 사람이 심사정과 김광국이다.



심사정, 〈와룡암소집도()〉1764년, 종이에 수묵담채, 28.7×42.0cm, 간송미술관 소장


“비가 온 후 와룡암에서 흥이 일어나 심주(, 1427~1509, 조선 문인들이 선호한 명나라의 문인화가)를 모방하여 그리다(仿).” 화면 한편에 자리 잡은 이 글귀는 심사정이 직접 쓴 것이다. 심사정은 영조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그는 본래 사대부가에서 태어난 어엿한 양반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집안이 몰락한 후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 1676~1759)에게 그림을 배워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생전에 그를 만났던 문사들은 그가 세상살이에 당최 흥미가 없고, 그림에만 몰두하는 외골수에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가벼운 터치로 비 갠 뒤의 풍경을 빠르게 그려낸 〈와룡암소집도〉에는 자연의 변화에 화흥을 주체 못하고 곧바로 그림으로 그려내는 심사정의 예술가적 기질이 잘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심사정, 김광수, 김광국 세 사람이 그림을 사이에 놓고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김광수와 김광국

 

와룡암의 모임에 참석한 김광수와 김광국은 각기 그 세대를 대표하는 서화 수장가들이다. 어려서부터 옛것을 좋아하는 성품을 지녀 자신의 이름도 ‘상고당()’이라 지었다는 와룡암 주인 김광수는 후에 박지원(, 1737~1805)에게 “감상지학()의 개창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상고당은 부친이 예조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지만 자신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화 감평과 수집에 몰두하는 일생을 보냈다. 김광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작품에 대한 감상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스스로 ‘모아둔 것이 갑을()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자부할 정도로 정선()된 작품만을 소장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작품 중에 김광수의 소장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조영석(, 1686~1761)의 대표작 〈현이도()〉가 그 하나다. 〈현이도〉의 화면에 적은 조영석의 글은 다음과 같다.

성중()이 유령(㱓, 말을 잘 그렸던 청나라 화가)의 팔준도와 □□□□ 두 축을 가지고 와 나에게 〈현이도〉를 그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왕희지가 거위와 글씨를 바꾼 고사를 이용하여 마침내 즐거워하며 (이 그림을) 그린다.  

 

조영석, <현이도()>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채색, 31.5×43.3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영석은 성중의 부탁으로 〈현이도〉를 그리게 되었다. 성중은 김광수의 자()이다. 나무 사이에 멍석을 깔고 장기를 즐기는 한 무리의 양반이 보이며 그 곁에는 쌍륙과 바둑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인물도 있다. 놀이에 집중한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여유롭고 익살스럽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을 독특한 감성으로 포착한 조영석 특유의 화법이 잘 살아 있다. 〈현이도〉는 소폭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 풍속화의 선구자였던 조영석의 실력이 십분 발휘되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화기()에 드러난 것처럼, 이 그림에는 조영석의 재능뿐 아니라 그림을 요청한 김광수의 기호와 안목도 반영되어 있다.


심사정, 〈방심석전산수도(仿)〉1758년,

종이에 담채, 129.4×6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광수가 심사정과 그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목격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김광수의 글이 적혀 있는 심사정의 〈방심석전산수도(仿)〉라는 그림이다. 깊은 산속에 자리한 서재에서 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다. 독서하는 문인의 산거생활을 그린 이 그림의 주제와 형식은 조선시대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이다.

높은 산과 나무로 빈틈없이 채워진 화면에도 불구하고 간략한 필치와 담백한 색채는 초옥 주위의 고요함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거침없는 필치로 표현한 한가로우면서 다소 쓸쓸한 정서에서 심사정의 개성이 나타난다. “심석전(심주)의 그림 그리는 법을 따라 무인년(1758) 중추 서강 정영년을 위해 즉흥적으로 그리다(, , 西).” 그림 상단에 적힌 세 개의 글 중 화가가 직접 쓴 중앙의 화기에 의하면, 〈방심석전산수도〉는 1758년 정영년이라는 인물을 위해 그렸다.


화가의 글 오른편에 적힌 화평은 이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황대치(황공망)의 그림은 심개남(심주)에게 전해졌다. 붓 끝에 허실의 절묘한 뜻이 있다. 만산과 초부가 모두 텅 빈 듯하다. 동국의 현재가 (황공망과 심주를) 계승하여 셋이 성대하구나(, . 滿, , )!”

황공망(, 1269~1354)은 <부춘산거도()>를 그린 중국 원대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중국 문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황공망의 그림은 명대 들어 심주 등의 후대 화가들에 의해 높은 추앙을 받으며 계승되었다. 이 화평은 심사정 또한 황공망과 심주 같은 중국 문인화의 대가와 나란히 설 만한 화가로 추켜세우고 있다. 또 하나의 화평은 다음과 같다.   


아래 반폭을 펼치니 문득 마음도 게으르고 손도 용렬하여 억지로 그린 뜻이 있음을 알겠다. 한가한 정취도 부족하니 혹시 (화흥이 일지 않았을 때) 억지로 붓을 잡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현재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 . , ! ).  

 

이는 억지로 그린 용렬한 그림이며 이런 그림을 그린 까닭은 현재(심사정의 호)가 그리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일한 그림에 대해 한 화평에서는 중국의 대가에 못지않은 그림으로 평가하는 바와 달리, 다른 화평에서는 마지못해 그린 용렬한 그림 정도로 여긴 점이 흥미롭다.

한 작품에 대해 이렇듯 서로 다른 평가가 내려진 까닭은 두 글이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기 때문이다. 첫 번

째 화평의 주인공은 바로 김광수이며 두 번째 화평은 그의 동생 김광진()이 쓴 것이다. 두 화평에서 심사정의 그림에 공감하며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은 김광수였음을 알 수 있다.

〈와룡암소집도〉 역시 김광수의 집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은 만남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세상에 담을 쌓았던 심사정이 거침없이 와룡암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김광수가 화가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서화 애호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와룡암소집도〉는 화가에게 그와 그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관계가 창작의 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와룡암소집도〉가 그려진 이날의 조촐한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참석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린 김광국이다. 김광수를 찾아온 소년은 훗날 조선 제일의 서화 수장가가 되었다. 그는 대대로 내의를 지낸 중인집안 출신 의관()으로, 1747년 의과()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우두머리인 수의()를 지낸 김광국은 중국을 드나들며 우황 무역에 관여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이런 재화를 기반으로 동서고금의 명화를 모았으며, 나라 안팎에서 수집한 방대한 작품을 엮어 ‘석농화원()’이라는 화첩으로 만들었다. 와룡암 소집 당시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한 세대 앞서 서화 감상과 수장으로 이름 높았던 김광수와 감상우()로서 교제하였던 것이다.


김광국이 〈와룡암소집도〉에 대한 기록을 남긴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 그림을 가져왔지만 어느 순간 분실하였던 모양이다. 모임이 있었던 해로부터 4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이 그림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 사정은 그림에 첨부된 제발()에 적혀 있다.


신해년 가을 우연히 이민식의 집을 지나다 소장한 그림을 (보았다). 〈와룡암소집도〉가 거기에 있었다. 이 그림을 만지며 추억에 잠겼다. …… 두 사람의 무덤가에 심은 나무는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고 나 또한 백발노인이 되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감회가 너무 깊다. 용눌에게 (이 그림을) 얻어 나의 ‘화원’에 돌려놓았다. 매일 한 번씩 …… 한참을 슬퍼하였다. (, □□, . , , , . , , , . □□□, ).  

 


김종건, <와룡암소집도 발>종이, 41.6×27.4cm, 간송미술관 소장.
김광수가 지은 이 글은 별도의 종이에 적혀 있다. 글씨는 그의 아들 김종건이 썼다.


김광국은 우연히 들른 이민식의 집에서 뜻하지 않게 〈와룡암소집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때는 1791년이다. 18세 홍안의 소년은 어느덧 65세의 백발노인이 되었다. 김광수도, 심사정도 고인이 된 지 오래다. 추억 어린 그림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김광수와 심사정을 떠올리며 진한 회한에 잠긴 김광국은 이민식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석농화원’이라고 이름 붙인 그의 애장품첩에 수록하고 매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기곤 하였던 것이다.


김광국은 자신의 수중으로 돌아온 그림에 그간의 사정을 적은 글을 첨부하였다. 이 그림은 다시는 분실되지 않고 그의 자손들을 통해 근대까지 전해졌다. 심사정의 화흥(), 김광수의 서화 취미, 김광국의 감회 등 동시대를 살았던 화가와 수장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와룡암소집도〉는 그들의 사연과 함께 근대의 대표적인 수장가 전형필(, 1906~1962)의 소장품이 되었다.


김홍도가 사랑한 용눌 이민식

 

위의 김광국의 글에서 한 이름이 눈에 띈다. 바로 〈와룡암소집도〉를 김광국에게 양도한 ‘이민식(1755~?)’이다. 김광국의 글은 손상이 심하여 이름 부분을 정확하게 읽기 어렵다. 단지 ‘’, ‘’, ‘’ 이 세 글자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은 부분으로 어렵지 않게 용눌()이라는 자를 사용한 이민식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용눌’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조선시대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두 작품의 수취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김홍도(, 1745~?)의 그림이다. 용눌이 김홍도에게 받은 첫 번째 작품은 부채에 그린 〈서원아집도(西)〉이다.

 ‘서원아집’이란 중국 북송대 왕선()이라는 귀족의 정원에서 소식(, 1037~1101), 미불(), 이공린() 등 전설의 문인들이 모였던 모임을 일컫는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서원아집은 아취 있는 문인 모임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 모임을 그림으로 재현한 서원아집도 또한 세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김홍도, 〈서원아집도(西)〉1778년, 종이에 담채, 26.8×8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에서도 〈서원아집도〉는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김홍도와 강세황(, 1713~1791)이다. 부채에 그린 〈서원아집도〉 중앙에 부채꼴로 쓰인 글이 있다. 이 글은 미불()이 기록한 〈서원아집도 기()〉이다.

글을 쓴 이는 김홍도의 스승이자 당대의 문인서화가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부채에 기문을 적으며 행의 장단을 교차시켜 보기 좋게 연출하였다. 김홍도 또한 바위에 글을 쓰는 미불 곁에 자신의 관지()를 재치 있게 적었다. “무술년 여름 비 오는 중에 용눌에게 그려주다().”


무술년은 1778년이다. 만년에 관직에 나간 강세황이 문과정시()에 수석 합격하여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었던 해이다. 강세황이 관직에 나간 이후 두 사람은 사포서()에 함께 근무하며 각별한 관계가 되었다. 이후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에 많은 화평()과 제발(: 감상록)을 적었지만 〈서원아집도〉를 그린 1778년 무렵은 유난히 많은 합작을 남긴 시기였다.

이듬해 김홍도는 용눌을 위하여 다시 작품을 제작하였다. 바로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신선도팔폭병풍()]이다. 이 그림 역시 각 폭마다 강세황의 찬문()이 곁들여 있다. 그 마지막에는 김홍도가 직접 이용눌에게 쓴 헌사가 있다.

이 군 용눌이 그림을 사랑하는 정도가 골수에 미쳐 있다. 내가 용눌을 사랑하는 것이 용눌이 그림을 사랑하는 것과 같아 이 그림을 그려준다. 정밀함이 극단에 이르면 뜻은 그림 밖에 있게 된다. 세상에 자운()이 있다면 자운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해년(1779) 음력 시월 사능(. , , . , . , . ).  

 


김홍도, [신선도팔폭병풍] 중 〈선동취적()〉1779년,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우측 상단의 제발()에서 용눌에 대한 김홍도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신선도 역시 선면 〈서원아집도〉와 마찬가지로 용눌, 즉 이민식에게 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단원이 이민식에게 두 번씩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해도 이것이 화가와 주문자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에 주목하는 이유는 〈서원아집도〉와 〈신선도〉의 화격 때문이다. 〈서원아집도〉는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로 그림의 격조가 매우 높다.

<신선도>의 경우 작품의 손상이 심하고 후대의 보필이 상당부분 첨가되어 세심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본래 빼어난 화격을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두 그림 모두 김홍도가 왕공사대부()를 위해 제작한 그림을 능가한다. 심지어 각 폭마다 강세황의 글씨까지 곁들여져 당대 서화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두 그림을 받은 이민식은 한어 역관으로 알려져 있다. [잡과방목()]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754년생으로 20세에 증광시 역과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주부(簿)를 지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모은 [성원록()]에서 용눌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민식은 해주인으로,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인승() 또한 역관으로 통훈대부 절충장군이라는 정삼품의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해주 이씨 집안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집안의 혼인관계를 살펴보자.

이민식의 처는 변광우()의 딸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변광우는 왜어() 역관을 다수 배출하였던 밀양 변씨 집안 출신으로, 그 또한 상통사(, 정삼품 이하 역관인 통사 가운데 상급의 통사)를 지냈다.

이인승의 장인 정동우()는 내의()로서 의과()에서 전문화되었던 온양 정씨 출신이다. 이민식의 집안은 기술직 중인가와 통혼을 통해 상당한 세를 형성했던 중인 전문가 집안으로 추정된다.

이민식의 가계에는 역관 외에도 도화서 화원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부친 이인승의 출계()한 동생 이인희()는 김홍도의 제자로 알려진 김득신()의 사위였다. 이와 더불어 더욱 주목되는 인물은 이인승과 삼종간(, 팔촌)인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1745~1821

)이다.

그는 도화서에서 김홍도와 함께 활동한 동갑내기 화원이었다. 두 사람은 도화서 내에서도 각별히 돈독한 사이로 함께 제작한 작품이 다수 남아 있을 정도다. 이민식과 김홍도를 이어주는 이러한 인적 관계는 그가 김홍도로부터 그림을 받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민식의 집안이 한어 역관에 종사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경제적 능력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8세기는 중국 및 일본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역관들이 무역을 주도하며 거대한 상업 자본을 축적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민식의 집안이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집안이라면 이 집안 또한 무역에 관여하며 부를 일구었을 가능성이 높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문서가 있다. 이민식의 부친 이인승이 관련된 인삼의 공납과 관련된 ‘공인문기()’이다. 공인문기란 대동법 시행 이후 각 관청에 필요한 공물을 납부하는 권리를 매매하는 문서이다.

대동법 시행 이후 공인권()은 부유한 역관이나 의원들에게 좋은 자본 투자처로서 활용되었다. 공인 권리의 중요성은 대리인을 내세우는 매매 관습을 따르지 않고, 거래 당사자들이 직접 문서를 작성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공인문기는 1757년 호서와 영남의 인삼 2근 5냥 6전(미가(): 100섬 4두)을 혜민서에 납품하는 권리를 은자 415냥에 이인승에게 양도하였다는 내용이다. 공인권의 가격인 400냥은 당시 서울에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액수이다. 이인승이 재력 면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를 이어 역관으로 종사한 이민식 또한 부친에 필적하는 부를 소유하였다면, 값이 ‘300냥’을 호가했다는 김홍도의 그림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경제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공인문기, 1757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121764).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428~429면)

이민식이 소장했던 그림으로 확인되는 작품은 〈와룡암소집도〉를 비롯한 단 세 점뿐이다. 따라서 그를 ‘수장가’ 혹은 ‘후원자’로서 규정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민식이 소장한 그림의 화격()이다. 이 그림들의 높은 수준은 그림을 좋아하는 정도가 골수에 미쳤다고 묘사한 김홍도의 글이 가리키는 곳을 환기시킨다.

이는 이민식이 단순한 호사가가 아니라 그림을 보는 안목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홍도와 강세황이 이민식을 위하여 거듭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예술적 능력을 발휘하였던 까닭은 그가 예술과 예술가를 깊이 이해한 서화 애호가였기 때문이다.

김광국과 이민식의 존재는 18세기 들어 역관과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직 중인 계층이 예술의 주요 수요층으로서 한 축을 이루었던 사회적 상황을 대변한다. 조선 전반기 서화 감상과 수장은 품위 있는 여가활동으로 그 주인공은 항상 왕공사대부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중인계층 수장가들이 점차 서화 감상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시에 미술은 그 질과 내용에서 전례 없는 풍성함을 이루었다. 변화의 한편에는 경제적 능력만큼이나 서화에 대한 높은 안목을 지닌 새로운 서화 애호가들이 있었다. 이민식이 소장했던 그림들은 세월과 함께 희미해진 이들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출처] : 이경화 대만대 예술연구소 <역관(譯官) 이민식(李敏埴)이 소장한 그림들>'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11. 옛 일본 소설 속의 조선 풍속화 - 조선을 조선답게 그려려고 한 한 화가의 열망

두 장의 풍속화

 

[에혼 다이코기()]라는 옛 일본의 책이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의 일생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장편 역사소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미지를 결정지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데요시의 일대기니만큼, 그의 일생에서 결말부에 해당하는 임진왜란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1797년에서 1802년까지 6년간에 걸쳐 전 7편 84책이 출간된 [에혼 다이코기]에서 임진왜란은 제6~7편 24책에 걸쳐 그려진다.


제6편 말미인 권12에는 두 장의 그림이 실려 있다(그림 1). 건물 안에는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남성과 화려하게 장식된 방에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신윤복 화풍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한눈에 조선의 풍속화임을 알 수 있다.

[에혼 다이코기]에 실려 있는 다른 삽화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이질적인 이 두 장의 그림이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에 실려 있는 것일까? 그림의 위와 옆에는 이 책의 삽화를 그린 화가 오카다 교쿠잔(, 1737~1812)의 설명이 실려 있어 힌트가 된다. 이 글에서는 교쿠잔의 설명을 실마리 삼아, 옛 일본 소설 속에 실려 있는 조선 풍속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림 1. 신윤복 풍의 조선시대 풍속화[에혼 다이코기] 제6편 권12, 개인 소장


근세 일본의 해외 정보

 

교쿠잔이 조선 풍속화를 입수한 배후에는 일본의 18세기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인 기무라 겐카도(, 1736~1802)를 둘러싼 그룹이 존재한다. 1764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성대중(, 1732~1809)을 통해 겐카도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덕무(, 1741~1793)는 [청장관전서()] 권32에 <겸가당()>이라는 기사를 실어 겐카도 그룹의 열린 세계관을 칭송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겐카도 그룹의 세계관은 서구권을 포함한 전 세계의 지식을 장악하게 해준 그들의 정보망에서 비롯되었다.

겐카도 그룹의 정보력을 상징하는 것이, [에혼 다이코기]의 화가 교쿠잔이 삽화를 그린 중국 지리서 [당토명승도회()](1806)이다. 18세기 당시 일본과 청국()은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고, 청국 남부의 상인들이 규슈() 서부의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에서 교역만을 행했다.

일본의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사키 부교()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이 지역의 대외 무역을 직접 관장했다. 1790년대에 나가사키 부교로 부임했던 나가카와 다다테루(, 1753~1830)는 일본인 중국어 통역관들을 통하여 복건, 절강, 강소 등지에서 온 상인들에게 중국의 정보를 수집하여, 건륭() 연간(1736~1795) 청국 남부 지역의 실정을 상세한 삽화와 함께 전하는 [청속기문()](1799)이라는 지리지()를 출판했다.

 이 책은 전근대 일본 최대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1712)나 저명한 중국 지리지인 [당토훈몽도회()](1719)와 함께 18세기 일본에서 향유되던 중국 지식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권12에서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신상과 그를 모시는 관제묘()를 묘사하고 있다. 건물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아직 평면적인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겐카도 그룹은 이 [청속기문]보다 더 치밀하고 스케일이 큰 삽화와 방대한 정보를 수록한 [당토명승도회]라는 문헌을 출판했다. 1802년에 사망한 겐카도의 유지를 받들어 [에혼 다이코기]의 삽화를 그린 교쿠잔이 삽화 제작을 주도한 이 문헌은 겐카도가 소장하던 [대명일통지()], [명사()] 등 50여 종의 명ㆍ청대 문헌에 의거하여 제작되었다.

원래는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여 6편까지 간행될 예정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간행된 것은 베이징과 근교()를 다룬 제1편뿐이었다.

18세기에 일본에서 제작한 다른 중국 지리지들과 비교할 때, [당토명승도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삽화이다. 이는 “근세 판각 세밀화의 개창자이며, 화법과 필력이 고금에 비할 바 없다”는 평가를 받는 교쿠잔과 19세기 들어 그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판각수(판목에 글과 그림을 새기는 직업)들의 실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예를 들어 권1 오문조참지도()에서는 중국 청대의 궁전인 자금성() 오문()에 관리들이 입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입체적인 건물과 수십 명의 사람, 이국풍의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세밀하면서도 광대하게 조감하고 있다. 명ㆍ청대 중국의 풍속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삽화는 전근대 일본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에혼 다이코기]에 실린 조선 풍속화와 겐카도 그룹

 

한편 교쿠잔은 [당토명승도회]가 제작되던 같은 시기에 [에혼 다이코기]의 삽화도 그렸다. 전근대 일본 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에혼 다이코기]의 성립에는 겐카도 그룹이 축적한 해외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적은 편이다.


[에혼 다이코기]의 성립, 그리고 조선 풍속화가 그 안에 실리게 된 배경에 겐카도 그룹의 네트워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정보가 교쿠잔의 증언 속에서 발견되었다.

1801년에 간행한 제6편 말미에 수록된 발문()에 따르면, 교쿠잔은 제6편에서 시작되는 임진왜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조선인과 조선 풍속에 대한 자료를 백방으로 찾았지만, “한학()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중화()에 대한 것은 상세히 알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토로한다.

 이에 당시의 국제 무역항인 나가사키 출신의 우마타()라는 사람이 교쿠잔에게 “괴로워하는 것을 동정하여 자기 고향에 연락해 한국인 그림을 열심히 찾았지만, 그 나라(조선)는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법령은 나라의 풍습을 기록한 글과 그림을 국경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자료를 입수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러는 가운데 [에혼 다이코기]의 출판인 측에서 삽화를 달라고 재촉을 했기 때문에, 교쿠잔은 어쩔 수 없이 기존에 하던 대로 중국풍으로 제6편의 삽화를 그려서 판각수에게 넘겼다.

그런데 제6편을 찍을 목판이 완성된 직후에 우마타가 쓰시마()를 통해 ‘조선화()’ 두 장을 구해서 교쿠잔에게 전해주었다. 아마도 부산 왜관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인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리라.

아무튼 이 두 장의 그림을 본 교쿠잔은 그 안에 그려진 “인물, 도구, 궁실, 산수에 이르기까지 한()도 아니고 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6편의 삽화에 그려 넣은 “한인()은 한()이 아니라 중화인()”임을 통탄한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목판을 이제 와서 죄다 바꾸면 출판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게 되므로 제6편에는 이를 반영하지 못하지만, 제7편에는 반영을 할 테니 양해 및 기대를 해달라고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발문은 끝난다.


이 발문에 보이는 우마타라는 사람은 겐카도 그룹의 한 명인 우마타 류로(, ?~1818?)로 생각된다. 우마타 류로는 근세 중국어 소설인 백화소설()의 애호가이자 유명한 소설가이다.

샴(지금의 타이)을 점령한 양산박()의 후예들이 고려국과 연합하여 히데요시와 싸운다는 내용의 역사소설 [수호후전()]을 이른 시기에 소장하고, 이 소설을 대하소설가 교쿠테이 바킨(, 1767~

1848)에게 보여주어 창작의 영감을 제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그에게는 쓰시마와 나가사키라는 근세 일본의 대외 창구를 통해 조선과 청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튼튼한 네트워크가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네트워크가 유지된 배후에는 겐카도 그룹의 인맥과 자금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튼 교쿠잔은 제6편 발문에서 독자들에게 한 약속을 제7편에서 충실히 지켰다. 그림 2는 일본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신립(, 1546~1592)이 민가에 숨는 장면으로, 제6편 권4에 실려 있다. 그림 3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수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원균(, 1540~1597)이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제7편 권6에 실려 있다.

이들 삽화를 그림 1에 실린 두 장의 조선 풍속화와 비교해보자. 그림 2에서는 중국풍으로 그려져 있던 조선인 여성의 머리모양과 치마가 그림 3에서는 조선 풍속화에 실려 있는 대로 바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  “일본군이 도착하자 신립이 민간의 여관에 숨다.”[에혼 다이코기] 6편 권4, 개인 소장



그림 3.  “일본군이 도착하자 신립이 민간의 여관에 숨다.”[에혼 다이코기] 6편 권4, 개인 소장



또한 그림 2에는 조선 집의 실내에 격자무늬의 타일이 깔려 있고 곡선 다리의 의자가 보이는 반면, 그림 3에서는 무늬 없는 바닥과 직선 다리의 의자, 그리고 풍속화에 그려져 있는 그대로의 팔각 창틀 등이 보인다. 어렵게 입수한 조선 풍속화 속에 보이는 요소들을 교쿠잔 제7편에 충실히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제 전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선ㆍ명ㆍ일본의 풍습을 모두 알고자 진력한 교쿠잔이, 이 두 장의 조선 풍속화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림 4.  “조선 사민()이 처자를 데리고 산림에 숨다.”[에혼 다이코기] 7편 권6, 개인 소장


마지막으로 그림 4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인민이 피난하는 장면이다. 남성의 복장을 포함한 전체적인 인물 묘사에는 앞서 본 조선 풍속화의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여성이 입은 치마 무늬는 조선 풍속화 속 여성의 치마 무늬를 차용한 것 같다. 반면,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여성이 입은 치마의 기하학적 무늬는 조선 풍속화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소개된 서양화에 보이는 여성 의상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 같다. 임진왜란 7년간에 일어난 일을 삽화로 그리면서 조선인과 조선 풍속을 묘사하기에는 간신히 입수한 두 장의 조선 풍속화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정보 유통에 제약이 많던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외국의 풍물을 실감나게 그리고자 한 화가 교쿠잔의 갈망으로 인해 두 장의 조선 풍속화가 일본 임진왜란 소설에 실리게 된 사실은 역사 속의 흥미로운 에피소드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가며

 

교쿠잔이 [에혼 다이코기]에서 보여준 직업적 양심(?)은 당대나 후대의 화가들에게 공유되지 않았다. [에혼 다이코기] 제6편보다 1년 전인 1800년에 간행된 [에혼 조선군기()]나 1853~1854년에 간행된 [에혼 조선정벌기()]에서는, 한국ㆍ한국인과 중국ㆍ중국인이 서로 다른 풍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진력한 교쿠잔의 문제의식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림 5에 묘사된 조선인들의 머리모양과 옷은 교쿠잔의 말을 빌리면, “한()이 아니라 중화인()”인 것이다.


그림 6. "고니시가 여러 성을 함락시키자 근방의 인민이 모두 산림에 숨다.”[에혼 조선군기] 권3,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교쿠잔으로 상징되는 겐카도 그룹은 풍부하고 정확한 해외 지식을 수집·공유·출판하고자 노력했다. 겐카도 그룹의 이러한 성과는 근세 일본이 산출한 가장 보편적인(universal) 문화 형태였다. 이러한 백과사전적인 겐카도 그룹의 소식이 조선에 전해져 평가 받고, 겐카도 그룹의 정보망을 통해 입수된 조선의 풍속화가 옛 일본 소설에 실려 전해진다는 사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동아시아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열린 마음의 교류가 한중일 삼국에서 널리 공유되거나 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국 중심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각국에서 주류를 차지했다는 것은 시대적 한계임과 동시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출처]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옛 일본 소설 속의 조선 풍속화>'한국학, 그림과 만나다'